못난 주인공이 생각나는 밤
구체적인 해석은 독자에게 맡기면서 정확한 단어 선택으로 분위기를 선명하게 전달하는 클레어 키건의 글은 경계가 불분명하지만 색채가 선명한 수채화처럼 아름답다.
/ 허진, <맡겨진 소녀> '옮긴이의 말' 중에서
0.
'이동진 선정 2023년 소설책 베스트 4'를 보았다.
한 권은 읽은 책이었고, 나머지는 이번에 알게 됐다. 소개를 들으며, 읽을까 말까, 살까 빌릴까 하는데, 그중 클레어 키건의 <맡겨진 소녀>가 제일 궁금했다. 여백이 많은 문장들이고, 거기에 '품격'이 있다고. 특히 마지막 두 줄은, 같은 말을 반복하는데 굉장히 함축적이라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에 따라 이야기 전체의 인상이 바뀔 수도 있다고.
품격이 느껴지는 문장을 직접 읽어보고 싶기도 했고, 마지막 두 문장이 대체 무얼까, 너무나 알고 싶었다. 100쪽 정도의 짧은 책이라 하니, 우선 이 책부터 읽어야지 하고 주문했다.
1.
현재진행형의 문장으로 쓰였다. 단순히 그 때문은 아니고, 묘사가 너무 생생해서, 정말 바로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을 보는 것 같다. 아니, 심지어 내 속에서 하는 말 같다는 착각도 든다.
하지만 그 '생생한 묘사'는 자세하고 촘촘한 설명에서 온 게 아니다. 주인공은 영화 제목처럼 '말 없는', 그러나 킨셀라 아저씨가 표현한 대로 '할 말은 하는' 아이다. 겉으로만 그렇고 속으로는 조잘대는 식이 아니라, 속으로도, 그러니까 소설의 화자로서도 딱 그렇게 상황을 풀어낸다.
그래서 영화를 볼 때, 주인공의 속 이야기를 소설처럼 듣지 못하는데도, 갑갑함도, 이질감도 없다.
상황과 사람에 대한 딱 필요한 만큼의 설명으로(영화에선 장면으로), 우리는 충분히 짐작하고 알아챌 수 있다. 그러면서 이야기에 더 들어가게 된다.
2.
여백이 많고 함축적인 글에 빠져들지 않을 수 없었다. 작가는 "애쓴 흔적을 들어내는 데 많은 공을 들인다", "애써 설명하는 것보다 독자의 지력을 믿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는데, '애쓴 흔적'을 들어내야 한다는 생각은 한 적도 없고(그렇다고 '드러내려' 한 적도 없지만), '독자의 지력을 믿기'보다 '내 안의 무언가를 최대한 정확히 표현'하려고 많은 언어들을 썼던 내 문장에 대해 생각하게 됐다.
"단문으로 써라" 같은 글쓰기에 대한 가르침이 대체로는 맞을지라도 언제나, 모두에게나 진리는 아닐 것이다. 비슷하게, 함축적인 문장에 품격이 깃드는 게 사실이라 해도 모두가, 항상 그런 식으로 쓸 일은 아니다. 그럴 수도 없겠고.
하지만 내가 지금까지 이러저러한 이유로 긴 생머리를 고수했다고, 그걸 내 것이라고 여길 필요는 없다. 숏컷에, 파마머리에, 혹은 단발에 자꾸 눈이 가고 상큼하다고 느낀다면, 해볼 수 있지 않은가. 아니, 해봐야 하지 않겠나. 그런 시도, 수많은 삽질 끝에 얻어낸 '스타일'이 진짜 내 것이라 할 만하다.
여백이 많은 글, 꾹꾹 눌러 담은 글, 그래서 빨리 다음으로 넘어가지 못하는 글에 마음이 간다. 그런 식으로 써보고 싶게 만드는 글이었다.
3.
'형제자매 많은 가난한 집의 한 아이가 친척 집에 맡겨져 몇 달을 살고 돌아온다'는 간단하고 특별할 것 없는 이야기에 이렇게 푹 잠길 수 있다는 게 신기하다. 단편은, 좋은 이야기라면 '굵게' 느낀다. 그래도 이야기가 주는 감흥은, 아무래도 '짧다'. 그런데 이 소설은 그렇지가 않다. 주인공처럼, 한 철 집을 떠나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과 보낸, 잊을 수 없는 추억이 생긴 것만 같다.
