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개월, '점오(漸悟)'의 시간
0.
'줌으로 함께 읽기'를 했다. 매주 화요일 밤마다, 40분씩. 10개월쯤 걸렸다. 책도 책이지만, 이 새로운 경험이 꽤나 좋았다. 아주 사소한 일이지만, 내 삶에 괜찮은 붓질 하나 한 것 같다.
아이 셋을 키우는 주부로서 저녁 시간은 언제나 빡세다. 목욕을 시키고(하라고 하고), 저녁을 만들고, 저녁을 먹고 먹이고, 뒷정리를 하고, 육퇴!를 외치며 나도 씻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아이들에게 잘 자라는 인사를 미리 하고, 안방 문을 걸어 잠그고 '줌'에 접속한다. 에어팟을 끼고, 단지 '독서자'가 되어 책으로 걸어 들어간다.
어느 날엔 반갑게 웃으며 인사하고 바로, 또 어느 날엔 짧게 근황을 나눈 다음, 이어서 읽었다. 한 페이지씩 돌아가면서. 40분이 지나 줌이 종료되면(무료회원이라), 그렇게 우리의 책 읽기도 끝난다. 메신저로 마무리 인사를 하고, 때로 오늘 읽은 부분에 대해 몇 마디 덧붙이기도 했다.
졸려서, 단순히 멍해져서, 이해가 가질 않아서, 문 밖에서 엄마를 찾아서, 책에 대한 집중도는 조금 헐거웠다. 중간중간 멈춰 곱씹고 싶을 때도 있었고, 되돌아가 다시 읽고 싶은 부분도 있었다. 그런 때에는, 지극히 개인적인 행위인 '독서'를 함께 한다는 게 맞지 않다고 느끼기도 했다.
하지만 돌아보면, 역시 괜찮은 일이었다.
1.
워낙 유명한 책이라 진작부터 알고 있었지만, '진짜 읽고 싶다'고 생각하게 된 것은 최재천 샘의 어떤 강의를 듣고 나서였다. (이 일화는 여기저기서 많이 말씀하신 듯한데) 이 책을 처음 읽을 때, 너무 재미있어서 놓지 못하고 아침부터 식사도 거르고 밤새 읽었단다. 책을 덮고 새벽빛으로 밝아지는 창밖 풍경을 보는데, 그동안 이해되지 않던 많은 것들이 착착착 정리되고 이해되더라고. 그 경험을 나도 할 수 있을까? 그게 너무 궁금했다.
비로소 책을 사서 읽는데, 정말 재미있었다. 물론, 내 지식이나 지성의 한계 때문에 매끈하게 이해되진 않았다. 되풀이해서 읽기도 하고, 중간중간 별표를 쳐놓는 심정으로 사뿐히 넘어가기도 하면서 나아갔다. 괜히 유명한 책, 유명한 작가가 아니라고 감탄하면서 읽었는데, 어느 순간부터 진도가 나가지 않았다. 반쯤 되는 곳에 꽂힌 책갈피가 몇 주가 지나도 그대로였다.
어떻게 끝까지 읽을까 고민하다, 함께 읽기로 했다. 지난해 1월부터 <다정한 것이 살아남는다>를 징검다리 삼아 읽고, 4월 <이기적 유전자>를 시작했다. 그러니까 1년 가까이 이 책을 끼고 살았다. 책상 한편에 늘 굴러다녔다. 읽어야지, 읽어야 하는데, 그런 압박감 없이, 일상의 한 부분으로 떼어두고 '마침내' 읽은 것이다.
거의 하루 동안 완전히 몰입해 읽은 최재천 선생님, 그리고 거의 1년 동안 부담스럽지 않게 조금씩 읽은 나. 그 차이 때문인지, 나는 그분처럼 하루 만에 세상이 달라 보이거나 진로와 인생의 항로가 바뀌진 않았다. 그래도 곰곰 생각하면, 이 책을 결국 다 읽었다는 것 말고 내 삶이 달라진 것도 같다. 세계관이 조정됐달까?
2.
