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은 바람

아슬아슬하고 간질간질한 나날이었다.

by 모도 헤도헨



*


현우는 발에 양말을 끼워 넣느라 몸을 웅크렸다. 배가 눌리며 끄응 하고 낮은 소리가 나왔다. 질긴 잠이 남은, 잠긴 목소리였다. 양말을 신는 것을 마지막으로 예배 준비를 마친 현우는 그대로 강대상 앞으로 갔다.


열다섯 개의 의자는 모두 비어 있었다. 어두컴컴한 성전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현우는 강대상 한쪽에 있는 종을 땡, 하고 치고는 뒤돌아 십자가 아래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기도를 시작했다.


“천지만물을 지으신 하나님, 오늘도 이 불쌍한 종을 일으키시어 주님 앞에 무릎 꿇게 하시고….”


현우의 기도는 한 시간 동안 이어졌다. 그사이 성전 안에 여명이 잦아들 듯 찾아왔고, 기도를 마친 현우는 잠시 강대상 앞에 서서 성전 안을 둘러보았다. 그렇게 서 있는 동안 저린 무릎이 원상태로 돌아왔다. 기도를 통해 비워진 마음에 벌써 무언가 들어서려 하고 있었다.


“주여….”


현우는 신음 같은 말을 내뱉고 강단에서 내려왔다.




*


강희는 놀이터 정자에 앉아 아이를 지켜보고 있었다. 흐린 하늘 덕분에 날이 뜨겁지 않아서 오랜만에 놀이터에 머물렀다. 그네는 이미 초등학생 여자아이 둘이 차지했다. 그넷줄은 땅과 거의 수평이 되기까지 올랐다가 출렁거리며 내려오기를 반복했고, 그 모습을 다섯 살짜리 딸 지수가 입을 헤벌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강희는 아슬아슬함이 불편하게만 느껴져서, 당장 지수를 데리고 들어가고 싶었다.


“지수야, 이제 그만 들어갈까?”


지수는 엄마의 말을 못 들은 척하는 것으로 싫다는 표현을 확실히 했다. 집에 들어가 봤자 엄마는 집안일을 할 것이고, 할머니는 자기를 모른 척할 것이고, 혼자서 레고나 인형을 가지고 놀 게 뻔했다. 여기에 있으면 꼭 친구는 아니어도 여러 아이들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지수의 바람대로 아이들은 유치원이나 어린이집, 학원에서 돌아오는 길에 놀이터에 들렀다. 지수는 서너 명의 또래들과 미끄럼틀에서 잡기 놀이를 했다. 강희는 지수가 다치지 않는지 살펴보는 것으로 무료함을 달랬다. 깔깔, 까르륵 소리가 강희의 가슴을 간질였다.


웃음을 머금고 고개를 돌리는데 강희의 눈에 한 남자가 들어왔다. 흰머리가 보이는 머리는 이발할 때가 지난 것처럼 길었고, 옷은 무채색이어서 깔끔한지 지저분한지 알 수 없는 차림새였다. 알 듯 말 듯한 웃음을 머금은 채 주머니에 손을 넣고 놀이터 주위를 배회하는 그는 확실히 이질적이었다. 어린이도, 엄마도 아빠도 아닌 어른이었기에, 그리고 남자였기에 강희는 그가 신경 쓰였다.


며칠 전 우편물로 왔던 성폭력 범죄자 고지서가 떠올랐다. 생김새가 어땠더라…. 다시 고개를 돌렸을 때 그 남자는 사라지고 없었다. 놀이터는 이래저래 위험이 도사린 곳이라고 강희는 생각했다.




*


“다녀올게.”


저녁 8시쯤 강희는 남편과 지수에게 인사하고 집을 나섰다. 저녁마다 한 시간씩 공원을 달린 것이 벌써 1년이 넘었다. 너무 춥거나 너무 덥거나 비바람이 치는 등 날씨가 궂으면 쉬었다. 가족 중 누군가 아픈 날에도 쉬었고, 그냥 하기 싫은 날에도 쉬었다. 오늘은 몇 바퀴를 돌겠다고 이를 악물지도 않았다. 걷다가 뛰다가 멈췄다가 빨리 걸었다가 되는 대로 했다. 1년이 넘도록 그런 마음으로 쉬엄쉬엄 달렸다.


