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도 헤도헨 Sep 02. 2024

18주. 시원한 안녕 (마라톤 5K/단양)

인생에 대해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운동회의 여파가 남았는지 아이들은 지금도 매일같이 달리기를 한다. 전력으로 뛰고 시간도 재가며 열심이다. 그 모습을 보며 '어린이들은 매일매일이 전력 질주구나' 하고 생각했다. 자기 몸에서 끌어올 수 있는 최대한의 에너지를 뿜으며 내달리는 어린이들의 모습을 보며 달리기란 꼭 빠르지 않아도 멋진 것이라고도 생각했다. 어른이 된 나는 축구에서도 그렇듯 삶에도 전력 질주보다 적절한 완급 조절이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때로는 이렇게 전력을 다해 질주하고 가끔은 폭주도 하는 삶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힘껏 내달린 다음 느끼는 개운함을 아는 사람은 인생의 어느 곡점에서 꼭 한번은 내달리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39-40쪽  

ㅡ노해원, <시골, 여자, 축구>



나는 '힘껏 내달린 다음 느끼는 개운함'을 일찍 알았다. 달리기뿐 아니라 모든 일에 전력으로 질주했다. 결과도 꽤 괜찮았다. 그래서 어른이 되어 부닥친 문제에서 (구직, 임신, 육아 등) 그때까지 훌륭하게 유용했던 방법으로 정신과 육체가 갈릴 때까지 달려들고도 잘 안 되었을 때 당황했었다. 결과도 결과지만 '최선을 다했는데도 안 되는' 이유를 몰라 괴로웠다.


세상엔 그런 일들이 천지라는 걸, 최선을 다했다고 결과가 보장되는, 그런 아름답고도 투명한 인과관계가 적용되는 일은 놀랍도록 적다는 걸 깨닫고 받아들이면서, 그에 대한 방어기제로 무기력을 체득하고 체념의 상태를 기본자세로 장착하면서, 진짜 어른이 되는 강을 건넜던 것 같다.


그런데도 때때로 아이와 같은 열정을 불사를 기회를 찾는다. 어릴 때 했던 대로 해도 되는 일을 만나면, 어린아이처럼 신이 난다. 그 자체의 즐거움인지, 내 몸이 기억하는 것을 다시 누리는 즐거움인지 가끔 헷갈린다.


개인의 삶에도 '오래된 미래'가 있는 걸까? 그걸 찾으며 살아가는 건가 싶을 때 아찔하다. 퇴행인가, 도망치는 건가 그런 의심을 품는다.


하지만 인류 역사도 나날이 진보하기만 하는 것은 아닌 마당에, 한낱 나의 삶이라고 앞으로 나아가고 성장 발전만 할 수는 없겠지. 혹은 '오래된 미래'가 퇴행이나 도망이 아니라 마땅히 나아가야 할 길이라 해도, <듄>에서처럼 기계문명을 다 없애고 고대로 돌아간 사회가 고대와 같을 수 없듯이, 내 맘대로 안 되는 세상을 한껏 경험하고 무기력과 체념을 배운 내가 어린이와 같진 않을 것이다.


마흔이 넘어 찾은 달리기의 즐거움을 두고 (나이에 걸맞게, 전력 질주하는 달리기가 아닌 오래 달리기인데도) 이게 왜 이렇게 즐거운가, 여전히 의심을 거두지 못하고 별 생각을 다 해본다.





두 번째 오프라인 마라톤은 8월의 마지막 날 '단양달빛레이스'였다. 10km를 신청했다가 경로상 13km로 변경한다는 연락을 받은 후 5km로 바꾸었다. 살짝 쉬워진 마라톤 대신 여행에 힘을 주기로 하고, 2박3일 가족여행으로 계획을 잡았다.


아침을 먹자마자 수영장에 가서 오후까지 있다가, 사우나에서 세 딸들의 묵은 때를 밀어주고(힘을 너무 빼서 마라톤 못 하는 줄...), 점저를 먹은 후 단양생태체육공원으로 갔다.


815런 때에는 기념품인 까만 상의를 입고 월드컵공원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개미가 떠올랐는데, 이번엔 보자마자 반딧불이들 같아서 웃음이 나왔다. 자, 형광 윗도리를 입은 나도 저기에 끼어볼까!


