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질문을 올리고 제가 답을 하라고요?
진주는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숨기고 싶었지만, 상기된 채로 입을 조금 벌리고 눈꺼풀에 힘을 준 모습은 누가 봐도 긴장한 얼굴이었다. 진주는 현호가 묻는 말에 또박또박 큰소리로 대답했는데, 그것은 진주가 자신감에 찼기 때문이기보다는 원래 말하는 방식이 그러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대표실 바깥에 있는 직원들은 진주의 목소리를 듣고 합격을 예감했다. 지금까지 면접을 본 사람들 중 대표의 사무실 밖으로 목소리가 새어나온 것은 진주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현호는 그 점을 높이 샀다. 자기소개서에 쓰여 있는 여러 단체활동, 그곳에서의 리더 경험도 마음에 들었다.
이틀 후 진주는 최종합격 소식을 들었다. 인턴으로 채용된 것이지만 가슴이 먹먹해질 정도로 기뻤다. 졸업학기부터 근 1년 동안 구직생활하면서 처음으로 최종합격을 한 것이었다. 구직생활 초기만 해도 취업시장이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객관적 사실은 진주에게 그다지 위협적이지 않았다. 그래도 누군가는 취업하잖아. 확률은 의미 없어. 나에겐 취업이냐 아니냐 두 가지 길뿐이야. 진주는 학창시절 꾸준히 최상위권 성적이었다. 대학교 때도 성적장학금을 두 번이나 받았다. 대인관계도 원만해서 초등학교 때부터 거의 매년 임원이었고, 고등학교, 대학교 때는 가입한 동아리마다 회장을 맡았다. 가장 원하던 대학에 못 들어간 것 정도가 그때까지 겪은 뼈아픈 실패였다. 영어 점수도 최상위급은 아니었지만, 국내파가 이 정도면 잘한 것이지 않나? 스스로 흡족히 여겼다. 이런 나인데 취직이 안 될 리가.
어쩐지 선배들도 착착 잘만 취직했다. 진주의 눈엔 그렇게 보였다. 각종 국가고시 준비로 성공이 지연된 선배들도 있었지만 그것은 몇 년 지연일 뿐으로 보였고, 대학원에 가거나 유학을 떠나는 선배들도 자신의 길을 잘 찾아간 것이고... 몇 년의 지연이 당사자에게는 임계치를 넘어가기도 했고 단지 빼도 박도 못하는 상황이라는 내막을, 그들이 학문의 즐거움이나 야망 때문이 아니라 학생 신분 유지를 위해 진학을 마지막 보루로 선택했다는 사실을, 대학생이라는 인생에 가장 반짝이는 시절의 끝에서 취업준비생이라는 딱지를 단, 기실 백수가 되어버린 사람들의 조바심과 좌절감을 자신이 알게 되리라고 진주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입사지원서와 자기소개서를 써서 열한 군데나 지원할 동안 진주가 받아든 결과는 모두 서류전형 불합격. 그때만 해도, 어, 뭐지? 하는 정도였다. 과 선배에게 내가 입사지원서를 열한 군데 썼는데 모두 서류전형에서 탈락했다고, 과장을 섞어, 그러나 좌절한 게 아니라 놀랐을 뿐이라는 듯 말했을 때, 선배는 콧방귀와 함께 히죽 웃으며, 이제 시작인 거지, 라고 했다. 그런 거예요? 반문하면서도, 진주는 선배 역시 열한 군데 이상 탈락을 겪었다는 거구나, 생각했을 뿐이었다.
그런 진주가 실제로 위기감을 느끼기 시작한 것은 사십 군데가 넘도록 정말로 서류전형조차 통과하지 못하고부터다. 내 스펙이 어디가 어때서... 내 자소서가 어때서... 한 번도 통과하지 못한 자신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를 빤히 바라보면서, 진주는 도대체 뭐가 어떻게 잘못된 건지 감조차 잡을 수 없었다. 뭔가 오류가 있었던 건 아닐까?
