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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보고 싶어_퍼플런_11K

흥분과 착오로 비롯됐지만,

by 모도 헤도헨

좋은 사람이 되고픈 로망이 있다. 어떤 사람이 좋은 사람이냐? 그에 대해 알아가는 건 은근 재미있다. 본능과 처지에도 불구하고 깨달은 대로 살아가는 건 아무래도 어렵다. 이 괴리에 사로잡히면 고달프고 슬프다. 인생은 기본적으로 실패가 전제인 것만 같다.


그러니 오히려 뭐든 저질러 본다. (한강 작가처럼 노벨문학상을 타겠다는 심보로 글을 쓸 때보다, 심너울 작가처럼 '오늘은 또 무슨 헛소리를 써볼까' 하고 끄적거릴 때, 일단 훨씬 편안하고 행복하다. 산출물은 함부로 달라지지 않지만,) 어차피 잘될 리가 없다니까?


누구나 그렇겠지만, 나도 대체로 스스로에게 자신 있는 일과 못 미더운 일이 있다. 나는 쉽게 흥분하지만, 계산은 꽤 정확한 사람이다. 그런데 어쩌자고 흥분도 하고 계산도 틀렸을까?


한 달 전쯤 영화 <어른 김장하>를 보고, 연이어 션이 새해를 맞아 한 달 동안 매일 달리고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에 2025만원을 기부하는 영상을 봤다. 김장하 선생님은 "돈이라는 게 똥 하고 똑같아서 모아놓으면 악취가 진동을 하는데, 밭에 골고루 뿌려놓으면 좋은 거름이 된다."는 생각대로 사셨고, 션은 지금까지 그랬듯이 어떻게든 이유를 만들어 기부를 하고는 해맑게 웃었다.


나는 마음이 일렁이고 머리가 팽팽 돌았다. 내가 언제까지나 그럴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이번 해에는 돈을 거름처럼 써보겠어! 달리기도 좋고 마라톤대회에 나가는 것도 재미있지만 마냥 즐겨지진 않았는데(대세에 끼어 있으면 의심병이 동함), 대회에 나갈 때마다 기부를 하면 일석이조겠는데?


나는 내가 소득 없는 피부양자라는 사실을 간과하고는, (나름 합리적으로 2025만원에서 공 하나 빼서) 2025천원을 기부하기 위해 2025년 한 해 동안 마라톤대회에 10번 나가고, 나갈 때마다 10만원씩 적립하면 되겠다고 계산 실수를 해버렸다.


하루쯤 지나 흥분이 가라앉고 정신이 퍼뜩 들었다. 10만원이 아니고 20만원이네? 내 주제를 파악하자면 공을 두 개 빼서 2만원씩 해야 맞는데? 돈이 모여 악취가 나기는커녕 모으느라 똥을 싸겠는데? 황영조 선생님은 '아마추어 러너라면 일상에 에너지를 주는 달리기를 해야지 일상에서 에너지를 끌어다 쓰는 달리기를 하면 안 된다'고 옳은 소리를 하셨는데, 아마추어 러너 중에서도 새싹과 같은 나는 에너지에 돈까지 끌어다 쓸 판이네?


나는 잠깐 울 것 같은 얼굴로 한 마리 타조가 되어 이불 속에 머리를 파묻었다. 혼자 다짐한 게 아니라, 스스로 기특하고 너무 아름다운 계획이라 공표까지 해버린 마당이었다(<달리기의 겨울> 10화 '좋은 거 옆에 더 좋은 거').


제대로 본 사람도 얼마 없을 텐데 슬쩍 고치라고, 나의 정신머리가 말을 건넸다. 그 말을 냉큼 받아야 맞는데... 나는 이상하게 하고 싶었다. 단지 물리고 싶지 않은 게 아니라, 그냥 해보고 싶었다.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 내가 돈을 벌 수도 있잖아. 내 용돈과 모은 돈을 여기에 우선순위로 써도 되잖아. 앞으로 계속 그러진 못해도 한 해는 그래볼 수 있잖아. 이렇게 우습고도 엉뚱하게 기부하게 됐지만, 푸르메재단 넥슨어린이재활병원을 통해 어떤 어린이는 필연 같은 기적처럼 못할 뻔한 일을 하게 될 수 있잖아.


뭐, 물론 이 모든 일은 '그럴 수도' 있는 거지만, 나는 내 얼마 안 되는 돈과 아마추어 러너의 에너지와 실패라는 디폴트에도 불구하고 소중해 죽겠는 내 인생을, 그 개연성에 걸기로 했다. 의도가 좋다고 산출물이 함부로 달라지진 않겠지만, 내가 얼마나 재미있고 행복할까를 생각하면 이 내기가 손해는 아니라고, 덜 미더워진 계산 실력으로 셈을 해본다.




첫 번째 마라톤은 3.8 세계여성의날 기념 마라톤 '퍼플런'. 비대면으로 참가하고 인증사진을 보냈다. 3.8km, 7.6(3.8+3.8)km, 11(3+8)km, 24(3*8)km, 38km 등 세계여성의날과 관련 있는 숫자만큼의 거리로 달리라고 했는데, 나는 11km 참가. (거리는 3.8km 이상이면 다 되는 걸로 바뀌었다.) 긴 겨울을 지나 오랜만에 이만큼 달리고 아주 상쾌하고 뿌듯했으나, 아직도 삭신이 쑤시는 중... 어쨌든 멋진 말이다. 대담하게 달려!



엉뚱한 생각이고 결과가 확실하지 않아도, 해보고 싶은 걸 해볼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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