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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금해서 간다_서울YMCA마라톤_하프

인생이 조금은 봄의 빛깔 같다고 취해서

by 모도 헤도헨

마라톤 프로젝트가 내 삶과 묘하게 동기화된다. 열 개의 계획 중 네 번째. 마흔 살의 인생 같다. 이쯤이면 익숙해지는 건 물론이고, 나름 능숙해져서 성취로든 미학적으로든 다른 국면에 가 있을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여전히 예상치 못한 전개에 쉽지 않은 상황에 맞닥뜨린다.


서울YMCA마라톤은 신청할 때부터 망설였다. 경주까지 가서 하프를 뛰고 일주일 만에? 달리기 인생 돌도 안 된, 실제 나이 40대에겐 무리가 분명했다. 그런데 코스가 좋았다. 30년 서울 (변두리에 산) 사람이었지만, 어떻게 된 공간지각력인지, 내 머릿속 서울은 지하철 노선도로 그려져 있다. 광화문에서 시작해서 동대문을 찍고 오는, 평소에는 사람도 차도 가득해 엄두 못 낼 거리를 달려보고 싶었다. 비슷한 코스의 유명 마라톤대회는 신청조차 어려우니, 내게는 귀한 기회였다. 그렇게 서울 한복판을 달리고 나면, 그제야 편지만 주고받다가 얼굴과 얼굴을 마주하여 보는 것 같은, 그런 진짜 만남을 서울이랑 갖게 될 기분이었달까.


기어이 나는 신청했고, 경주에 다녀와서 정성껏 쉬었다. 쉬다가 몸이 퍼져버릴까 봐, 수요일과 금요일에 12킬로씩 뛰었다. 토요일엔 일정을 아예 비워두었다. 몸과 마음을 편하게 하고 일요일에 가기만 하면 돼, 좋아, 할 만하겠어.


그런데... 역동적인 봄 날씨가 문제였다. 며칠 전부터 줄곧 주말엔 비 소식이었다. 비만 오는 게 아니라 돌풍에, 갑자기 추워지는. 하루에도 몇 번씩 변덕을 바라며 예보를 확인했는데, 한결같았다. 지랄 맞은 봄 같으니.


그래, 그럴 수 있지! 그래봤자 봄인데 한겨울만큼 춥겠어? 우중런, 하면 또 러닝의 참맛 아니겠어? 낙관의 공장을 팽팽 돌리며 마음을 다 잡는데, 아무래도 생리가 걸렸다. 대충 걸리겠는데 싶더니, 결국 딱 둘째 날이었다. 비가... 어느 정도 오려나... 몸이 무겁고 불편한 건 둘째 치고, 비를 쫄딱 맞으며 달리는 게... 사회 통념상 허용 가능한 형상인가... 상상하려다 관뒀다.


할 수 있는 건 없고, 봄은 난리였다. 금요일, 아침엔 분홍, 연두, 노랑으로 눈 호강하면서 호수를 한 바퀴 돌고, 낮엔 친구를 만나 봄볕을 맞으며 카페테라스에서 책 읽기를 했다. 저녁엔 다른 친구들과 행주를 만든다고 바느질 수다를 떨다가 사람 반 벚꽃 반인 서울대공원에서 밤 산책을 했다. 막차를 타고 돌아와 잠자리에 뻗으면서, 봄기운으로 충만하게 잘 논 것도 오랜만이지만 피곤해 죽겠네, 고롱고롱했다. 내일은 뒹굴면서 충전해야지, 다짐의 문장이 끝나기도 전에 (나로선 별스럽게도) 잠이 들었다.


그리고 아직 그 문장 안에 정신이 잠겨 있을 때, 벨이 울렸다. 두 번, 세 번. 그리고 탕탕, 현관문을 두드리는 소리로 이어졌다. 새벽에 둘째와 자리를 바꾼 남편도 아직 자는 모양이었다. 거실에서 놀던 아이들이 영문을 모르는 소리를 내며 움직이려 할 때, 겨우 몸을 일으켜 안방을 나섰다. 나처럼 떴다고 할 수 없는 눈을 비비며 남편도 건넌방에서 나오고 있었다.


"저기요, 아랫집이에요."


