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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Feb 03. 2024

<딸이 조용히 무너져 있었다> : 지는 패를 잡았을 때

이런 주름이 생긴 내 삶이 나는 더 좋다.

아이는 천천히 팔소매를 걷어 보였고 나는 숨을 멈추었다. 아이의 하얀 팔에는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은, 가로로 그어진 칼자국들이 있었다.
"언제, 어떻게, 도대체 왜?"
사고를 멈춘 머릿속에서 많은 질문들이 뒤섞여 아우성치고 있었지만 아이는 태연히 말했다.
"그러니까 안 보는 게 낫다고 했잖아, 충격받는다고..."  /5쪽


제목만 봐도 서늘하다. 책날개에 적힌 저자 김현아의 약력을 보면, 엘리트코스를 밟은 인정받는 의사다. 서문을 펼쳐 몇 줄 읽자마자, 책을 붙든 손부터 진지해진다.


우리는 누군가의 능력을, 스스로에게 발휘한 결과에 비춰 평가하는 데 익숙하다. 그것은 대체로 합리적인 판단이다. 내 가슴에 콱 박히는 글을 쓰는 사람에게 글쓰기를 배우고 싶다. 스타일리스트를 고용한다면 그 사람의 옷차림을 본다. 하지만 참작이 필요할 때가 있다. 최고의 피아니스트가 레슨은 못할 수도 있다. 머리를 잘하는 미용사의 머리가 정작 별로일 수 있다. 관계성이 더 허약해지는 경우도 있다. 의사도 병에 걸린다. 투자전문가라고 부자는 아니다.


그리고 여기서 더. 교사의 자식이라고 공부를 잘하지 못할 수 있고, 미모의 부모를 둔 자식의 외모가 평범할 수 있으며, 인류를 구한 자의 자식이 반영웅이 되기도 한다. 우리는 그것을 안다. 자식은 부모 마음대로 안 된다. '자식복'이란 따로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사교육 없이 세 아이를 명문대에 보낸' 엄마의 책을 읽고, <케빈에 대하여> 같은 영화, 평범한 부모에게 악마가 나오는 이야기에 혼란스럽고 불쾌해진다.


원하는 결과를 얻으려면 무얼 하고, 원하지 않는 결과를 피하려면 무얼 하지 말아야 되는지 배우는 것은 당연하다. 부모의 됨됨이나 능력 혹은 운명이 자식의 것과 인과관계가 흐릿하다는 걸 알면서도, 우리는 사람들에게서 그것을 찾기 위해 안간힘을 쓴다. 그만큼 자식은 소중하고 부모의 미래가 달렸(다고 믿)기 때문이다.

 

세 아이를 가진 엄마로서 '끔찍한' 일을 피하거나 대비하기 위해서였든, 다 가진 줄 알았던 사람의 '불행'을 통해 얄팍한 위안을 얻고자 했든, 이 책은 '읽어야 할 책'이 되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다 읽고 났을 때는 좋은 책이 으레 그렇듯, 전에 없던 생각을 마치 새삼 깨달은 것처럼 가슴에 품게 됐다.





안나가 입원한 지 3주가 지나 이제는 어느 정도 안정 상태가 되었으니 퇴원을 고려한다는 선배의 말을 듣고 이제 아이의 병이 다 나은 거라고 생각했다. 아이의 삶을 짓누르던 악몽은 이제 저 멀리 물러가서 다시는 아이를 괴롭히지 않을 거라고 믿었다. 대단한 착각이고 망상이었다. 이 병을 조금이나마 이해하려면 아직도 한참이나 많은 사건들을 겪고 시간이 흘러야 할 터였다.  /35쪽