문을 나설 때, 강희는 하루 종일 집안일과 돌봄노동에 시달린 자신에게 상을 주는 마음이었다. 누구도 아무것도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유일한 시간이었고, 자연인으로 하늘과 대지를 만나는 시간이었다. 그 가뿐함이 강희에게 어떤 빛을 얹어주었을 것이다.


강희가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공동현관을 나설 때 며칠 전 낮에 놀이터에서 본 남자와 마주쳤다. 강희는 자신도 모르게 ‘어? 어디서 봤더라?’ 하는 표정으로 잠시 멈춰 그를 보았고, 때문에 남자는 가볍게 목례를 하고 강희를 지나쳐 엘리베이터로 갔다.


강희는 공동현관을 나서지 않고 우편물을 살펴보는 척하다가, 엘리베이터가 몇 층에서 멈추는지 보았다. 7층.


‘가까이서 보니 생각보다 젊네. 40대 중반쯤 될까?’


강희는 공원으로 가면서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맨 얼굴과 편안한 차림새를 의식했다.




*


새벽기도를 마친 현우는 성전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한 사람만, 한 사람만이라도 인도할 수 있기를….’


현우는 강단에서 내려와 성전 옆에 딸린 쪽방으로 들어갔다. 때때로 기도와 말씀 묵상이 길어질 때 이곳에 침낭을 깔고 밤을 보냈고, 낮엔 책상과 의자, 책꽂이만 두고 목양실로 썼다. 성경책을 펼쳐 아가서를 읽었다.



나의 사랑하는 자가 내게 말하여 이르기를

나의 사랑, 내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아가 2:10)



현우는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앞으로도 자신의 사랑은 예수님뿐이라고, 자신도 예수님께 사랑 받는 것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겨울도 지나고 비도 그쳤고

지면에는 꽃이 피고 새가 노래할 때가 이르렀는데


비둘기의 소리가 우리 땅에 들리는구나

무화과나무에는 푸른 열매가 익었고

포도나무는 꽃을 피워 향기를 토하는구나

나의 사랑, 나의 어여쁜 자야 일어나서 함께 가자

바위 틈 낭떠러지 은밀한 곳에 있는 나의 비둘기야

내가 네 얼굴을 보게 하라

네 소리를 듣게 하라

네 소리는 부드럽고 네 얼굴은 아름답구나 (아가 2:11-14)



읽을수록 가슴이 뜨거워지고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현우는 이 아름다운 시에 새삼 감격하며 성전을 나섰다.


아침을 먹으러 집으로 향했다. 이사 온 동네에는 아이들이 많았다. 놀이터에서 아이들이 뛰어노는 모습을 보기 위해 걸음걸이를 늦추고 산책하듯 걷곤 했다. 이 시간엔 가방을 메고 학교 가는 아이들, 엄마 손을 잡고 유치원 차를 타러 가는 아이들이 많았다. 아침의 활기찬 분위기가 현우에게 새로운 생기를 더했다.


104동으로 들어서는데 여자와 딸아이가 헐레벌떡 뛰어나오고 있었다. 현우는 서둘러 한쪽으로 피했는데 여자의 어깨에 매달린 유치원 가방이 현우를 살짝 밀쳤다.


“어머, 죄송합니다.”


“아니요, 괜찮습니다.”


여자의 눈썹이 한 번 꿈틀거렸다. 여자는 그대로 멈춰 섰다가,


“엄마, 뛰어야 한다며!”


딸아이의 말에 현우에게 고개를 까딱하고 뛰어갔다. 현우는 여자에게서 나는, 포도나무 꽃향기 같은 것에 잠시 눈을 감았다.




*


강희의 하루는 언제나 크게는 똑같고 작게는 다르다. 남편과 시어머니의 아침상을 차려주고 남편을 출근시키고 딸아이를 깨워 씻고 옷 입는 걸 도와주고 아침을 먹게 한다. 지수를 데리고 나가 아파트 정문 앞에서 유치원 차를 태워 보낸다. 지수를 보내고 나서야 한숨 돌릴 틈이 생기면 라디오를 켠다. 음악을 들으며 세수하고 아침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빨래를 돌리고 청소를 한다. 간간이 시어머니가 내뱉는 주먹질 같은 말에 샌드백이 되어준다. 점심을 준비하고 시어머니와 점심을 먹고 치운다. 지수를 마중할 시간이 된다. 지수를 데리고 오는 길에 놀이터에서 놀다 집에 오면 저녁 준비를 할 시간이다. 남편을 맞이하고 저녁을 먹고 주방 뒷일을 남편에게 맡기고 집을 나와 공원에 간다. 다녀와서 목욕하고 잠자리에 든다.