아니, 대충 인터폰으로 박대하고 보낼 작정이었는데 아랫집이라니? 우리의 영원한 갑께서 토요일 아침에? 남편과 나는 누가 덜 흉물스러운가, 떴다고 할 수 없는 눈으로 서로를 기민하게 훑었다. 남편이 현관문을 열었고, 나는 눈곱을 떼고 머리를 매만졌다.


"저기요, 물이 새요."

"...네?"

"건넌방 벽에서..."


물이라니. 물이 샌다니. 우리 집에서 시작된 누수면 이게 어떻게 되는 거야... (윗집이든 아랫집이든 누수가 얼마나 큰 문제 혹은 스트레스가 될 수 있는지 직간접 경험이 있다.) 관리실은 아무리 해도 전화를 안 받아서 돌연 대동된 경비아저씨는 아랫집 아주머니가 설명을 끝내기도 전에 후레시를 들이밀며 집으로 들어왔다. 이어서 아랫집 아주머니도, 밤새 천장에서 물이 똑똑 떨어지고 벽이 젖고 바닥까지 흥건해져서 덜덜 떨었다며 가만가만 주방으로. 봉두난발을 한 채 나 역시 봉변을 당하는 기분이었다. 내 몰골과 비슷한 집구석을 가릴 수 없어 마른세수를 하는 척 두 손으로 얼굴을 묻었다.


그렇게 자다가 봉창 두드리듯 시작한 하루는, 결국 잔치 중 술에 취한 채 불려나온 관리실 직원이 누수 원인으로 짐작되는 현장(우리 집 싱크대 하부 수도관)을 발견하고, 남편이 아랫집으로 내려가 사태의 심각성을 확인하고, 당장 주방으로 연결되는 수도를 잠그겠다는 관리실 직원의 말에 아랫집의 입장도 입장이지만 주방의 물 없이 애 셋을 데리고 다섯 식구가 주말(혹은 그 이상)을 어떻게 보낼지 머리가 하얘져서 토요일 저녁에(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다) 출장할 수 있는 배관공을 부랴부랴 찾아, 공사를 하고, 뒷정리를 하고, (와중에 남편이랑 티격태격도 하고,) 그사이 이 갑작스런 지출을 커버해줄 보험이 있는지 없는지 확인하고, 아랫집에 가서 사진을 찍으며 나는 '누수 원인을 찾아 고쳤으며 도배는 넉넉히 한 달 후에 하는 게 좋다더라'는, 아랫집 주인은 '바로 그 순간부터 물이 더 이상 안 흘렀고 도배는 천천히 해도 전혀 신경 쓰이지 않는다'는 각자의 만족스러운 소식을 훈훈하게 전하며 마무리되어가고 있었다.


종일 밖은 우중충했다. 비바람까지 몰아치면서 봄의 절정도 봉변을 당하는 게 느껴졌다. 나는 늘어지게 쉬면서 몸에 에너지가 차오르면 내일 마라톤에 대해 좀 더 합리적인 결정을 내릴 수 있겠지, 하고 느긋했었다. 하지만 정신없이 몰아치던 일들은, 내일의 마라톤은커녕 그에 대한 고민을 하는 것조차 철없는 여자의 태평한 유흥에 지나지 않는다고 비아냥거리는 것 같았다.


일이 더 크게 번지지 않아 참 다행이지만, 김은 샐 대로 새서, 인생이 조금은 봄의 빛깔 같다고 취해서 되는 대로 싹을 틔우며 불쑥거렸던 내가 한심해 죽을 지경이었다. 역시 이만큼 나이를 먹었어도 어른은 글렀고(대체 어른이 뭐란 말인가, 대관절 어찌해야 어른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뿐 아니라 마흔이 넘어서도 삶이 펼쳐놓는 것들에 익숙지 않아서 조그만 돌부리에도 화들짝 놀라서 할리우드 액션처럼 육갑을 떨며 나자빠지는 꼴이 우습고 싫었다.


그런 생각을 하며 늦은 저녁을 차려내는 중이었다. 딸기를 씻다가 싱크대 하부장에 넣어둔 식초를 꺼내려고 무심코 하부장 문을 활짝 열었다. 바로 전에, 싱크대 수도관 공사를 마치고 뒷정리를 하다가 하부장 문이 망가진 걸 발견했었다. 낡아져가는 집이라 이것저것 온전하지 않은데, 공사한다고 열어둔 문에 충격이 더해졌는지 경첩이 떨어져나간 것이다. 남편이 이리저리 고치려 하다가, 새로 경첩을 달아야겠다며 고대로 살짝 닫아 두었는데...


