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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an 14. 2024

고레에다 히로카즈 <괴물> : 동공지진의 시간

이렇게 내놓은 이야기를 누가 거절할 수 있지?

0.

아무런 정보 없이 봤다. 감독의 이름과 좋은 평을 받고 있다는 것 정도.

그러길 잘했다.

영화를 정말 재미있게 봤고, 보자마자, 다시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건 처음이었다.


*그러니까 이 글은, 영화를 이미 봤거나, 당분간 볼 계획이 없거나, 사전 정보를 알아도 영화를 즐기는 데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사람들을 위한 것입니다.



1.

영화가 끝나자마자, 같이 본 남편은 "음악, 누구야? 좋던데."라고 말했다. ('사카모토 류이치'라고 여기저기 쓰여 있었습니다, 남편님. 그가 누구냐면...)

어떤 사람은 이 영화를 보고, 연출이나 미장센을 감탄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연기도 마찬가지다.


나로서는, 시간이 지날수록 영화를 곱씹을수록 '스토리텔링'이 남아 있다.

다른 것보다 스토리텔링이 제일 특별하다기보다, 내가 가진 옷걸이로는 갈수록 그것이 주렁주렁 달린달까.



2.

영화는 3부로 나뉘었는데, 1부를 볼 때는 '스릴러인가?' 싶을 정도로(실제로 네이버 영화 정보에 장르가 '드라마, 스릴러'로 나와 있다. 엥? 공식적으로 스릴러란 말인가!), 의문스럽고 소름이 돋는다.


귀신이나 괴물이 튀어나올 것 같은 으스스함이라기보다, '아니, 사람들이 왜 저래?' '이게... 무슨 상황인 거야' 이해할 수 없어서, 으스스해진다. 이해하기 위한 몸부림처럼, 영화에서 보여준 정보와 이미 갖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 이야기를 짜맞춘다. 이런 이야기인가, 이렇게 된 건가, 하고.


1부 안에서도 생각의 방향이 여러 번 바뀐다. 처음엔 '학폭' 얘기인가? 싶다가, 이내 '싱글맘' 얘기인가? 했다. 그러다 '공교육' 혹은 '교육의 본질과 멀어진 학교' 이야기인가? 쪽으로 기울었고, 그보다 '파편화된 가족'에 관한 이야기로구나 했더니만... 느닷없이 2부로 넘어간다. 거기선 또 '대세에 휩쓸리는 사회에서 희생당하는 개인'에 대한 이야기인가 짐작했다가, 아마도 '사소한 오해가 낳은 비극' 이야기인가 보다 했건만, 또 3부로 훌쩍.


그러니까, 영화는 '1부', '2부', '3부'라고 스크린 한쪽에 친절하게 써주지도 않고, 암막 같은 걸로 구분해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관객은 일상적이지 않은 사건, 특정한 장면이나 소리 등으로 같은 시간을 다른 시점으로 세 번에 걸쳐 보여준다는 걸 점차 알게 된다.



3.

그러니, 누군가 이 영화를 두고 '<라쇼몽>인 줄 알았는데 <번지점프를 하다>로 끝난다'고 했다던데, <라쇼몽> 생각이 날 만도 하다.


2부가 시작됐다는 걸 어느 순간 깨닫고는, (나는 꽤 지나서 알았다. 화재가 또 난 줄... 호리 선생님이 다른 곳에서 행복하게 사는 줄...) '아, 이게 이렇게 된 거였나?' '헐... 이 사람에겐 이런 사정이...' 하고 인식의 빈 구멍을 메꾼다. 그리고 그렇게 보강된 사실로 드디어 잘 알게 됐다고 생각하고, 어떤 판단을 새로 내리거나 철회한다.


그러다 3부로 넘어간다. (이번엔 금방 알아챘다) 그럼 또 동공지진의 시간. 아까 알던 것도 제대로 안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인식의 미완성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오해하고 있었다는 걸 깨닫는다. 그쯤엔 이게 3부로 끝인지, 앞으로 또 몇 개의 시선이 튀어나오는 구성인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진다.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은, 이 영화가 특정한 주제(그러니까 학폭이나 싱글맘이나 공교육이나... 그런 주제)에 대한 영화가 아니고, 일종의 <라쇼몽>처럼 '입장마다 다른 진실'에 관한 영화인가 싶기 때문이다.