정확히 사십구 번째 입사지원에 서류전형 합격 소식을 들었다. 그때 진주는 눈물 한 방울이 떨어졌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인증을 받은 것만 같았다. 이후 2차 인적성검사 불합격 통보를 받고 서류전형에 불합격했을 때보다 더욱 실망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젠 서류전형 통과의 고비는 넘어선 줄 알았다. 하지만, 그 후로도 스물 세 번이 더 지나서야 두 번째 서류전형 합격 결과를 받았다. 진주는 드디어 심각해졌다. 2학기 수강신청을 할 때에, 취직으로 인한 수업 불출석을 양해 받기 위해 교수들을 찾아가는 상상을 했었는데... 졸업이 코앞이었다. 졸업 전에... 취직을 못하는 걸까? 설마...
진주가 심각해진 것 외에도 백 군데 넘게 입사지원을 하면서 달라진 것은 입사지원서를 낸 회사가 다양해졌다는 점이었다. 이름을 들어보지 못한 회사는 물론이고, 살면서 한 번도 생각해본 적 없는 직종, 어떤 직무든 지원대상이 전공 무관이면 무조건 지원했다. 그 회사에 들어가면 어떤 삶을 살게 될까 그려보는 것도 그만두었고(서류전형에 그러한 질문이 있어서 억지로 짜내야 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무슨 그림인지 본인도 모르는 그림이었다), 어쩔 땐 그냥 되나 안 되나 어디 보자, 같은 심정이었다.
그러는 중에 그나마 이름은 들어본, 일하고 싶은 적은 없어도 괜찮다고 생각한 회사의 서류전형에 합격했고, 바로 최종면접이었다. 임원면접 외에 필기시험과 토론면접도 한꺼번에 보는 것이었지만, 드디어 최종의 기회를 얻은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는 졸업 이틀 후 나올 예정이었다. 그래서 졸업식 날, 아직 공식적으로는 취직하지 않은 상태였지만, 진주는 곧 취직을 할 것처럼 기죽지 않았다. 적어도 겉으로는 그랬다. 스릴 만점이네, 좋아, 괜찮아. 이렇게 짜릿하고 아름다운 결말이라니.
하지만 이틀 후 진주가 받은 메일은 안녕하세요. OO회사 공채에 지원해주시고 소중한 시간을 내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쉽지만, 으로 시작했다. 진주는 메일을 보자마자 휴지통에 넣어버렸다. 손에 든 편지를 쫙쫙 찢고 꾸깃꾸깃 구겨버린 후 쓰레기통에 팍 처넣고 싶었지만, 현실은 그 소식을 전한 것이 손에 잡히지 않는 이메일이었으므로 아무리 세게 마우스를 클릭한다 해도, 클릭, 소리만 날 뿐이었다. 진주는 그 클릭, 소리가 너의 불합격도, 네가 합격을 바랐던 열망도 이 우주에는 클릭, 정도 영향을 미쳤을 뿐이야, 라고 말하는 듯했다. 말없이 이불을 펴고 그 속에 들어가 화장실에 가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일주일 동안, 진주의 머릿속에는 이렇게 자신의 인생이 쪼그라드는 건 아닐까, 쪼그라들고 쪼그라들다 우주에 부유하는 무한대에 가까운 먼지 중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 그것은 정말 선명하게 그림이 그려져서 무서웠다.
그런 진주를 이불에서 빠져나오게 한 것은 진주네 과에서 졸업 전 취직한 사람은 삼분의 일도 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제야 객관적인 통계와 취업률을 의미 있게 받아들였다. 내가 그렇게 낙오한 것은 아니야. 많은 사람이 겪는 일이고, 어찌 보면 이런 좌절의 시기가 나에게 도움이 될지도 몰라.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진주는 반나절 하는 빵집 아르바이트를 구한 후, 영어회화 학원에 등록했고, 취업준비 스터디에 가입했고, 다시 채용정보 사이트에 드나들며 입사지원을 하는 생활을 이어갔다. 그때만 해도, 이런 생활이 또 두 번의 계절을 지날 줄은 몰랐다.