하루 일과는 늘 똑같고, 반찬거리와 빨랫감과 시어머니의 푸념과 지수의 생떼가 다르다. 강희는 이 똑같음이 숨 막혔고, 이 다름에 질렸다. 하지만 그렇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들키지 않기 위해 열심히 지수를 귀여워하고 어쩔 수 없이 시어머니를 미워하고 적당히 남편과 티격태격했다.


그러다 마치 기다린 것처럼 일상에 균열이 생겼다. 강희는 이제 아침에 지수를 준비시키면서 자신도 씻고 옷을 골라 입고 가볍게 화장을 했다. 지수를 보내고 나서 바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놀이터에 잠깐 있다가 올라갔다.


한동안 지수와 내려오다가 혹은 보내고 돌아오다가 그 남자와 마주쳤다. 안녕하세요, 라고 말할 때 그의 목소리는 바위의 소리 같았다. 흔들림 없이 울렸고 낮고 묵직했다. 그 소리를 처음 들은 날 강희는 무슨 일이 벌어질 것 같은 설렘에 일이 손에 잡히지 않았다. 그런 느낌은 너무도 오랜만이어서 강희는 집안일을 하다가도 잠시 멍하니 있었다. 그 순간을 계속 떠올리면서.


강희는 그가 늘 같은 시간에 들어온다는 것을 안 이후, 하루도 빠짐없이 그를 만났다. 늦게 나오면 처음처럼 그와 지나치며 인사하는 게 다지만, 지수를 시간 맞춰 보내고 오면 엘리베이터를 같이 탈 수 있었다.


처음 같이 엘리베이터를 타는 날 그는 ‘7층’을 누르지 않았다. 강희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11층을 누를 뿐 가만히 있었다. 안녕하세요, 라고 서로 인사한 후 11층까지 올라가는 동안 둘은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강희는 그의 냄새가 목소리처럼 바위 같다고 생각했다. 시원했고 맑았다. 엘리베이터가 7층을 지나치자 그는 당황했다. 얼굴이 빨개져서는 그제야 7층을 눌렀다. 강희는 입술을 깨물며 겨우 웃음을 참았다.


엘리베이터가 11층에서 땡, 하고 열리자 그는 같이 내렸다.


“걸어 내려가려고요.”


그는 강희에게 눈을 맞추고 말했다. 평정심을 되찾은 목소리였다.


“아… 네. 그럼 들어가세요.”


강희는 인사하고 돌아섰다.




*


현우는 기도와 묵상을 마친 후 정확히 8시 38분에 교회를 나섰다. 9시 2분에 놀이터에 닿으면 그녀와 자연스럽게 만나 함께 엘리베이터를 탈 수 있었다.


그녀와 마주친 날, 그녀에게서 나는 포도나무 꽃향기를 처음 맡은 날부터 그녀를 만나면 아가서가 떠올랐고, 아가서를 읽으면 그녀가 떠올랐다. 현우는 그렇게 떠오르는 그녀를 지우려고 고개를 세차게 흔들고, 아가서 대신 다른 성경말씀을 읽었다. 이제 그는 예수님 외에 다른 사람이 떠오르는 아가서를 읽지 못했다.


그는 그녀를 머릿속에서 지우려고 하나님과 씨름하듯 기도했다. 교회 목양실에서 자는 날이 많아졌다. 기도는 자꾸만 끊겼다. 그녀의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기도는 멈춰졌고, 회개하며 다시 이어진 기도는 그녀의 향기가 떠올라 멈춰졌다. 현우는 신께 용서와 함께 도움을 구해야 했다.


“주님, 당신만을 사랑합니다. 당신만을 사랑하기로 당신께 드린 약속을 순결하게 지킬 수 있도록 도와주소서.”