문은 열리려다 아예 뽑혀서 내 왼쪽 다리에 부딪혀 떨어졌다. 우당탕. 허벅지와 무릎과 발등에 아무렇게나 충격을 가했다. 까지고 붓고 멍이 들었다. 얼씨구?


나는 그 순간 결정했다. 가야겠다. 가야겠어. 실제로 운명에 무슨 신적인 것이 깃들어서 내게 장난을 치는 것도, 말을 거는 것도 아니겠지만, '이래도 갈래? 이래도 네 맘대로 할 거야?' 하고 이죽거리는 것처럼 느껴질 때 나는 언제나 '고!'다. 오히려 가라는 신호로 받아들인다. 얼마나 좋은 것들을 숨겨뒀길래. 그게 완전한 착각일지라도, 하려던 것을 하지 않고 '가지 않은 길'로 남겨두면 상상 속에서 그 좋은 것들은 집을 짓고 하늘을 뚫고 우주에까지 닿고 만다. 나는 그 '좋은 것들'이 궁금해서라도, 아니, 아무것도 아닐지도 모를 그 '좋은 것들'을 평생 궁금해하고 싶지 않아서, 뭔가 혹은 누군가 나를 막는다 싶으면 기를 쓰고 그 길로 간다.


그래서 갔다. 달리는 동안 비는 오지 않았고, 배 번호가 찢기나 싶게 바람이 불었지만 걱정만큼 춥지 않았다. 내내 허름한 건물과 멋대가리 없는 빌딩 사이라 감탄이 나오는 아름다운 경치는 아니었고, 서울 땅 위보다 땅 아래로 더 많이 다닌 서울 사람이었던 내가 떠올려 잠길 만한 추억도 몇 개 없었다. 그래도 나는 왜 그렇게 그 순간이 좋았는지 모르겠다. 은근히 서울을 좋아했었나.


마침내 온 것만도 좋아서, 생각보다 모든 것이 나은 상황인 것도 감사해서, 기분 좋게 달릴 생각만 했다. 힘들지 않게, 언제 끝나나 괴로워하지 않으면서 달리고 싶었다. 부러 애정을 담아 주위를 둘러보고, 말갛게 하늘도 올려다보고, 숨이 차면 좀 천천히 가기도 했다.


역시 할 만했다. 달리는 게 즐거웠다. 기록으로 치면 몇 분 차이도 안 나는데, 조금 빨리 가겠다고 내내 애쓰며 달렸던 두 시간이랑은 완전히 다른 시간이었다. 그러니까 그동안 내가 벅찼다면, 달리기뿐 아니라 삶에서도, 오버페이스를 한 것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보다 살짝 빠르다 싶은 주자를 찾아 나만의 페이스메이커로 두고 그를 의지해 따라가는 것이 레이스에 도움도 되고 내 능력을 끌어올려준다고 생각했는데, 늦어지거나 말거나 나에게 좀 더 집중해서 가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도 했다.


바야흐로, 몸도 그렇지만 마음이 편한 게 제일이라는, 끝나고 나서 남는 것도 탐나지만 순간순간이 즐거운 게 남는 거라는 진리를 깨우치는 중인 명실상부한 40대였던 것이다.



이름 때문인지 서울에서 열렸기 때문인지, 전체적으로 참가자들이 젊은 것 같았다. 궂은 날씨를 뚫고 온 참가자들의 기운이 드러난 건지, 으쌰으쌰 한 분위기도 느껴졌다. '탄소 중립 실천을 위한 친환경 스포츠 대회!'라며 일회용품을 최소화하고(그래서 짐을 맡길 때도 기념품으로 준 리유저블 백을 사용해야 했다), 개인적으로 가져온 물품은 쓰레기로 버리지 못하게 하는 등 몇 가지 캠페인이 있었는데... 어느 정도 효과적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시작했다는 게 어디인가! 주로의 급수대에서 나오는 종이컵과 스펀지들이 이제 내 눈에도 불편하게 보인다, 흠.



대단한 걸 바라서가 아니라, 궁금하니까 가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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