한 번은 이런 일이 있었다. 평일 오전 대중목욕탕에 간 진주는 다섯 명도 안 되는 한산한 목욕탕에서 어릴 때 친구를 만났다. 온탕 안에서 느긋하게 때를 불리다 마주쳤는데, 아주 친했던 건 아니지만 오랜 세월 같은 동네에 살았고 같은 학교를 다녔으니 모르는 척할 수는 없었다. 그녀는 엄마와 함께였다. 물속에서 어깨까지 드러낸 채 친구 엄마에게 가까스로 예절을 차려 인사했다. 진주는 꽤 유명한 모범생이었으니까, 그 엄마도 이름만으로도 진주를 기억하고 아~ 하는 얼굴을 했다. 이어, 친구가 요즘 뭐해? 물었고, 진주는 최대한 동요하지 않고 구직생활, 이라고 말했는데, 그 친구는 선망의 눈길을 담아, 역시...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옆의 엄마에게 말했다. 진주, 교직생활한대.
진주는 평일 낮에 함부로 돌아다니지 않게 됐다. 사람들도 피했다. 친했던 과 친구와도, 동아리 친구와도 연락하지 않았고 만나지 않았다. 자신이 이 사회에서 자리를 찾기 위해 얼마나 심기일전 중인지 드러내고 싶지 않았고, 좌절하지 않으려고 얼마나 발버둥치는지 들키고 싶지 않았다. 선의든 뭐든 타인의 섣부른 격려와 긍정의 말을 튕겨내고 싶지 않았다. 와, 혹은 아하, 하는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명함과 함께 만날 수 있기를 바랐다. 자연히 말수가 적어졌다. 사회적 감이 서서히 퇴화했다.
그렇게 하루하루 지나는 동안 이제는 지원한 회사가 몇 군데인지 세지 않게 되었고, 서류전형에 합격해도 눈물을 흘리는 따위의 감동을 하지 않았다. 아르바이트를 관두고 취업준비에 모든 것을 쏟았다. 영어성적을 올리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잘 쓰기 위해, 시험을 잘 보기 위해, 토론을 잘하기 위해, 면접을 잘 보기 위해. 상환해야 하는 학자금이, 자신은 만져보지도 못한 돈이, 같은 액수의 십 원짜리 동전 더미가 되어 비릿한 금속 냄새와 함께 자신을 내리누르는 것만 같았다. 진주는 자신의 인생이 쪼그라들고 쪼그라들다 먼지가 되는 그림이 자꾸만 떠올랐고, 자신감, 자존감, 그런 것들이 아무리 마인드컨트롤을 해도 도무지 잡히지 않았다. 실로 어둡고 짙은 회색의 나날이었다.
그러다 최종합격을 한 것이다. 3개월 인턴 후 정직원 제안이 있을 수 있다는 조건을 달고. 정직원이 될 자신은 없었지만 기필코 정직원이 되고 말 테다, 하는 의지만은 활활 타올랐다. 그래서 엄마아빠에게 인턴이란 이야기는 하지도 않았고, 짐짓 아무렇지 않다는 듯이, 엄마아빠가 이름은 못 들어봤겠지만, 굉장히 유망한 회사라고 은근히 힘주어 말했다.
입사 첫 날, 다른 두 명과 함께 대표실에서 근로계약서를 썼다. 지난 면접 때 회사가 어떤 일을 하는지, 입사 후에 진주가 맡게 될 일은 무엇인지 대표가 간단히 설명했었다. 그때는 사실 그 내용이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랜만에 얻은 최종면접의 기회에 몸이 달았고, 처음 들어본 회사지만 매출도 영업이익도 상승세고, 한 해도 빠짐없이 매년 공채를 하는 성공한, 안정적인 벤처기업이라는 말에 다른 생각은 하지 않기로 했던 것이다. 기실 현호 역시, 구체적인 설명 대신 회사가 전력하는 마케팅 기법이 적힌, 자신이 번역한 책 소개를 하는 것으로 갈음했다. 진주는 뭔가 대단한 일이라고, 특별하고 최신의 일이라고, 받아들이고 싶은 대로 느꼈었다. 그런데, 근로계약서에, 회사에서 하는 일은 기밀이며 만약 회사에서 하는 일에 대해 이후에 어디서든 발설하면 10억 배상을 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었다. 대표는 그것을 지나가듯 말했지만, 분명히 강조했다. 진주는 생각했다. 내가 하는 일에 대해서 말할 수 없다고? 왜지? 혹시 말한다면 10억을 배상해야 한다고? 인생 끝이라는 거네. 갑자기 혀끝이 찌르르했다. 절대 말하면 안 되니 말을 해버릴 것만 같았다. 묘하게 신경을 긁었고 뭔가 찜찜했다. 하지만,
사인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기서 왜요? 라고 묻거나, 동의할 수 없습니다, 라고 말할 자신이랄까 배짱이랄까 그런 것은 1년 동안 수백 번 거절 당하고, 계절이 두 번 지날 동안 사회에서 철저히 소외되었던 진주에게 없었다. 옆의 두 명의 동료들도 아무렇지 않게 사인했으니까, 별일은 없겠지.