그런 날은 아침을 금식하고 교회에 머물렀다. 간간이 이어지던 금식은 길어졌고, 금식을 마치고 나서도 현우는 아침에 시간을 바꾸어 집에 갔다. 봄으로 시작된 마음이니 보지 않음으로 없어질 수 있으리라 믿었다.


낯설고 아름다운 시험 앞에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자신을 의심해야 했다. 현우는 늦은 나이에 목사가 되기로 했을 때 인간적인 갈망을 모두 내려놓았던 것을 기억하려 했고, 애써 소명을 떠올렸다.


저녁을 먹고 교회로 가려고 집에서 나오는 길이었다. 엘리베이터가 열렸고 그녀가 있었다. 현우만큼이나 놀란 얼굴로 그를 보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현우는 엘리베이터에 타면서 인사했다. 그녀는 입술을 달싹거리기만 해서 목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현우는 몇 주 간의 노력이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1층에서 문이 열리자 그녀는 먼저 나가면서 가볍게 목례를 했다. 그녀는 그가 갈 길로 가고 있었다. 현우는 낮게 숨을 쉬고는 속도를 늦춰 걸었다. 얼마쯤 갔을까, 갑자기 그녀가 보이지 않았고, 현우는 황급히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그녀를 찾았다. 마음이 급해져 발걸음도 빨라졌다. 공원 입구까지 왔을 때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들어섰다. 호수를 둘러싸고 산책로가 있어서 그가 교회와 집을 오가는 길에 자주 들르는 곳이었다.


거기서 그는 그녀가 달리는 것을 보았다.




*


처음엔 놀이터에서 한참을 기다렸다. 하루, 이틀, 사흘…. 그가 더 이상 나타나지 않자 그녀는 다시 딸과 함께 세수를 하지 않았고 옷을 갈아입지 않았고 화장을 하지 않았다. 전처럼 시간에 쫓겨 헐레벌떡 뛰어나왔다.


아침의 모습은 그렇게 되돌아갔지만 강희는 달라졌다. 그가 일으킨 균열이 주는 설렘과 흥분이 갑자기 사라지면서 일상은 깨어졌다. 강희는 크게는 똑같고 작게는 다른 일상을 버티기 힘들었다. 무거운 손으로 쌀을 씻어 안치고 싱크대 앞에서 머릿속이 새하얘져 무엇을 해야 할지 몰랐다. 빨래를 돌리고 빨래를 널고 빨래를 개고 빨래를 제자리에 넣어놓는 일 같은 기계적인 노동에 드는 시간이 서너 배로 늘어났다. 지수의 재잘거림에 반응하기 어려웠고, 시어머니의 말들을 견딜 수 없었고, 남편의 눈길이나 손길이 자신에게 닿는 게 소름 끼쳤다.


달리는 것이라고 좋지는 않았지만, 도망가는 마음으로 같은 시간 집에서 나왔다. 언제나 즐겁고 힘을 줬던 이 시간마저도 허공에 들떠버리자, 강희는 달리는 대신 걷거나 벤치에 앉아서 조용히 눈물만 흘리다 돌아가곤 했다. 자신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고, 그것을 안다 한들 애써 나아지고 싶지 않았다. 모든 것은 그냥 될 대로 되겠지, 그런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죽이고 있었다. 힘겹게.


운동을 나가는 길에 그를 다시 보았을 때 강희는 처음엔 놀랐고 나중엔 궁금했다. 왜냐고, 어디 있었냐고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강희는 그를 떨어내듯이 엘리베이터에서 나와 빠른 걸음으로 공원으로 갔다. 아무것도 생각하고 싶지 않아서 그녀는 온 힘을 다해 달렸다. 눈물이 흐르면 닦으면서.




*


현우는 저녁마다 공원에 갔다. 그의 발길은 의지를 가진 것처럼 굳건히 그리로 걸어갔고, 현우는 생각을 멈추고 순응했다. 그녀는 같은 시간에 공원에 왔고 걷거나 달렸다. 현우는 한곳에 앉았다가 지나가는 그녀를 한 번 바라보는 것으로 만족했다.


어느 날 그녀가 한바탕 달리더니 그가 앉은 벤치로 다가와 앉았다. 현우는 너무 놀라 온몸이 굳었다. 가로등 불빛이 그들을 감싸듯 비추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겨우 말을 붙였지만,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현우는 죄를 지은 것처럼 땅만 바라보았다.