무려 유시민 작가도 이 책을 다섯 번이나 읽고도 이해가 안 가는 부분이 있다고 했다. 유전자가 '이기적'이라는 개념의 뜻이나, 개체가 아니라 유전자만이 불멸한다는 책의 핵심적인 내용은 겨우 이해하는 중이다. 소리 내어 이 책을 한 번 완독했을 뿐이니, 멋진 숲을 거닐고 얻은 감상을 기록하려고 한다. 그래야 나중에 또 왔을 때 눈을 가늘게 뜨며 '여기... 왔었던가?' 하지 않겠지.
내게 인상적인 부분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 있다는 것이다. 그게 가장 옳거나 구성원 모두에게 이익이 가서가 아니라, 구성원들의 전략이 어떻든 평형을 이루는 상태가 있다고.
유전자들은 살아남고 번식하기 위해 각자 나름의 전략을 취하는데, 이를테면 '매파'와 '비둘기파'는 결과적으로 어느 정도의 비율로 평형 상태를 이룬다. 공격적이기만 한 것이 유리한지 아닌지, 순하고 너그러운 것이 좋은 결과로 이어지는지 아닌지는 구성원의 비율이 어떠한가에 따라 다르고(즉, 착하다고 늘 인기가 많은 것도, 싸움을 잘한다고 늘 이기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한 사회는 '매파'와 '비둘기파'의 비율이 일정하게 된다.
'어디에나 미친 X은 있다'라는 말이 떠올랐다. '어느 곳에 갔는데 진상이 없다면 바로 당신이 진상이다'라는 말도. 공통의 문화나 합의된 규범의 영향력이 강한 사회일수록 다른 사회와 구별되는 특징이 있기도 하지만, 구성원이 언제나 똑같진 않다. 꼭 규칙을 어기는 사람이 있다. 그런 식으로 주목을 받거나 이익을 얻으려는 사람이 있다. 안 그러던 사람이 그래도 될 것 같은 곳에선 다른 모습을 보이기도 하고.
거짓말하는 사람들을 없애면, 시끄러운 사람들을 몰아내면, 나쁜 짓하는 사람들을 가두면, 참말만 하고 협조적이고 착한 사람들만 남을 것 같은데, 그렇지가 않다는 것이다. 이 사실을 차근차근(책을 읽는 긴 시간 동안) 차분히 음미하다 보니, 한편으론 허무하기도 했다. 좋은 사회를 만들려는 노력은 어떤 식으로 해야 하는 거지?
예수님의 가르침 중 하나. 밭의 주인이 좋은 씨를 뿌렸는데, 싹이 날 때 보니 가라지도 있었다. 종들이 물었다. "밭에 좋은 씨를 심지 않았나요? 가라지가 어디서 난 거예요?" 주인이 대답한다. "원수가 뿌렸구나." 종들이 말한다. "가라지를 뽑을까요?" 주인이 말한다. "그냥 두어라. 곡식까지 뽑힐라. 추수 때에 구분하여 가라지는 불사를 것이다."
나는 이 이야기가 생각났고, 이미 이해한 줄 알았는데 조금 다르게 보였다. (비유로서의 가라지는 확실히 나쁜 의미로 쓰였지만) '가라지'의 입장에서는 '좋은 씨'도 한정된 자원을 두고 경쟁하는 다른 무리일 뿐이겠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에, 인간 공동체에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행동방식으로 살아가는 각각의 무리들은 서로가 불편하고 싫을 것이다. 없어지면 자기에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생각과 다르게 우리가 있는 곳은 묘하게 열린 세계라, 원하지 않는 타인이 비집고 들어온다. 게다가 '우리 무리'인 줄 알았던 자가 변절하기도 한다.
묘하다. 그러니까 결국, '나와 다른 타인을 삭제하는 것'은 나의 쾌적하고 행복한 삶을 위해 택할 수 있는 옵션이 아닌 것이다.
3.
그렇다면 어떻게 살아야 하지?