근로계약이 끝난 후 현호는 진주만 남기고 다른 두 사람을 내보냈다. 그리고는 진주에게 정직원을 제안했다. 3개월 수습기간을 거치는. 인턴 3개월 후 정직원이 되는 것과 다른 것이라면, 처음부터 좀 더 비중 있는 일을 할 것이며 급여도 조금 더 높다고 설명해주었다. 진주는, 이렇게 나를 알아봐주는구나! 싶어서, 사실은 아무것도 한 게 없으면서 그제야 잡히지 않던 자신감이 비쭉비쭉 고개를 들었다.
현호는 손해 볼 게 없다고 생각했다. 다른 두 명은 휴학한 적도 없고 아직 졸업 전이었다. 인턴의 경험만으로도 만족할 것이다. 그에 반해 진주는 그들보다 고스펙이면서도 오랜 구직생활에 찌들어 겸손하고, 자신도 확신할 수 없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 뻔했다. 진주가 낮출 데로 낮추다 여기까지 왔다는 걸 몇 년째 공개채용을 진행한 현호가 모를 리 없었다. 그래서, 자신은 신입사원 연봉 최고 대기업에 입사했었고,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원형 탈모가 생길 만큼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박차고 나와 창업을 했다는 이야기를 신화처럼 들어주길 바라며 지껄였다. 대기업에 들어가 봤자 네가 원하는 행복은 없었을 거야, 아쉬워할 것 없어, 내가 거기서 만족하지 못하고 나와서 회사를 차렸다니까? 이곳에서 너의 꿈을 펼치는 게 지름길이야, 라고 속삭이고 싶었던 것이다. 아무튼 진주가 어떤 성과를 낼지는 지켜보면 될 일이다.
인턴 두 명은 입구 쪽에 나란히 자리 잡았고, 진주의 자리는 안쪽이자 대표실과 가까운, 두 명의 팀장 사이였다. 진주가 자리를 안내받고 인트라넷 아이디를 받아 접속하자마자 공고가 떴다. 박진주는 오늘부로 정직원으로 채용되었고 3개월간 수습기간을 거친다는 내용이었다. 가슴이 붕 떴다. 불과 며칠 전까지 쪼그라들고 쪼그라들다가 먼지가 되는 그림을 머릿속에서 지울 수 없었던 진주는 인식체계의 어딘가가 굴절되는 것을 느꼈지만, 잘할 거야, 잘해낼 거야, 오기에 찬 의지만 붙들었다.
그렇게 근로계약서를 쓰고, 회사를 돌며 전 직원들에게 인사를 하고, 자리를 정리하고, 점심을 먹고, 회사 시스템과 하는 일에 대한 오리엔테이션을 받고, 테스트 삼아 받은 일을 두어 개쯤 하고 나니 퇴근시간이 가까워졌다. 진주는 잠시 오늘 어땠나 생각해보았다. 솔직히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들 뭔가 열심히 하던데, 진주는 열심히 하는 척을 열심히 한 것 같았다. 컴퓨터 오른쪽 아래의 숫자가 6:01이 되자 진주는 이제 들어가보라는 말을 양쪽 팀장에게 연달아 들었고, 곧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 하루가 아니라 열흘이 지난 것만 같았다. 머리도 무겁고 발도 무거웠다. 발이 부어 구두가 꽉 끼었다. 종아리는 땅땅해졌다. 고3 때가 떠올랐다. 오랜 시간 움직임 없이 의자에 앉아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은 비슷했지만, 열심을 쏟고 나서 뿌듯한 대신 기가 빨린 느낌이 드는 것이 달랐다. 회사 일이란 이런 걸까? 시간이 지나면... 달라질까?