하지만, <라쇼몽>이 '진실이 과연 있는가?'에 대해 부정하는 쪽으로, 한 개인이 온전히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결국 진실 자체에도 물음표를 던지는 영화라면, 이 영화는 '개인이 가진 정보나 편견에 의해 진실을 오독하는 현실'에 관한 이야기이기 때문에 결이 다르다. 어쨌거나 철학적으로는 덜 난해하다(우리네 세상이 그렇다는 건 경험적으로 아니까).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누가 뭣 때문에 오해를 한 거야, 어디서부터 문제가 꼬인 거야, 쟤는 왜 굳이 저런 말/행동을 한 거야, 등을 따지느라 머리가 바쁘다.

그렇다면 왜 마음까지 복잡해지는가?



4.

시점을 바꾼 이야기를 순차적으로 받아들이면서, 관객은 결국 사건이랄까 상황이랄까 사람들에 관해서랄까 더 '잘' 알게 된다. 그 과정에서, 관객은 나쁜 놈 혹은 범인, 즉 '괴물'을 찾게 되는데, 더 잘 알수록 더 확신하고 더 끔찍하게 여기고 더 한심해한다.


이전에 지목했던 범인을 취소하는 일이 이어진다. 한 번쯤은 '아, 실수. 아까 내가 잘 몰랐네' 하고 무심히 넘어가지만, 정말 확신범이었는데 그를 이해하게 되는 상황을 재차 맞이하고는... 결국 내 가슴을 꾹꾹 찌르는 손가락을 느낀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우리나라 드라마 <괴물>의 전반부처럼, 단순히 괴물 찾기('이 중 누가 범인이게?')를 하는 영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화는 관객을 헷갈리게 하고 오도하려고 의도적으로 속이는 게 아니다. 각 시점에선, 그 입장에선 (무지와 편견을 참작하자면) 그렇게 볼 수밖에 없는 면이 있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한 개인은 무지와 편견을 디폴트로 가진 인간이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타인과 상황을 오해/오판하게 된다는 것을 (관객도 그 사람의 시선을 따라갈 때 그랬던 것처럼) 이해하게 만드는 영화다. 나아가 그 결과로, 누구든 의도하지 않고도, 악의를 가지지 않고도 가해자가 되는 상황을 깨닫게 만든다.


그래서 영화를 다시 본다면, 엄마나 선생님의 시점으로 이야기가 전개될 때 그의 입장에서만 보지 않으면 이야기가 어떻게 다가오는지 경험하고 싶은 것이지, 감독이 나를 어떻게 속였는지, 어떤 트릭에 내가 넘어갔는지 확인하고 싶어서가 아니다.



5.

이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데... 그렇게 머리도 마음도 복잡해지고 있는데... 3부가 깊어질수록 영화는 전혀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펼쳐놓는다.


한편으론 비로소 이 모든 이야기를 이해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따스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런 이야기였다고?' 갑작스럽기도 했다. 이런 전개와 설정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그럴 법하지 않다기보다, 말 그대로 예상하지 못했다.)


내가 좋아하는 영화평론가 김도훈은 '명확한 퀴어 영화'이며, '10대 퀴어 영화의 고전으로 남을 작품'이라고 평했다. 확실히 그러하지만, 그렇게 말하면, 아무래도 영화를 틀에 가두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너와 나>가 여고생 사이의 사랑 이야기지만, 퀴어 영화라고만 말할 수 없듯이.


퀴어 영화를 보려는 사람이 그 리스트에서 이 영화를 찾을 수 있어야 하지만, 퀴어 영화를 볼 생각이 아닌 사람에게 이 영화가 제외될 이유는 전혀 없다. 아이들이 나오는 영화, 감동적인 영화, 반전 있는 영화, 웰메이드 영화, 초등학교 고학년 아이랑 함께 볼 영화, 죽기 전에 꼭 봐야 할 영화 등등 이 영화의 문을 열 손잡이는 많다.


그러니까 이 영화가 동성애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오해와 편견을 걷어내고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하려고, 이 모든 장치를 활용하고 여러 주제를 건드리며 처음부터 달려갔느냐, 하면 나는 그렇게 느끼진 않았다는 뜻이다.


거꾸로, 자신의 입장에서 타인을 쉽게 판단하는 것의 위험이나 의도하지 않고도 타인에게 상처와 피해를 주기도 하는 인간사의 복잡함에 대해 영화를 보는 내내 줄곧 깨닫고 안타까웠기 때문에, 어떤 설정이나 전개가 나와도 이해하려 했을 것 같다.



6.

영화가 끝나고 영화관에 한참 그대로 앉아 있었다.