“이 시간이 좋아요.”


“… 네.”


현우는 뭐라고 말해야 할지 몰랐다.


“계속 좋으면 좋겠는데….”


“제가 방해가 되었다면, 저 때문에….”


그녀는 고개를 흔들었고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잠시 후 일어나 걸었다. 현우는 가만 앉아서 어찌해야 할 줄 모르고 있다가, 그녀가 멈추는 것을 보고 일어나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가 그녀 옆까지 왔을 때 그녀는 다시 천천히 발을 떼었고, 현우도 발걸음을 맞췄다.


둘은 말없이 집까지 나란히 걸었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1층까지 갔다. 현우는 그녀와 함께 내려 바위의 무늬같이 얼핏, 그러나 단단하게 새겨진 웃음을 띤 목례를 하고 걸어서 7층으로 내려갔다.




*


강희는 들뜬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냈다. 해야 할 일들은 마음에도 없는 남의 일처럼 후딱후딱 해치웠다. 시간은 더디게 갔고, 자신을 부르는 아이와 시어머니와 남편의 소리는 끝이 없었다. 저녁 시간이 되면 이제 강희는 엉뚱한 대답을 하기 일쑤였고, 들뜬 마음을 감추기 어려웠다.


공원에 도착하면 그는 바위처럼 기다리고 있었다. 다가가면 둘은 눈을 맞추고 조용히 웃었고 같이 공원을 걸었다. 아무 말도 없는 시간이 보이지 않는 우주의 암흑물질처럼 그들 사이를 꽉 채우고 있었고, 아무것도 들을 필요가 없는 오래된 익숙한 느낌이 그들을 충분히 평온하게 해주었다. 그러다 별똥별이 떨어지는 것처럼 갑작스럽게 어떤 말이 나왔고, 조용하고 황홀하게 상대에게 닿았다.


“이름을… 몰라요.”


“서현우입니다.”


“저는 이강희예요.”


그리고 그날은 서로의 이름을 되뇌기만 할 뿐이었다.


또 어느 날은,


“포도나무 꽃향기가 나요.”


현우의 말에 강희는 얼굴을 붉혔고,


“저는 바위 냄새가 났어요.”


하고 말했다.


“아, 바위… 그게 뭐지? 그다지 좋을 것 같지 않은데요.”


강희가 웃었고, 현우도 따라 웃었다. 그날은 그렇게 서로의 냄새를 맡고 자신에게서 나는 냄새를 궁금해하면서 걸었다.


또 어느 날은,


“저는 얼마 전에 목사가 되었어요.”


현우가 말했고, 잠시 후 강희도 입을 열었다.


“제 딸 이름은 지수예요. 송지수.”


둘은 한동안 굳은 표정으로 발끝을 보며 걸었다. 이윽고 피식, 강희가 웃었고, 훗, 현우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둘은 처음으로 손을 잡았다. 밤하늘의 별이 반짝이는 만큼 그들의 가슴도 반짝였다.




*


한 시간 남짓의 시간이 삶 전체를 의미와 활력과 환희의 빛으로 물들였다. 달뜨고 가슴이 터질 것 같았다가 서로를 만나면 잠시 진정되곤 했다. 손을 잡은 채로 걷고 또 걸었다. 멈추었다가는 숨결이 닿을 것 같았다. 그 순간을 견디기 위해 말을 이어갔다.


강희가 미역국의 간을 맞추다가 소금통의 뚜껑을 잔 구멍이 아닌 커다란 구멍 쪽으로 열었다가 소금이 반 통이나 국에 들어가버린 이야기라든가, 시어머니가 기저귀를 입게 하느라 씨름한 이야기, 지수 어린이집에서 받아온 달팽이가 무럭무럭 자라는데 왠지 무서워진다는 이야기…. 누구에게도 무의미하다고 생각한 이야기, 일기에 쓰는 것조차 구차한 이야기, 그러나 강희 자신에게는 역동적인 드라마 같았던 순간들이라 그렇게 아무것도 아닌 채로 공중에서 흩어져버리는 게 야속했던 이야기... 현우에게 닿아, 그의 눈이 골똘해지면, 그가 고개를 주억거리면, 아... 하고 탄식 소리를 내면 그제야 강희는 자신의 이야기가 제 자리를 찾아 삶에 안착했다고 느꼈다.


