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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간의 최선_경주벚꽃마라톤_하프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는 생각만이

by 모도 헤도헨

오랜만의 가족마라톤,이라고 하기엔 두 번째다. 작년 11월에 하고 5개월 만. 아이들은 그럭저럭 기대했다,고 하기엔 둘째가 좀 툴툴댔다. "나는 하겠다고 한 적 없어!" 그건 그렇다. 지난번에 결국 아름다운 마무리였기 때문에 내 맘대로 신청했다. (<주간 달려요정> 28주. 되는 게 이상한)


지난 금요일 오후 하교한 아이들과 함께 경주로 출발, 늦게까지 문 연 식당을 찾아 겨우 저녁을 먹고 숙소에 도착한 게 밤 11시. 한 달 전에 어렵사리 예약한 숙소는 아이들에게 집을 생각나게 했다. 자정쯤, 왠지 으스스하고 청결이 미심쩍은 집의 바닥이 배기는 요 위에 누워, 내일 아침 6시에 일어나야 한다는 말까지 들은 12세 둘째는 결국 흐느꼈다.


진짜 극기훈련 같다고 남편은 속엣말을 내뱉으며 웃고, 나는 엄마 어렸을 때는 걸스카우트라는 게 있었는데(아직도 있다) 거기서는 일부러 이런 불편한 곳에서 잠을 자고 어려운 체험을 한다더라고 했다가 눈물을 키웠다. "싫어, 난 싫다고...! 도대체 마라톤을 왜 해야 하는데...? 엄마가 재미있으면 엄마 혼자 하지... 엉엉"


다섯이 쪼로록 누운 밤. 진정시키느라 이래저래 애쓰다 자장가를 불러주던 밤. 훌쩍이던 소리가 쌔근쌔근 소리로 바뀌어 가만히 한숨이 내려앉던 밤. 이런 날들이 추억이 되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던 밤.


6시, 알람이 울렸다. 도대체, 왜, 이런 먼 곳까지 와서, 새벽같이 일어나, 달리기를, 굳이 하느냐고, 나 역시 스스로에게 여러 번 묻다가 몸을 일으켰다. 곧이어 피곤과 떨떠름한 기색을 주렁주렁 달고 일어난 남편도 아이들을 깨우면서 말했다. "얘들아, 숙제 빨리 끝내고 놀자!"


벚꽃은 만개했으나 비구름이 잔뜩 낀 흐린 날씨. 우린 몸도 마음도 살짝씩 떨면서 대회 장소로 갔다. 하프코스 출발이 임박해서 5킬로미터를 달리는 남편과 아이들에게 별다른 의식도 없이, 거창한 인사도 못하고 헤어졌다.


이런 상황이니 개인기록이라도 경신해야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2주 전엔 너무 오랜만에, 연습도 못하고, 무릎도 시원찮은 상태로 하프를 뛰려니 조심스럽기만 했다. '부상 없이 완주하자'에서 '시간 내에만 들어오자'였다가, 나중엔 '완주 못해도 되지, 뭐' 그런 마음으로 달렸는데, 어찌어찌 생각보다 잘 뛰었다. '그러니 이번엔 2시간 안에 들어와볼까...?' 욕심이 났다. 기록이라도 좋게 나오면 뭐랄까, 본전 생각을 덜 할 것 같았다.


나는 열심히 달렸다. 평소에는 그냥 편안하게 뛰지만, 이건 경기니까, 돈을 내고 참여했으니까, 좀 더 긴장하고 애를 쓰는 게 당연하지. 그만큼 결과도 좋게 나오고. 그 결과를 어디에 쓸 일도 없고, 그럴 것도 아니면서, 그냥 그리했다. 아이들과 남편의 얼굴이 왔다갔다하고, 숙제며 극기훈련이란 말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1식 더디게 더해지는 표지판을 애타게 찾다가 지나면서 야속해했다. 왜 이런 짓을 하고 있는 건지 우스워하고 한심해하고 자책하고 괴로워하고 의아해하느라 정말 많은 시간을 보냈는데도 아직도 갈 길이 남아 있었다. 힘들어서 두어 번쯤 걷기도 했다. 그러긴 처음이었는데, '절대로 걷지는 말자'는 생각 때문이라기보다 오히려 페이스를 잃어버릴까 싶어서였다. 페이스고 뭐고, 기록이고 뭐고, 헉헉... 살살 하자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막판엔 결승선에 이미 도착해서 나를 기다리고 있을 남편과 아이들을 떠올리며 힘을 냈다.


