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정심은 지니기로.
예상은 빗나가고 계획은 틀어지게 마련이다. 이 이치를 순순히 받아들여도 여전히 힘들다. 예상과 다르게 펼쳐지는 상황은 일단 어색하고, 뭔가 잘못되었고 웬만하면 잘못될 거라는 의혹이 뒷덜미를 잡는다. 쓸모 없어진 계획은 아쉽기만 하고, 새로운 계획을 다시 짜려니 시간과 준비가 부족하다.
머리가 혼미해지고 마음이 조급해져서, 운명이든 우주든 내 편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에 사로잡힌다. 나는 원래 한낱 먼지가 아니었던가? 뭘 해보겠다고 한 거지? 그렇게 주눅이 들어버린다.
3월이면 봄, 날도 풀리고 몸도 풀리겠지. 개학하면, 아이들은 학교 가고 나는 달리기 훈련을 체계적으로 할 수 있겠지. 겨울 동안 겨우 이어갔던 달리기를 차근차근 끌어올리면, 3월 하순쯤엔 다시 하프를 뛸 수 있겠지. 나는 그렇게 예상하고, 3월 22일 하프코스 마라톤을 신청했었다.
그런데 '아이들이 학교에 가면 할 일'들이 달리기 말고도 많았다. 모처럼 맞이한 혼자만의 시간은 초콜릿처럼 '달구나, 달아!' 하는 중에 사라졌다. 게다가 징검다리처럼 넣은 3월 8일 퍼플런 11킬로미터 마라톤은 도움닫기의 구름판이 아니라 수렁이 되었다. 오랜만에 장거리를 달린 후, 삭신이 쑤시고 특히 무릎이 다시 아파졌다.
10개월 전 처음 달리기를 시작하고 무릎 때문에 고생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한번 부상을 당하면 고질병이 되는 건가? 쉬어야 나아질 텐데, 그럼 연습은 어떻게 하지? 나는 달리지도 못하고 가만히 있지도 못하고 발만 동동 굴렀다.
시간은 남의 속도 모르고 제 갈 길을 가고, 나는 날을 세면서 이때쯤 이만큼 했어야 하는데 안달복달했다.
그러니까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게 왜 이런 걸 한다고 해가지고... 조용히 혼자 달릴 것이지 왜 일을 만들었을까... 좀 적당히 목표를 잡으면 될 것을 욕심을 부려서는...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달리는 건가... 야야, 다 때려치우자...
아무리 따져봐도 이번에 하프를 뛰는 건 버거웠다. 그러니까 도전적으로 하프코스를 신청한 것부터, 원대하게 2025년 마라톤 프로젝트를 기획한 것, 아니 애초에 달리기를 시작한 것까지 다 어리석은 헛짓거리 같은 것이었다.
저기, 잠깐.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생각한 건데? 말짱한 정신과 순수한 마음으로 결심한 건데? (물론 계산 착오와 흥분이 깃들어 있었지만...) 내가 좋아서, 내가 더 행복하려고 시작한 건데?
내 맘대로 굴러가지 않아서, 아무래도 현실이 만만찮아서 자꾸만 움츠러들고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진정시키느라 또 한 번 정신이 혼미해졌다. 왜냐면 이 싸움은 모두 내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이라 모순과 자가당착의 낌새가 있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나는 그만두지 않기로 했고, 그렇다면 할 수 있는 일은 해야 했다. 계획을 바꿔서 조금씩 달리고 더 많이 쉬었다. 다리를 마사지 하고 소염제를 발랐다. 잠을 많이 자고 일상에 빈틈을 마련했다. 머리가 맑아지고 마음이 고요해지길 바랐다. 연습하는 것으로 자신감을 갖춰놓을 수 없어서 아쉬웠지만, 평정심은 지니기로 했다.
무엇보다, 결과는 정말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다리에 쥐가 나거나 무릎이 너무 아파서 완주하지 못할 수도 있겠고, 천천히 달리다가 혹은 중간에 걷다가 제한시간을 넘겨 실격당할 수도 있다. 그것은 정말 그때 가서의 일이고, 괜찮을지 말지 역시 그때에 맡기기로 했다. 그다음도 마찬가지.
그리하여... 그날은 왔고, 한편으론 시시하고 한편으론 벅차게도, 무사히 완주했다. 늘 그랬듯이, 달리는 동안 죽을 것만 같고 두 시간을 이러고 달리는 일이 명백하게 미친 짓 같았다가, 피니시라인을 통과하는 순간, 세상이 내 것 같고 그 모든 힘듦은 아름다운 색채로 구석구석 칠해져서 '하지 않았으면 어쩔 뻔?'으로 불가역적이고 최종적인 이름표를 달고 기억 속에 저장됐다.
집에서 비교적 가까워서 신청한 대회. 바다나 강에 비할 바 아니어도 탄천을 따라 달리는 것도 좋겠다 싶었는데, 그런 감성은 별로 없는 주로였다(3차 반환점까지 있어서 왔다리 갔다리). 언덕배기 하나 없는 평탄한 길인 것은 나로선 고맙긴 했다. 또, 다른 대회에선 '급수대가 너무 자주 있는 거 아녀?' 했었는데, 길에 선 안전요원들을 붙들고 '그, 급수대가 나, 나오긴 할까요..?' 묻고 싶은 순간이 많았다(날씨 혹은 내 상태의 문제였을지도). 근처에 친구가 살아서, 주차도 하고 화장실도 들르고 완주 후 목욕도 하고 놀기까지 했다. 어딜 가도 달리기가 더해지면 특별해진다.
+) 이 탄핵 정국에 대해서도 같은 주문을 외고 있다. 주눅들지 말자. 너무 혼란스럽고 복장이 터지지만…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하면서 마음을 지키자고. 결전의 때에 제정신으로 있어야 한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