글쓴이의 아이는 '양극성 스펙트럼 장애(조울증)' 진단을 받는다. 정신질환 대부분이 유전적 소인에 환경적 이유로 걸린다는 걸 알면서도, 엄마로서 무얼 잘못했던 건지, 무얼 놓쳤던 건지 지난 삶을 복기한다. 똑똑하고 재주 많고 성격도 좋은 아이였기에, 아닌 줄 알면서 옛일까지 후회하기도 한다. 부부 모두 의사지만 정신의학 쪽은 잘 몰라 공부하면서, 의사로서 경험과 인맥을 동원해 좋은 병원을 찾고 딸을 돕는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딸이 아픈 걸 처음 발견한 후 이 책을 쓴 7년 동안, 아이는 보호병동에 16번 입원한다. 대학을 마치지 못하고, 제대로 된 일자리를 얻지 못한다. 사회에서 자신의 자리와 역할을 찾기 위해 애써야 할 20대가 그렇게 지나간다.


그사이 저자는 '어느 정도 안나의 병을 이해했다고 생각한' 것에 대해 오판이었음을 인정하고 낙심하기도 하고 길을 잃는다. 일상에서 많은 것들을 가지치기하고, 미래에 대한 계획을 접는다. 일을 그만두어야 할지 심각하게 고민한다. (딸이 자해하거나 불안발작이 일어나서) 수시로 응급실로 호출되고, '카카오톡 문자를 오래 확인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을 정도로 불안해'했으며, 반복된 입원과 일상을 영위할 수 없을 정도로 상태가 나빠져서 딸과 같이 살게 되면서는 '이 병을 가진 친구들은 부모와 관계를 잘 유지하기 어렵고 원수지간이 안 되는 것만 해도 다행이라고 입을 모'으는 전문가들의 말을 실감한다.


양극성 장애와 딱 들어맞지 않는 아이의 증상들을 보며 양극성 장애와 경계성 인격장애, 불안장애에 관한 논문과 책을 읽고, 그 병에 걸린 고흐, 헤밍웨이, 커트 코베인, 버지니아 울프, 안젤리나 졸리 등 천재와 유명인들의 삶을 알아본다. 약을 잘 먹는데도 효과가 없고 부작용에 더 힘들어하는 것을 보면서 약의 기전에 대해, 다른 치료법에 대해, 나아가 이 병에 치료효과가 있다고 하는 마약에 대해서까지 진지하게 공부한다. 전기충격치료를 요청한다.


수없이 자해를 시도하고 자살위험이 높은 딸을 걱정하면서, '자살'에 대한 여러 관점에 대해서까지 천착한다. 상처 난 아이의 팔을 보면 여전히 흠칫 놀라지만, 자해가 꼭 '자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안 다음부터 팔에서 동맥이 가깝게 지나가는 곳, 인대가 가깝게 지나가서 손상되면 팔을 쓰지 못하는 부위가 어디인지를 아이에게 가르쳐주기'에 이른다.


저자 부부는 진단 6년차에 딸을 장애인으로 등록하려 한다. '장애인'이 사회에서 어떤 낙인을 받는지 알면서도, '자립을 간절히 원하는 아이가 병세가 조금 더 나아질 때까지만이라도 국가로부터 공식 부조를 받는 게 타당'할 뿐 아니라, '아이 입장에서 부모에게 손을 벌리는 것보다 자존심 회복에 더 나을 것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거듭 '불인정'의 결과를 받고, 정신질환자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돕지 못하는 사회에 분통을 터뜨린다.


저자는 여러 정신질환과 '신경 다양성'이란 개념을 살펴볼수록 정상/비정상의 구분에 의문을 품는다. 양극성 장애뿐 아니라 자폐 등 정신질환을 가진 자의 특별함, 창조성, 재능이 그가 가진 병과 불가분의 관계라면, 그것이 정말 '병'인지, '비정상'인지 묻는다. '우리는 정신질환이 살아가면서 원하지 않아도 우리를 찾는 수많은 병들과 별반 다르지 않고, 피하고 싶다고 피할 수 있는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시선에서 나아가, '장애란 비정상 상태이므로 마땅히 치유해서 정상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료적 시각을 '치유 폭력'으로 보는 입장에 동의를 표하고, '우리 몸에 생기는 어떤 문제보다도 정신질환에서의 이상과 정상의 경계는 모호하다'고 말한다.