현우는 강희가 이야기를 마치고 교회 일에 대해 물으면 아직 처음과 같다고 담담하게 말했다. 아주 가끔 그전까지 의사로 살면서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 그들에게 주지 못한 도움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때 어떻게 할 수 있었을까, 의사로서 하지 못했던 것을 목사로서 할 수 있을까, 그의 질문은 그들이 지금 삶에서 도망치는 것이 아니라 그 어느 때보다 삶의 한가운데에 꼿꼿이 서 있다고 여기게 했고, 강희는 처음으로 현우와 함께 부르심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집 문을 열면, 가장 생생하게 살아있었던 꿈은 끝나고 빛을 잃은 현실이 눈앞에 나타났다.




*


크게는 똑같고 작게는 다른 하루를 기계적으로 보냈다. 강희는 이 모든 것을 발로 툭 쳐내고 풍선처럼 자신의 가슴을 부풀고 들뜨게 하는 곳으로 사뿐히 건너가고 싶었다. 언제든지 그 일이 일어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아슬아슬하고 간질간질한 나날이었다.


봉, 봉 떠오르려던 강희의 발목은 날아가던 풍선이 나뭇가지에 걸리듯 갑자기 잡혔다. 지수가 아팠다. 열이 40도를 넘나들었고, 기침을 심하게 했다. 약으로 나아지지 않다가 폐렴 진단을 받고 결국 병원에 입원했다. 강희는 자신처럼 마음 졸이며 집과 회사와 병원을 오가는 남편과 이 상황을 함께한다는 것에 안도했다. 며칠간 잠을 거의 자지 못하고 먹은 것도 없어서 파리하고 초췌했지만,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고 있었다. 지수를 걱정하느라 다른 것은 아무것도 생각나지 않았다. 제발, 제발… 바라는 것도 오직 지수가 낫는 것뿐이었다.


고비를 넘기고 잠든 지수를 보며 강희는 모든 것이 오래전 일처럼 느껴졌다. 그리고 여름이 가을이 되는 동안 자신에게 지나간 것이 무엇이었는지 한 걸음 물러서 볼 수 있었다. 황폐하고 메말랐던 자신의 마음에 불어온 바람결에 자신은 너무도 쉽게 타올랐고, 불확실하고 알 수 없는 것에 기다렸다는 듯 마음을 내주었으며, 불현듯 나타난 설레는 감정에 가슴이 깨질 것처럼 벅찼었다.


아이는 강희의 빛을 먹으며 자랐고, 시어머니는 자신의 생기를 가져가 연명했다. 그가 만지는 곳마다 자국이 남는 것 같았다는 기억을 남기고 남편의 사랑은 익숙함이라는 이름 뒤로 사위어갔다. 사회에서 자신은 없는 사람이었고, 집안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그림자였다. 누군가의 무엇이 되고 싶다는 간절함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강희의 가슴을 파고들어 강렬한 소용돌이를 만들었다. 그때, 그곳에 나타난 것이 누구든, 그녀의 소용돌이는 입을 벌려 삼켰을 것이다. 그녀는 결국 그것을 깨달았고, 들끓었던 열병 같은 것들을 떨어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는 동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강희는 그를 떠올리고 그와 벌였던 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았고, 가슴이 멍든 것처럼 아팠다. 상처는 이미 났었던 것이었고, 누르면 누를수록 아팠다. 하지만 앞으로 무슨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자신이 기대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새로운 사랑, 새로운 삶이었을까? 그것은 지금 가진 것과는 다른 것이었을까?


강희는 자신의 삶에 대해 느낀 권태와 우울이 현우로 인해 허물어졌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 덕분에 강희는 바람을 타는 것 같은 즐거움을 맛보았고, 손에 잡히지 않는 꿈같은 순간에 파묻혔었다는 것을. 그는 그것을 모른척할 만큼 매력적이고 안전한 허울이었다. 그에 비해 자신이 잃을 뻔한 것은… 자신의 삶을 바로 그대로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것이었다. 실제, 실제의 것. 너무도 익숙해서 빛깔이 보이지 않더라도, 그것은 자신이 만든 빛이었고 자신을 둘러싼 빛이었다.