결승선엔 가족들이 없었다. 어랏? 물을 받아 마시고, 남편에게 톡을 보냈다. 메달과 간식을 받으러 가는 길에 가족들을 만났다. 발그레한 볼에, 느긋하고 흡족해진 표정들이었다. 잔치국수를 세 그릇씩 먹었다면서, 너무 맛있었다면서... 엄마는 언제 들어왔냐면서... (그 와중에 둘째는 기록 자랑...)


이번 해에 두 번쯤 더 가족마라톤을 뛸 계획이다. (벌써 신청함, 숙소도 예약함.) 나는 그때에도 뭐라고 이유를 댈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니, 뭐라고 이유를 갖다 붙이겠지만(걸스카우트는 말자), 정말로 나도 잘 모르겠다. 아이들에게뿐 아니라, 나 스스로에게도 '대체 왜, 정확히 무엇 때문에, 구체적으로 어떤 걸 바라고' 이런 일들을 삶에 애써 새겨 넣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서 속상하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잔치국수를 한두 그릇씩 더 먹고 숙소로 돌아왔다. 씻고 늘어져 있다가 어렵사리 늦은 점심을 먹었다(어딜 가나 사람이 북적북적). 결국 비가 왔고, 핫초코를 맛있게 한다는 카페를 찾아갔다. 마피아게임을 했다가, '아무도 못 맞출 퀴즈 내기'를 했다가, 그림을 그리고 색칠공부를 했다가, 팩을 사서 돌아왔다.


저녁으로 컵라면을 먹고, 과자를 먹으며 티비를 보고, 오밤중 공기대회를 열었다. 팩을 하나씩 붙이고 서로의 웃기는 얼굴에 깔깔대며 사진 찍고 누울 때쯤엔, 이 집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다는 둥, 내일 하루 더 있자는 둥 애먼 소리가 둥둥 떠다녔다. 졸며 부른 자장가에 아이들은 금방 잠이 들었고, 쌔근쌔근 소리에 나는 왠지 정신이 들었다.


어떤 집을 짓고, 어떤 정원을 가꾸는지, 어떤 그림을 그리고, 어떤 글을 쓰는지 명확히 아는 채로 최대로 효율적으로 임해서 성과를 내고 싶다. 일은 그렇게 해야 맞지 않나. 그런 생각을 할 때면, 내가 지금 설계도도, 로드맵도 없이 살고 있고, 열심을 낼 곳을 찾지 못해 헛일을 하며 허망하게 세월을 보내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시작도 끝도 내 소관이 아니고, 정답이나 규칙은 내용은커녕 존재 유무조차 어림짐작일 뿐인 인생에서는 언제나 '이런 날도 있고, 저런 날도 있다'는 생각만이 다음으로 넘어가게 해준다. 뭐가 좋을지 몰라서 다 해보는 거다, 그 순간만은 아깝지 않게 최선을 다해서.


(그래도 기록 욕심은 다시는 내지 않기로. 편안하게 달려 얻는 심신의 이익이 기록 손실을 압도할 정도로 크다!)



내가 지금까지 참가했던 대회 중 가장 규모가 컸다. 행사 진행도 매끄러웠고, 무엇보다 곳곳의 사물놀이패의 흥이 넘치는 소리가 굉장히 도움이 되었다. 자원봉사자들, 지나가는 시민(혹은 관광객)의 열정적인 응원도 인상적이었다. 하지만 그만큼 어딜 가나 사람과 차들이 많아서 치이기도 했다. 안 그래도 관광지인데 벚꽃 피는 계절에 마라톤 참가자들까지! 경주의 벚꽃 구경은 이번 생에 족한 것 같다.



최선을 다하는 것의 소용이 보이지 않는 순간에도 행복할 수 있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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