책을 읽은 날 밤, 어쩌다 깨서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자주 있는 일), 소설의 이야기가 떠올라 울었다. 가족 사이에서도 별달리 관심이나 애정을 받지 못하는 존재, 내 마음, 내 생각, 내 기분은 안중에 없다는 듯 함부로 말하는 어른, 나를 소중하게, 조심스럽게 대해주는 단 한 사람, 그때 느끼는 당황스러움, 어찌할 바 모름, 그러면서도 내가 중요할 수도 있나 처음으로 드는 의문, 티 나지 않게 표현하는 따스하고 섬세한 보살핌, 그러다 서서히 믿게 되는 마음... 타인은 절대 알 수도, 끼어들 수도 없는 단단한 관계.
내 일 같기도 하고, 아니기도 한, 겪었던 일이기도 하고 꿈꿨던 것 같기도 한, 그런 상황들, 그때 감정들이 한꺼번에 다가왔다.
4.
영화는 제목을 <말 없는 소녀>로 바꾸었지만, 내용과 분위기 모두 거의 소설과 같다. 영화만 보아도 소설의 '좋음'을 충분히 느낄 수 있겠다, 싶을 정도로. (물론, 그래도 소설이 더 좋았다.) 킨셀라 아저씨가 처음엔 주인공에게 조금 데면데면하게 대한다는 설정 정도만 바꾼 듯하다.
어쨌든, 제목을 바꾼 게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이 이야기는 '말 없음'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영화든 소설이든, 누구라도 이 이야기를 다 보고 나면 킨셀라 아저씨의 말, "입 다물기/침묵하기 딱 좋은 기회를 놓쳐서 많은 것을 잃는 사람이 너무 많다"를 가슴에 품게 될 것 같다.
이렇게 짧은 이야기를 통해, 잔잔하고 깊게 느끼게 하면서, 잊을 수 없는 교훈까지 준다니. 생각할수록 대단하다.
5.
그런데, 나는 한편으로 '남의 이야기' 같기도 했다.
맡겨진 아이가 나였어도 그런 사랑을 받을 수 있었을까? 그런 질문을 계속 했다. 나 역시 맡겨질 수 있고, 그런 맘씨 좋은 친척 어른도 있을 수 있는데, 나는 그렇게 말이 없지도 않고, 함께 지내기에 편한 아이도 못 된다.
그러니까 나는, 차라리 주인공의 언니들 중 한 명 같았다. (책보다 영화에서 표현되는데,) 사실은 똑같이 관심도 애정도 못 받았고, 겉으로는 아닌 척하지만 똑같이 슬프고 적응하지 못하는데, 그게 입을 닫는 식이 아니라 뾰족하게 말하고 되바라지게 표현하는 그런 아이. 그래서 결국 부모조차도 남에게 맡길 수 없다고 여기는 아이(주인공은 관심 없는 부모의 눈에도, 남에게 맡기기 제일 괜찮겠다, 싶었을 것이다). 한 철이지만 다른 세계로 가서 좋은 사람들에게 보살핌과 사랑을 받고 돌아온 동생을 보며, 애써 아닌 척하지만 샘이 나고 상처받는 아이. 그것을 숨기려 더 딱딱해지는 아이.
그 언니들이 나 같아서 좀 더 울었던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 사려 깊은 친척들은 그런 아이였어도, 그 나름의 사랑을 주었을 것이다. 그 나름의 애틋한 관계가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렇게 믿고 싶은 건지도 모르겠다.
6.
만약 언니들 중 한 명이 그 친척에게 갔어도, '할 말만 하는 게 좋다'는 교훈을 얻고 돌아왔을까? 나는 그게 못내 궁금하다. 킨셀라 아저씨와 아주머니는 그대로이니, 할 말만 하는 분들이니 그랬을 것 같기도 하고, 다른 아이에게서는 다른 보석 같은 점을 찾아봐주었을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내 눈엔, 이 이야기의 주인공이 '안된 아이'이긴 하나, '못난 아이'는 아니다. 못난 주인공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 싶고, 쓰고 싶어지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