이 책에서 또 하나 인상적인 부분이 '반복된 죄수의 딜레마' 게임이다. 단번의 게임에서는 어떤 전략이 어떤 결과를 얻는지 명확하다. 양쪽 모두 협력하면 좋고, 양쪽 모두 배신하면 나쁘다. 한쪽이 배신하면, 배신하는 쪽은 최고 점수, 배신당하는 쪽은 최악. 그러니 상대가 배신하지 않을 것 같으면 내가 배신하는 게 제일 좋은 경우다. 그런데 이 게임이 반복된다면? '몇 번' 반복될지도 모르는 채로. 그럼 어떤 전략이 높은 점수를 받을까?
여러 전략을 공모해서 컴퓨터 프로그램을 통해 겨루게 했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결과는 대강 'Tit For Tat 전략(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처음에는 협력하고 상대가 배신을 때리면 보복하는 전략)'이 높은 점수를 차지했다. 그리고 TFT는 어떤 전략(착하기만 하거나 못되기만 하거나 이걸 어떤 방식으로 섞거나 임의로 하거나 등의 수십 가지 전략)과 붙어도 잘 대항했다. 하지만 엄밀히는 이 방식이 '진화적으로 안정된 전략'은 아닌데, 돌연변이가 침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착하기만 한 전략이 들어와 살 수 있다. 그리고 이곳에 못된 전략이 들어오면 그들은 고득점을 얻는다.
한편, 못된 전략만 있는 곳에선 어떤 전략도 살아남을 수 없다. 그러므로 못된 전략 역시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이다. 이렇게 두 가지 이상의 전략이 모두 안정적일 수 있는데, 먼저 우위를 차지하는 쪽이 우위에 머문다.
못된 사람들만 있는 곳에서, 착한 사람이 살아남기는 어렵다. 언제나 뺏기고 상처를 받는다. 그가 흑화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이런 세상에서 흑화하지 않고, 여전히 착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 착한 사람들의 무리에서 계속 점수를 얻는 것이다. 이 무리가 커지면 못된 전략이 한쪽에서 여전히 힘을 과시하고 있어도, 역시 아주 강건하게 살아나갈 수 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복음'처럼 들렸다. (이기는 것까진 바라지도 못하고) 지지 않기 위해, 짓밟히지 않기 위해, 존엄을 잃지 않고 사람처럼 살기 위해, 나까지 저들처럼 빼앗고 상처를 주면서 살지 않아도 된다. 좋은 사람들을 알아보고 사귀고 함께하면 된다. 그들과 손잡으면 된다.
나의 유년시절을 돌아본다. 자원이 부족한 곳에서, 대체로 방치된 채로 지내며 나는 본능적으로 살 궁리를 하고, 살 방도를 찾았다. 그건 대개 드센 사람이 되고, 악바리처럼 구는 것이었다. 내 힘을 키워야 한다고, 그래야 당하지 않을 수 있다고 불안한 채로 노력했다. (아이들을 키울 때도, '착하게' 키우는 게 맞는지 확신할 수 없었다. 아이를 위해서는, 못된 사람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육체적/사회적/정신적/경제적 힘을 장착하라고 가르쳐야 하는 게 아닐까?) 그런데 다행하게도, 살아가면서 먼저 주기도 하고 관대하기도 한 사람들을 만났다. 당연하게도 그들과 있을 때 더 행복했다. 그리고 가만히 보면, 그런 사람들도 힘 있는 사람들만큼, 때로는 더, 잘 살아갔다.
그런 것들이 새삼 보였다. 그러니까 나는, 못된 전략을 쓰는 사람들 사이에서 살아남을 전략을 강구하기보다, 내가 좋은 사람이 되어서, 좋은 사람들과 사회를 이루고, 다른 좋은 사회들과 연대하는 데에 애쓰면 된다. 아이들에게도 그렇게 가르치면 되지 않을까? 힘세고 못된 사람이 되기보다, 좋은 사람이 되라고, (물론 착하기만 해선 안 되고 화낼 줄도, 거절할 줄도 알아야 하지만,) 그리고 좋은 사람들과 손잡으라고. 이것은 불안하지도, 나를 무너뜨리는 일도 아니다.
4.
이런 생각을 곱씹는 시간이 좋았다. 10개월의 '점오(漸悟)'의 시간이었다고, 정리를 해두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