단양마라톤은 작년에 이어 2회차라는데, 지역에서 공을 들이는 게 느껴졌다. 규모가 엄청 크거나 구석구석 세련된 행사는 아니었지만, 아담하고 친근하고 충분히 풍성했다. 뽐내지 않지만 알수록 알찬 단양 같았다.


짧고 굵고 소박하게 개회식을 하고(단양군의 정치/체육계에서 직위를 가진 분들은 다 오셔서 인사하심), 경품 추첨을 했다. 더 짧고 굵고 소박하게 준비운동을 한 뒤 13km 출발. 그리고 (단양군 정치/체육계 높으신 모든 분들의 "화이팅!" 응원을 줄줄이 받으며 시간을 보내다) 10분 뒤 5km 출발.


어스름이 내려오고 있었고, 바람은 산산했다. 산은 가까이, 강은 바로 옆이었다. 2천 명이 안 되는 참가자들과 비교적 넓은 주로. 달리기 딱 좋다, 또 웃음이 나왔다.





달리기 관련 책을 읽으면 거의 빠짐없이, 러닝은 자기 페이스대로 가는 것이며 나이나 겉보기 불문 나를 제치는 러너에게 경쟁심 따위 품을 필요가 없다는 이야기가 나온다. 뻔하다 싶을 만큼 당연한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여럿이 함께 달리면 분위기에 휩쓸려 혼자 달릴 때보다 오버페이스 하는 경우가 많은 것도, 예상 가능한 전개였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4개월밖에 되지 않은 나는 그럴 계제도 아니었다. 자칫 오버페이스를 했다간 완주 자체를 못 할 수도 있으니까. 기록 단축이나 수상이 목표일 리도 없었다.

 

그런데 역시 주로에 있으니 근처의 러너들에게 영향을 받았다. 그러니까, 이상하게 나보다 훨씬 빠른 사람, 나를 확 제치고 가는 사람은 상관없는데, 내 바로 앞/뒤/옆에 있는 사람은 신경이 쓰였다.


그러고 보니 운전할 때도 그렇다. 나를 쌩 지나치는 차는 '왜 저렇게 빨리 가시나...' 하고 무심히 넘기고, 너무 느리게 가는 차는 '실례' 이러면서 지나가고 말지만, 조금 앞에 있는 차는 추월하고 싶고, 뒤에 있던 차가 내 앞으로 와서 계속 보이면 다시 앞서고 싶어진다. 바로 옆에서 나란히 가는 차에게는 왠지 지고 싶지 않아서 속도를 내다 보면, 우연인지 아닌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는 상황도 벌어진다.


인생에 대해 또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었다. 계급, 재산, 외모, 성적, 학벌, 지역, 나이, 그게 무엇이든 나와 저 멀리 떨어진 사람에겐 별다른 감정이 안 생기는데, 바로 옆, 바로 앞, 바로 뒤에 있는 사람에겐 과하게 신경을 쓰고 마음을 다친다.


뭐 그런 생각을 하면서, 흔들리지 않으려고 내 페이스와 비슷하면서 안정된 페이스로 달리는 듯한, 눈에 띄는 복장을 한 사람을 찍어서 나만의 페이스 메이커로 삼고 달렸다. 그런데 그분이 사실은 내 페이스보다 빨랐던 것이다. 달리다 보니 조금 벅차서 깨달았지만, 5km니까 조금 무리해도 어찌 됐든 완주하겠지 싶어 그대로 달렸다. (이 또한 자기를 조금이라도 과대 평가하고, 비교군을 살짝 높게 잡는 어쩔 수 없는 습성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가...)  


심지어 그분이 3km 지점에서 물을 마시기 위해 급수대로 가자, "나는 안 마셔도 돼!" 이러면서 추월하고는 쾌감을 느꼈다. 재역전 당할까 봐 남몰래 노심초사하며 금세 다른 (역시 나보다 조금 빠른 듯한) 사람을 페이스 메이커로 임명했다.