강희는 허탈했다. 눈물조차 나지 않았다.




*


지수는 한동안 유치원에 가지 않았고, 강희도 집 밖에 나가지 않았다. 강희는 몸살을 앓고 난 후처럼 힘이 빠진 채로 숨 막히고 질리는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강희는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머릿속으로 그에게 할 말을 몇 번이나 고르고 골랐고, 여러 번 지웠다 다시 썼다. 그 앞에서 뭐라고 말을 꺼낼 수 있을까? 그녀는 그에게로 도망친 것처럼 그에게서 도망치고 싶었다.


지수는 다시 유치원에 갈 만큼 회복했다. 거의 한 달 만에 유치원에 가면서 떨리고 설레는지 강희에게 자꾸 물었다.


“엄마, 용주는 나를 잊었을까? 이현이는 다른 친구가 생겼을까? 사랑반 선생님은 그대로지?”


강희는 지수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대답했다.


“지수야, 사람들은 그렇게 쉽게 친구를 잊지 못해. 그리고 이현이가 다른 친구랑 더 친해졌어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친구는 또 있으니까. 그래도 만약… 이현이가 너를 기다리고 있다면, 이현이는 진짜 친구겠지. 선생님도 그대로… 계셔. 너를 기다리고 계셔.”


선선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강희는 웃으며 지수를 보내고 돌아오면서 그를 찾았지만, 그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음날도, 그 다음날도 마찬가지였다.




*


현우는 강단에 오르지 못하고 성도들이 앉는 의자에 앉아 있었다. 교회도, 집도 내놓았다. 영혼을 구하겠다고 목사가 된 자신이 우스웠다. 자신은 이웃의 아내를 탐냈던 것이다. 용서를 구하는 기도조차 할 수 없어 며칠째 아무 말 없이 눈을 감고만 있었다.


저녁이 되어 마침내 자리를 털고 일어난 현우는 공원으로 가 걷고 또 걸었다. 한 달째 그녀는 나타나지 않았지만 그날도 둘이 만나던 자리에 앉아 그녀를 기다렸다.


제법 쌀쌀해진 바람을 맞으며 눈을 감고 있다가 포도나무 꽃향기에 눈을 번쩍 떴다. 그녀가 옆에 와 있었다. 핼쑥하고 지친 얼굴이었다.


누구도 말을 꺼내지 못했다. 할 말이 무엇이었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지수가 많이 아팠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걱정했었는데. 다행이네요.”


“….”


“….”


“우리는… 뭐였을까요?”


“아무것도. 그러니 마음 쓰지 말아요.”


현우는 그렇게 말하고 싱긋 웃어 보였다.


“목사는 그만두기로 했어요. 완전히 실패했거든요. 한 사람도 구원하지 못했어요. 그렇게 간절히 기도했는데.”


“저를 구했어요.”


“흠…. 그게 무슨 말인가요. 위로하지 않아도 돼요.”


“믿어도 돼요.”


현우가 가만히 강희를 바라보았다. 흔들리지 않는 강희의 눈은 처음이었다.


“하나님께 확인해 봐요.”


현우가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


강희는 침대에서 책을 읽는 남편에게 시를 내밀었다.


“뭐야?”


“오늘 발견한 시.”


남편은 시를 읽었다.



남편 / 문정희


아버지도 아니고 오빠도 아닌

아버지와 오빠 사이의 촌수쯤 되는 남자

내게 잠 못 이루는 연애가 생기면

제일 먼저 의논하고 물어보고 싶다가도

아차, 다 되어도 이것만은 안 되지 하고

돌아누워 버리는

세상에서 제일 가깝고 제일 먼 남자

이 무슨 원수인가 싶을 때도 있지만

지구를 다 돌아다녀도

내가 낳은 새끼들을 제일로 사랑하는 남자는

이 남자일 것 같아

다시금 오늘도 저녁을 짓는다

그러고 보니 밥을 나와 함께

가장 많이 먹는 남자

전쟁을 가장 많이 가르쳐준 남자



“하하. 재밌네.”


“무서운 신데.”


“어디가?”


“... 여보, 나 하프마라톤 나갈래.”


“그거 좋은 생각인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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