진주는 아직 자리에 앉아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까딱, 까딱, 인사를 하고 사무실 문을 나섰다. 나는 이제 사회인이야, 진주는 그런 생각으로 다시 기를 끌어 모으려 했다. 지하철로 걸어가면서 서서히 다리도 풀리고, 바깥 공기에 머리도 조금 가벼워졌다. 하루하루 견디다 보면 적응이 될 거야. 직급도 점점 올라가겠지. 적금도 들고 해마다 해외여행도 갈 거야. 그리고... 상상 속에서 무럭무럭 이어지는 앞길이 오늘의 고단함을 막연하게 달래주었다.
그런데 지하철 역사를 지나 개찰구를 들어가면서 슬슬 겁이 나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네. 탈 수 있을까? 아침보다 설마 더할까? 아침에는 겨우 전동차 안에 들어갈 수가 있었다. 오감의 수난이었다. 빗지 않은 젖은 머리, 심하게 들뜬 화장, 서서도 꾸벅꾸벅 조는 사람, 잠에서 덜 깬 멍한 얼굴, 불쾌함이 어린 무표정한 얼굴... 그들은 하루가 열리자마자 삶의 톱니 어딘가에 끼어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분명했고, 그들을 보면서 터질 것같이 설레는 마음으로 하루를 시작했던 진주는 자신 역시 언젠가 이들과 같은 모습이 될 거라는 예감에 벌써 질리고 말았다. 그들에게서 나는 갖가지 체취도 사람이란 게 단지 유기물 덩어리일 뿐이라는 깨달음을 주었고, 그런 유기물 덩어리들이 몸 여기저기를 스치고 압박할 때마다 신물이 올라왔다. 간혹 전화 통화를 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말을 하지 않았지만, 이어폰 밖으로 들리는 앵쟁대는 소리가 신경을 긁었고, 이렇게 사람이 많은데도 약속이나 한 듯이 모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왠지 기괴스러워서 갑자기 어떤 소리가 자신을 놀래킬 것만 같았다.
중간에 한 번 갈아타고 이런 상태로 빠르면 한 시간 10분, 늦어지면 한 시간 30분이 걸린다. 출퇴근길에 날마다 영화를 한 편씩 보면 되겠다고 생각했는데, 휴대폰을 보면서 조작할 수 있는 눈과 손과의 30센티미터조차 확보되지 않았다. 지하철이 출발하고 멈출 때 다함께 앞뒤로 쏠리지 않기 위해, 정거장에서 사람이 타고 내릴 때 휩쓸려 가지 않기 위해 두 발을 땅에 붙이고 어디에든 몸을 의지해 무게중심을 잡아야 했다. 퇴근길은 긴장감이 사라졌다는 것 외에도, 지쳐버린 몸이 앞에 앉은 사람을 내릴 때까지 저주한다는 점이 달랐고, 그 때문에 훨씬 처절했다.
취업이라는 인생의 다음 관문을 통과하기 위해 그토록 애쓰고 마음고생을 했지만, 사회생활에 이런 고단함도 포함되었으리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예상을 빗나가기는 일 자체도 마찬가지였다. 진주가 둘째 날까지 테스트 같은 일을 하다가 사흘 째 되는 날 받은 본격적인 일은, 지금까지 공부하고 취업을 준비한 시간이 아까울 정도로 그것들과 무관했을 뿐 아니라 시시하고 하찮았다.
진주는 포탈 몇 군데에 아이디를 만들 수 있는 만큼 만들고 아이디와 비번을 전 직원이 공유하는 엑셀파일에 적어놓은 다음, 개별적으로 나누어 맡은 브랜드 광고를 블로그에 일상적인 내용과 함께 포스팅하고, 큐엔에이에 질문을 하고 다른 아이디로 답을 하고, 유명 카페마다 관련 글에 댓글을 달고, 쪽지를 보냈다. 그러면 팀장들은 진주가 하는 식의 일들이 어떤 효과를 가져왔는지 조횟수, 검색 횟수 등 노출량과 매출 상관표를 만들어 통계작업을 하고 성과를 적어낸다고 했다. ‘입소문 마케팅’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질문을 올리고 제가 답을 하라고요?”