위에 썼듯이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기독교 안의 반동성애 정서에 이의를 제기하려고 썼던 장편소설을 이젠 버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졌다고 느꼈다. (영화가 감독이랑 하는 게임은 아니지만)


이렇게, 기본적으로 장착된 편견과 그에 자동적으로 결집하는 오해를 스스로 의심하고 반성하게 만든 다음, 안쓰러운 아이들의 속사정과 상황을 한껏 궁금하게 만든 다음, 두 남자아이의 사랑 이야기를 꺼내는데... 와. 이 아이들을 누가 응원하지 않을 수 있지?


몰입해서 으스스한 기분을 느꼈다가, 사람마다 주목하고 사건을 꿰어 맞추다가, 그렇게 지적으로 흥분했다가, 헤집어진 마음에 난처했다가, 마음 줄 곳을 찾아 함께 편안했다가, 안쓰럽다가 안타깝다가 조마조마하다가 마침내 안도하고 따뜻한 마음을 모으게 만드는 영화를(감독과 각본가가 말하기를, 아이들은 죽은 게 아니랍니다!), 이렇게 압도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놓은 이야기를 누가 거절할 수 있지?


돌아와서, 비평과 후기와 인터뷰를 찾아보았다.

각본을 직접 쓰는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중 처음으로 각본가가 따로 있는 작품이라고 한다. 오래전부터 '만약 내가 각본을 쓰지 않는다면 각본가는 바로 사카모토 유지일 것이다'라고 했었다고.


사카모토 유지를 검색했다. 영화를 많이 보는 것도 아니고, 일본드라마는 하나도 본 적 없는데, 그의 작품 중 몇 개가 눈에 익었다.


특히 <그래도, 살아간다>는 드라마 작가 수업을 들을 때, 적어둔 작품이었다. 수강생이 쓴 '피해자와 가해자 가족 간의 사랑'을 소재로 한 대본을 리뷰할 때였는데, 작가 선생님은 '대충 이럴 것이다' 짐작하며 쓰지 말라고, 그럼 이야기가 얇아진다며, 이 작품을 보라고 했다. 이 드라마를 보면 '정말 저렇겠구나...' 전혀 몰랐던 부분에 놀라기도 하고 깊이 공감하게 된다고.


그리고 <마더>. 이것 역시 드라마 공부를 하면서 알게 되었는데, 온갖 레퍼런스를 찾아보는 짝꿍이 추천했다. 대본집을 보는데 술술 넘어가고, 장면이 눈앞에 재생된다고. 마침 도서관에 있기에 빌렸다.


그때까지 나는 제대로 본 대본집이 없었다. 대본집을 보는 것이 사실 고역이었다. 차라리 드라마를 보거나 소설을 읽을 일이었다. 그래서 대충 참고만 할 생각이었는데... 오마나. 진짜, 한번 읽으면 멈출 수가 없다. 분명히 지문과 대사가 쓰여 있는 대본인데, 소설을 읽는 것 같달까, 아니다, 누군가 바로 옆에서 해주는 이야기를 듣는 것 같다. 그리고 정말 장면이 눈앞에서... 드라마는 안 봐도 될 것 같았다.

대단한 작가다, 했었다. (당연히 여자인 줄 알았는데...)


그런데 이 영화의 각본가가 바로 그 작가였다니! (그리고 남자였다니!!)

역시 질 수밖에 없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가 각본가랑 하는 싸움은 아니지만)


차가운 방바닥에 누워 완벽한 패배의 쓴맛을 음미하며, 내 글을 위한 복수의 칼날을 갈아야겠다. (결투를 벌이겠다는 건 아니지만)


그런 의미에서, 사카모토 유지가 2018년 한 인터뷰에서 했던 말을 곱씹어본다.

 

역시 TV는 수백만 명, 수천만 명의 사람들이 보는 것입니다. 근데 저는 전혀 거기다 대고 안 썼고. '이런 생각을 하는 건 나뿐일까?'라고 생각하는 사람을 위해서 쓰고 싶습니다. 아무한테도 상담할 수 없고, 이해받을 수 있을 것 같지도 않고, 막연히 '이런 마음은 나밖에 갖고 있지 않겠구나'라고 혼자 생각하는 사람을 찾아다니는 느낌이 들어서. 그러다 보면 저절로 소수파가 되고 세상의 큰 의견과 좀 달라지는 것 같긴 해요. 그래서 세상을 바꿀 생각은 전혀 없어요. 하지만, 그런 시청자 중의 한 사람이 '아, 이렇게 생각해도 괜찮구나'라고 안심할 수 있다면, 그것이 무엇보다도 기쁠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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