대략의 의학적 설명, 관련된 다양한 사례와 레퍼런스가 딸 안나의 이야기와 함께 충실하게 실렸다. 저자의 인식, 태도, 마음의 변화를 차근차근 따라 읽으며 나 역시 '먹구름'과 '폭풍 치는 밤바다'를 지나 삶에서 '병을 끌어안아보'겠다는 자리에 서게 된다.





가족 중에 정신질환자가 있다는 것은 어떤 미사여구로도 좋은 일이라고 할 수 없다. 때로는 그 가족에게 내려진 '천형'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중략) 나는 그것이 죄도 벌도 아닌 바로 인생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정상 가족, 정상 신체 등 존재하지도 않는 완벽한 정상성 신화에 사로잡혀 인생이라는 잔혹한 도박에서 지는 패를 잡았다고 생각하는 경우 그것으로 인생이 끝났다고 절망하기 일쑤이다. 그러나 원래 인생은 잔혹하다. 그리고 우리는 이기는 패보다는 지는 패를 잡을 일이 훨씬 더 많다. 누군가가 항상 이기는 패만 잡는 것처럼 자랑을 일삼는 것을 보면 인생을 반도 모르는 덜 떨어진 사람이라고 속으로 비웃어도 된다. 사실이 그렇기 때문이다.  /222쪽


딱 5년 전, 육아를 시작하고 만 7년이 지났을 즈음, 나는 오랜만에 자살을 떠올렸고, 처음으로 정신과에 갔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입학하고 셋째는 젖을 막 뗐을 때였다. 팽팽하게 잡아당겨졌던 끈이 탁, 하고 끊어지듯, 차곡차곡 쌓인 육아의 고달픔이 그제야 나를 무너뜨렸다고 이해했다.


그 늪에서 빠져나오느라 허우적대면서, 나 역시 많은 책을 보고 여러 사람들에 대해 알아보고 지난 삶을 살펴보았다. 감정 기복이 심한 거나 극단적인 결론으로 쉽게 치닫곤 했던 것이 내 성격인 줄 알았다. 대략 한 해는 에너지가 뻗치고 그다음 해는 가라앉곤 했던 걸, 완전히 불태워 방전시키고 충천하는 일종의 삶의 패턴이라고 여겼다. 실제로 자해나 자살 시도를 한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첫 아이를 낳기 전까지) '자살'은 언제고 택할 수 있는 옵션처럼 떠올렸는데, 이런 생각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도 그때 알게 됐다.


약을 거부하는 나를 환자로 거절한 첫 번째 정신과의사는, 내가 양극성 장애 같다고 말하자 아니라고 단칼에 잘랐다. 그와 달리, 부모와의 관계나 유년기에 대해서는 일절 묻지 않고 현재의 상황과 상태에 집중하고, 약의 효과와 부작용에 대해서 차근차근 설명하고는 우울증과 치매의 연관성에 대한 연구결과를 들이밀어 당장이라도 약을 털어넣고 싶게 만든 두 번째 의사는, 진단을 성급히 내리는 대신 항우울제와 기분조절제를 처방하며 추이를 살폈다.(할머니 vs 또래의 남자: 두 명의 정신과 의사)


그 의사와 함께 6개월쯤 약을 먹고 일상을 되찾았고 내 의지로 서서히 약을 끊었다. 병원을 그만둘 즈음 ‘내가 양극성 장애가 맞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렇다고도 아니라고도 확답을 하지 않았다고 기억한다. (그때는 그런 확실한 진단명으로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저자의 말대로 '정상'과 '비정상'의 경계는 모호하고, 여러 정신질환의 증상은 겹친다. 내가 의학적 기준에 따라 어디에 속하든 속하지 않든, 나에게도 어떤 경향성과 위험 요인이 있고, 어쩌다 갖게 된 안전망 혹은 우연에 의해,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괜찮아지는 예후에 따라 이제는 조금 안심해도 될 상황이 되었다고 정리하고 있다. 또, 내 모든 '유별난' 점들이 제거된 나를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나는 나를 통합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보다 나는 내 아이들을, 세 딸을 유의하여 보게 되었다. 유전적 소인도 그렇고, 아이들 모두 유년기였을 때 우울증이었던 엄마가 당연히 어떤 흔적을 남겼을 테니까. 두려움이나 걱정이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할 걸 알면서도, 아이가 살아가면서 겪어야 할 수많은 어려움에 더해 어쩌면 가장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이 문제에 대한 생각에 이르면, 나는 모든 것에 굴복될 것처럼 막막해진다.