초등학생이나 할 짓이란 생각에 진주는 자신도 모르게 예의 큰 목소리로 반문하며 맥없는 표정을 지었다. 자신에게 일을 가르쳐주던 왼쪽 팀장 말고 오른쪽 팀장, 그리고 주위의 몇 사람이 진주를 쳐다봤다. 왼쪽 팀장은 리스트에 있는 대로 기술적인 팁을 전수하느라 진주의 미묘한 역겨움을 알아채지 못했다.
“물론 다른 아이디로 해야겠지. 말투도 다르게 하고. 날마다 다섯 개씩 올려. 질문 형식이랑 내용 다 다르게.”
그들이 진지한 얼굴로 하루 종일 컴퓨터 앞에서 자판을 두드리고 마우스를 움직이며 하던 작업이란 게 이런 것이었단 말인가?
“카페는 우리 브랜드 키워드 알람 걸어 놓았으니까 알람 뜨면 바로 들어가서 대응해. 맞장구 치든지 반박하든지. 알람 안 떠도 오전오후 한 번씩 들어가서 우리 브랜드 홍보할 만한 글 있는지 쭉 보고. 어떤 브랜드 좋으냐는 질문은 당연하고, 직접적인 질문이 아니더라도 관련 토픽이 나오면 무조건 댓글로 우리 브랜드 언급을 해. 어디 맛집 찾았다고 올리면, 저도 거기 자주 가요, 거기랑 어디, 어디, 우리 브랜드 이렇게 인생 맛집이에요, 뭐 이런 식으로 댓글 다는거지. 이런 글만 쓰면 안 되는 거 알지? 그 사람 글이랑 댓글 이력을 다 볼 수 있으니까, 브랜드랑 전혀 관련 없는 일상글도 꾸준히 올리고 다른 일상글에 댓글도 달아줘. 질문도 브랜드 관련된 거 말고 일반적인 거, 아무거나, 카페 성격에 따라서, 예를 들면 맘카페에서는 애가 어린이집 적응을 못하는데 어떻게 해야 할까요, 뭐 그런 거 있잖아? 그러다 한 달에 한두 번씩 묻는 거지, 로션 어디 꺼 쓰세요? 그리고 다른 아이디로 우리 브랜드 추천하는 첫 댓글을 달아. 그게 중요해.”
진주는 입술을 깨물었다. 그런 건 하나도 어려울 게 없지만...
“아, 그리고 또 다른 아이디로는, 다른 사람 댓글에 적당히 반박을 해. 그거 써봤는데, 우리 아이가 민감한지 피부 다 뒤집어졌어요. 그러면서 눈물도 흘려주고. 알았지?”
거짓말이고 속임수라는 말밖에는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고 추천수가 필요할 때 매크로를 돌려.”
“매크로요?”
진주의 목소리가 더 커졌다. 눈도 그만큼 커졌다. 다시 주위 사람들이 일을 멈추고 진주를 쳐다봤다. 오른쪽 팀장이 끼어들었다.
“황 팀장. 천천히 하지.”
“그럴까? 그럼, 진주 씨. 브랜드 세 개 가지고 블로그, 큐엔에이, 카페에 오늘 분량대로 활동하고 퇴근 전에 보고해요. 하다가 막히면 물어보고. 오케이?”
진주는 자신을 흘끔거리는 주위 사람들, 그리고 이곳에 있는 스무 명 남짓한 사람들을 의식했다. 이들 모두가 바보는 아니겠지. 미친 것도 아니겠지... 진주는 선입견을 버리고 해보기로 했다. 해보지 않고 뭐라고 할 수는 없을 거야...
