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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나게 쌓은 능력치_여성마라톤_10K

나는 그걸 까먹으며 살고 있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by 모도 헤도헨

결혼 전까지 내가 했던 요리는 계란후라이나 스크램블, 라면류, 떡볶이가 다였다. (떡볶이는 늘 망쳤으니 그냥 뺄까 보다.) 그랬던 내가 결혼을 하고 갑자기 요리욕이 불타올랐는데, 그게 왜 그렇게 된 건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내 주방이 생겨서, 하라는 대로 해보니 그럴 싸한 음식이 된 게 신기해서, 먹거리에 대한 관심이 그때 막 생겨서. 그런 이유를 댈 수도 있겠다.


하여간, 그때 나의 퇴근시간은 7시, 집에 빨리 도착하면 8시, 밥을 안치고 요리책(<누가 해도 참 맛있는 나물이네 밥상>)을 보며 국을 끓이고 반찬을 만들면 빠르면 9시, 늦어지면 10시, 그제야 저녁 식탁이 차려졌다. 정오 전에 점심을 먹고, 서울 동쪽에서 서쪽으로 왔다가 나와 함께 경기 북서쪽으로 긴 퇴근 여정을 마친 남편은 대체로 온화하게 기다렸지만, 어느 날엔 주린 배를 움켜쥐고 "그냥 사먹으면 안 될까..." 묻기도 했다.


음식을 만든다는 게 얼마나 재미있었는지 해야 할 요리들이 줄줄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니 배달은 물론이고 외식도 할 수가 없었다. 신혼 1-2년 동안, 다른 사람과의 약속이 아니면 둘이서는 결혼기념일이나 내 생일 정도에만 식당에 갔던 것 같다.


의/식/주에서 식 쪽으로, 수면욕/성욕/식욕에서 식욕(정확히는 요리욕) 쪽으로 심하게 기울어진 일상을 살면서, 그래서 기우뚱거리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내가 이렇게 익힌 것이 언젠가 도움이 될 거야. 그것은 사실 '바람'이었고 '핑계'였다. 그것을 모르는 바가 아니었지만, 마음이 온통 요리에 가 있던 시절에 나를 다잡는 대신 놓아주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합리적인 바람이고 핑계였달까.


그리고 정말로, 그때 그렇게 즐거워하며 익히길 잘했다고 여기는 날이 왔다. 그때 잠시 착각했던 것처럼 나는 요리에 재능이 있는 것도 감각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세 아이를 키우는 주부로서 날마다 밥을 차려내야 하는 일이 천형처럼 느껴질 때, 그래도 조금은 덜 괴로워하면서 내 일을 해낸다. 그 시절 지지고 볶으며 몸에 깔아둔 것으로. 나는 그걸 까먹으며 살고 있고,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그러니까 1부터 100의 기간 동안, 1부터 100개의 일을 해야 하고, 그걸 할 에너지가 1부터 100만큼 있다고 했을 때, 사실 1 동안 1개의 일을 1의 에너지로 하면 가장 무난할 것이다. 차근차근, 착착착. 그런데 나는 유난히도 그게 잘 안 돼서, 어느 특정 시기에 100에 가까운 에너지를 다 쓰면서 그때 그 기운으로 100개의 일을 다 해버리는 게 좋다.


하지만 어떤 일들은, 주부에게 요리처럼, 어느 시절에 100개만큼 했어도, 남은 기간 동안 매일 그날의 일이 새로 생긴다는 걸 알게 됐다. 에너지는 웬만해선 그렇게 성실하게 채워지지 않는데... 그 대신, 그때 왕창 쓴 에너지가 능력치로 쌓여서, 1개의 일을 하는 데 1보다 적은 에너지로 할 수 있게 됐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손해가 아니라는 말씀.


나는 요즘, 그런 마음으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딱 1년이 되었다. 그사이 나는 하프까지 뛸 수 있는 사람이 되었고, 마라톤대회에는 열 번쯤 참여했다. 지난해, 그러니까 달리기에 입문한 지 반년이 되기까지는 달리기는 마냥 좋았고, 마라톤대회란 그냥 마구 재미있는 이벤트였다.


그런데 겨울이라는 쿨다운의 시기를 지나고 나니(근근이 달리기를 이어가긴 했지만), 사뭇 다른 마음이 되어 있다. 달리기를 평생 계속할 운동으로 정했고 여전히 달리면 좋지만, 이젠 달리기를 생각한다고 콩콩 설레진 않는다. 신청할 마라톤대회를 고를 때에도, 오가는 길이며 숙박시설 등에 내가 써야 할 시간/돈/에너지가 '비용'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2025년 나의 마라톤 프로젝트(이번해에 열 개 마라톤대회에 참가하고 그때마다 20만원씩 적립, 2025천원을 기부)를 마치고 나면, 내년부터는 1년에 한두 개만 참여하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럼 그 이후에 나는 달리기를 할 때나 마라톤대회에 참여할 때, 지금 이렇게 신나지만 과하게 몰아쓴 에너지로 쌓아둔 능력치를 까먹으며 조금은 수월하게 해나갈 것이다. 그렇게 믿어본다.



여성만 참여하는 대회인 줄 알고 골랐는데, 여성신문사에서 주최해서 '여성마라톤'이다. 지금까지 참여했던 대회 중에서 가장 기념품이 빵빵했다(선크림 포함 화장품만 세 가지인데 모두 샘플 아니고 본품). 비도 오고 기온도 확 떨어진다는 예보가 진작부터 있었지만, 날씨에 신경 쓰이는 마음도 겪어봤다고 이번엔 덜 시달렸다. 당일 새벽에도, 가는 길에도 빗줄기가 굵었는데 막상 달릴 때는 보슬비 정도라, 우비나 점퍼 없이 모자 하나로 충분히 커버 가능했고 달리는 동안은 반팔로도 춥지 않았다. 운동화는 푹 젖었다. 10킬로 종목이 실제로 11킬로미터라서, 10킬로 지점에서 넷타임 찍히고 나서 다들 피니시라인까지 1킬로미터를 걸어갔다. (이럴 바엔 그냥 11킬로미터로 종목을 바꿔도 되지 않나?) 경품도 이것저것 많았는데, 끝나고 한 시간 이상 지나서 추첨한다기에 미련 없이 돌아왔다.



재밌는 거 신나게 하자. 그게 언젠가 뭐로든 쓰이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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