그 결과, 결승선이 다가오는데도 속도를 높일 수 없었다. 막판에 남겨둔 힘으로 전력 질주하며 앞사람을 제치는 게 소소하고도 사소하기 그지없는 기쁨인데, 이미 최대 심박수를 찍으며 숨을 몰아쉬느라 제발 뛰어서 도착할 수 있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815런 때처럼 결승선에서 목을 빼고 나를 기다리고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며 (걷지 않고 무사히) 결승선을 통과했건만, 나를 응원하는 소리도, 나를 주시하는 눈길도, 나를 향해 찰칵대는 카메라도 없었다. 숨이 찬 와중에 어둠을 헤치고 주위를 살피니 남편과 아이들이 한쪽에 모여 멍하니 서 있었다. 아이 이름을 소리쳐 부르자 나를 보고 다들 눈이 똥그래져서는 놀라는 것이었다. "오잉?! 벌써 왔어??"





완주 메달과 주최측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먹거리들을 줄줄이 받았다. 잔디 위에 철푸덕 앉아 치킨과 맥주와 슬러시와 떡과 오뎅을 먹었다. 주자뿐 아니라 가족들에게도 후하게 나눠줘서 너끈히 한 끼가 되었다. 둘러보니 돗자리를 가지고 온 사람들이 많았다. 무대에선 공연이 펼쳐지고 있고, 먹을 것도 넉넉하고, 달리고 온 사람들의 활기가 흐르고, 시끌벅적 이야기와 웃음소리가 이어지고... 여름밤의 소풍이었다.


이렇게 8월의 마지막 날을, 2024년의 여름을 보내는구나 싶었다. 날씨도 시원하고 오랜만의 폭주도 개운한, 괜찮은 하루였다.




요약

마라톤 경기에서는 분위기에 휩쓸려 자기 페이스를 놓치기 십상이다.

그러다 개인 기록을 경신하는 일도 생긴다.

(기록이야 어찌 됐든,) 지역의 이름을 걸고 하는 마라톤 경기는 지역 축제 혹은 소풍의 정취를 느낄 수 있어 좋다.


내년에도 올까, 연례행사로 만들까 생각 중이다.


귀에 걸린 산(..?). 산과 강을 끼고 쭉 달리는데, 중간에 번화가도 지난다. 달리기 좋았던 길.


한 달의 절반쯤 달렸다. 달리기 좋을 9월엔, 과연?




8월의 달리기 총정리

산 것: 없음. (오?)

부상: 없음. (오! 오히려 무릎이 거의 안 아프다. 무릎보호대를 한 번도 안 했다. 기타를 처음 치면 손가락에 물집이 생기고 아프지만 계속 치면 굳은살 때문에 괜찮아지는 것처럼, 무릎이 점점 단단해지는 것 같다.)

몸의 변화: 몸무게 -0.4kg?(하루 중 언제 재보느냐에 따라 왔다갔다 하는 무게지만, 어느 때에 재더라도 평균적으로 이만큼은 줄었다. 달리기 전에 비하면 대충 1kg쯤 감량...) 숫자보다 부피의 변화가 좀 더 느껴진다.

일상의 변화: 더위를 덜 타지 않았나 싶다. 땀을 흘려서인지 마음의 준비를 해서인지, 달리면서 느끼는 더위는 왠지 좀 더 참을 만하다. 그리고 평상시에는, '내가 이 날씨에 달리기도 하는데, 뭐...' 하는 호방함이 생긴다. (워낙 더위에 강한 편이고, 물론 에어컨 덕분일 수도 있다.) 아이들도 달리기를 하고 싶어한다. 첫째는 가볍게 시도하기도.

읽은 책: <조깅의 기초> (나온 지 50년이 넘은 책이지만, 미국에 조깅 열풍을 일으킨 책답게 고전미가 있다. 가장 기본을 배우는 느낌. 짧다.)

총평: 달리기를 향해 달려가는 마음이 조금 진정되었다. (벌써?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행이기도 하고.) 어쨌거나 달리러 나갈 때 덜 비장하고, 그만큼 일상이 되었다는 의미라 뿌듯하기도 하다.



+) 참고가 되었던 영상


무릎에 대한 걱정 결정판

https://youtu.be/I_xeS1r_yXQ?si=_da66fxpPuyQxEk5




이전 17화 17주. 시소는 고장난 건가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