진주는 먼저 아이디와 비밀번호들이 적힌 엑셀파일을 열었다. 그리고 제일 덜 꺼림칙한 블로그 글부터 시작하기로 했다. 이 블로그는 A브랜드의 공식 홍보페이지였다. 마스코트를 내세워 일상 이야기와 섞어서 제품 홍보를 한다. 간간히 크고 작은 이벤트를 해서 이 페이지의 열혈이웃을 유지하는 것이 우선적인 목표다. 최종 목표는 그들을 통해, 그들의 입소문을 부추겨(물론 구체적인 행동지표가 있어야 한다) 일반 대중에게도 제품 홍보가 퍼질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진주는 자신의 블로그도 내팽개쳐둔 지 오래였다. 뭐라고 써야 하나. 지금까지 포스팅한 글들을 살펴보았다. 살짝 방정맞으면서도 꼼꼼한 캐릭터였다. 자, 그럼 그런 사람으로 빙의...
가 쉽게 될 리는 없었다, 물론. 하지만 캐릭터의 연결성을 살려 어색하지만 않도록 글을 몇 줄 올렸고, 제품과 관련한 재미있는 후기 영상을 링크하는 것으로 포스팅을 마무리했다. 지난 이벤트 당첨자에게 쪽지를 보내 당첨을 축하하며 몇 가지 개인정보를 물었다.
다음은 큐엔에이. 이번엔 B브랜드의 전자제품을 홍보해야 했다. ‘경쟁사 제품과 비교할 것’이라는 코멘트가 매뉴얼에 적혀 있었다. 한참 머리를 굴리니 괜찮은 생각이 떠올랐다. “전자제품은 1도 모르는 20대 여자입니다. 부모님께 깜짝선물을 드리려 하는데, 어디 거를 사야 할지 모르겠어요. 대충 검색해보니, B브랜드와 C브랜드가 있던데, 써보신 분 추천 부탁드려요~”라고 질문을 올렸다. 몇 시간 지나 매뉴얼에 정리된 내용을 적당히 각색해 답을 올리면 될 것 같았다.
다음은 카페 다섯 군데를 돌면서 D브랜드 홍보를 위해 화장품과 관련한 새 글이 있는지 살펴보고 여러 아이디를 동원해 댓글을 달아야 했다. 화장품 관련 글마다 E브랜드의 화장품이 좋다는 댓글이 이미 달려 있었다. 그 댓글을 단 사람의 이력을 살펴보니 가입한 이후로 화장품 관련한 댓글만 달고 있었다. 흠, 알바인가? 좀 하수네. 이런 일을 하는 곳이 또 있다고 생각하니 실소가 나왔다. 두 군데만 있을 리도 없고, 이런 식의 홍보들 중에 과연 진짜 일반인이 쓴 글이 있을지, 있다 해도 알아볼 수 있을지 궁금해졌다. 진주도 무언가를 살 때 인터넷 검색을 필수로 했는데 이런 것이었다니... 씁쓸했다.
꺼려지는 마음과 달리 일은 하다 보니 요령이 생기고 속도가 붙었다. 진주는 자신이 하는 일에 대해 윤리적, 철학적 고민 같은 건 집어치우고 오직 기술적인 것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해야 할 일을 적은 메모지에 일을 마칠 때마다 체크를 하면 그 일에 대해서는 더 이상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고 했다.
그런데 그렇게 한 주를 보내고 돌아오는 퇴근길에 눈물보가 터져버렸다. 이런 식으로 날마다 살아야 하는 거라고? 깨어 있는 시간의 대부분을? 자신이 겨우 지나온 구직생활 이후의 삶이 고작 이런 것이었다니 실망과 자괴감에 어찌할 줄 몰랐다. 취직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이제 꿈을 펼칠 일만 남은 줄 알았는데... 일주일 지나보니 자신이 맞이한 현재가 그 전보다 나은 건지도 알 수 없었다.
수많은 사람들이 진주를 지나쳤지만, 훌쩍대다가 우웅우웅, 소리를 내며 눈물을 훔쳐도 가끔 흘끔대는 사람이 있을 뿐 멈춰서거나 돌아보는 사람은 없었다. 알면서 모르는 척, 궁금해도 관심 없는 척하는 사람들도, 이렇게 군중 속에서 숨어 우는 듯 드러내며 우는 자신도 가짜 댓글들처럼 의도를 가지고 속임수를 부리는 것 같았다. 세상 모든 것이... 그런 것일지도.