그래서 나는 이 책이, 솔직하다는 말을 훌쩍 뛰어넘는 저자의 용기가 정말 감동이 되었다. 저자가 말한 '지는 패'에 대한 이야기에 완전히 동의한다. 삶에는 원래 마음대로 안 되는 일이, 불행과 고난이, 그런 지는 패가 널려 있다. 그것을 쏙쏙 잘도 피하며 '끝'에 무사히 이르는 삶이 우리가, 내가 바라는 삶일까? 아니, 그런 인생이 가능하기나 할까?


'인생은 지는 패를 잡았을 때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는지에 따라 성패가 갈린다. 현실을 냉정하게 살피고 최악을 피하는 방법을 찾으며 인생의 층위를 풍부하게 할 수 있다면 이기는 패를 잡는 것 못지않은 인생이 될 수 있다'는 저자의 말에 고개를 끄덕이고 힘을 얻는 것이, 이미 지는 패를 잔뜩 쥔 자의 정신승리일까? 나로서는 그 말이 경험적으로나 희망으로나 사실일 수밖에 없다.


나도 내가 아프면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생각을 했고, 틀리다고 선을 그었던 다른 입장에 대해 놀랍게도 이해하게 되었다. 이를테면 이런저런 중독에 빠져 스스로를 망가뜨리고 삶을 포기하는 사람들은 단순히 어리석다고만 여겼었다(<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 마약을 책으로 배워보자). 한계에 부딪혀 무너졌던 내가, 완전히 망가질 뻔하면서 나와 다른 사람을 이해하게 된 내가, 그전의 나보다 좋다. 무엇이 성공인지 실패인지 모르겠지만, 누가 그것을 가르는지 모르겠지만, 이런 주름이 생긴 내 삶이 나는 더 좋다.


안나가 이렇게 아프지 않았다면, 어릴 때 그랬던 것처럼 반짝반짝 빛나는 아이로 자라 엄마 아빠가 익숙한 방식의 삶의 궤적에 들어갔다면 나는 아마도 삶의 깊이와 넓이를 별로 모르고 살았을 것이다. 사회적 약자, 소외된 자, 소수자들의 삶에 관해 별반 관심 갖지 않았을 것이다. 능력주의의 환상을 버리지도 못하고 사회정의나 공공선에 대해 반쪽자리 관념을 지닌 채 살았을 것이다. 장애인 차별 문제에 대해서도 피상적인 문제의식밖에 가지지 못했을 것이다. 아이의 병은 부모에게 인생을 새롭게 가르쳤고, 부모의 삶을 풍부하게 했다. 결국 부모는 얼마간 더 나은 사람이 될 수 있었다.  /223-224쪽


아이들에게 닥칠 모든 어려움을 내가 막아줄 수는 없지만, 나는 엄마로서 더 나은 사람이 될 마음의 준비를 하기로 한다. 그렇다고 놀라지 않을 수는 없겠지만, 분명히 말도 못 하게 어렵겠지만.


안나가 아픈 후 나는 항상 오늘이 너무 소중했다. (중략) 내일 어떻게 무너지더라도 오늘 하루를 잘 보냈다면 아이와 내가 함께 잘 산 인생이었다.  /241쪽


그리고 오늘을 잘 살기로 한다. 소중한 아이를 소중해하면서, 우리의 하루를 붙드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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