주말이 지나 월요일 아침이 밝았을 때 진주는 자꾸만 가라앉는 마음을 붙드느라 안간힘을 썼다. 진주는 출근하며 생각했다. 이 일을 어떻게 하면 잘할 수 있을까? 자신이 하는 일이 생각할수록 시시하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에, 따져볼수록 거짓과 속임수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에, 자신의 일과 회사생활에 실망하고 싶지 않았던 진주는 그 일을 잘하기 위해 노력했다. 인식체계는 자꾸만 굴절됐다.
진주는 블로그에 포스팅할 때 순위에 오른 검색어와 최신 시사를 키워드로 넣었다. 거기에 브랜드 광고를 슬쩍 덧붙였다. 방문자수가 평균 스무 배, 어떤 날은 백 배나 늘었다. 카페에서도 왕성하게 활동했다. 할당된 분량을 넘어서 댓글도 열심히 달았고, 진짜로 활동하는 회원처럼 카페에 드나들었다.
금요일, 왼쪽 팀장이 그동안 진주가 한 일을 체크하다가 표정이 굳었다.
“진주 씨, 이거 뭐야?”
진주는 매뉴얼을 넘어선 자신의 열심이 어떤 치하를 받게 될까, 내심 궁금하던 참이었다.
“홍보를 하랬더니... 웬 싸움질을...”
“네?”
팀장은 카페의 “파우더팩트 추천해주세요” 글에 달린 댓글을 보고 있었다. 관련 글마다 E브랜드가 자꾸 선수를 쳐 댓글을 다는 것에 신경질이 났던 진주는 어제 참고 참다가 한마디 했다.
ㅡ뽀송피부 님, 알바죠? 지금까지 댓글이 E브랜드 파우더팩트 추천글밖에 없으시네요.
그런데 그 사람이 거기에 댓글을 달았다.
ㅡ알바요? 오드리햇반 님은 무슨 근거로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죠? 저는 정말로 E브랜드 파우더팩트가 인생템이라 추천한 거거든요?
진주는 기가 막혔다.
ㅡ그러실 수도 있겠죠. 그냥 이상해서요. 뭐, 아니시면 화내실 일도 없겠고... 다른 회원분들이 판단하시겠죠.^^
진주는 뽀송피부가 제 풀에 민망해 글을 삭제하고 사라질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ㅡ그러는 오드리햇반 님도 이상하신데요? 오드리햇반 님은 지난 봄에는 딸아이 초등학교 입학식에 오랜만에 화장한다며 파우더팩트 추천해달라고 글을 올리셔놓고, 지난주에는 동남아 신혼여행지에서 덥고 습해도 하나도 무너지지 않았다면서 D브랜드 파우더 추천하는 글 쓰셨던데... 재혼하셨나 봐요?
아차... 진주는 자신이 사용하는 아이디들이 이전에 어떤 글, 어떤 댓글을 썼는지까지 일일이 확인하지는 않았다. 민망해진 것은 오드리햇반 쪽이 되었다. 하지만 그다지 조회 수가 많지 않은 데다가 덧붙여진 댓글이 있다고 누가 또 보겠나 싶어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그런데 뽀송피부는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ㅡ그러고 보니 작년 가을에는 갱년기도 겪으셨네요? 도대체 오드리햇반 님은 대체 얼굴이 몇 개신지?
그러고도 어젯밤 카페를 뒤졌는지, 오늘 아침에 이런 글을 올렸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카페에 애정을 갖고 활동하는 주부입니다.
주로 눈팅을 하지만 회원님들의 이런저런 글들에 공감하고 감동하기도 하고, 궁금한 게 있으면 묻기도 하고, 답글들 통해 저도 많이 배우고 참고하곤 했는데요.
이런 카페를 상업적으로 이용하는 사례가 의심되어 신고합니다.
오드리햇반, 니콜키크더만, 안졸리나졸리나, 크리스티나아길내놔, 부릅뜨니숲이었으 다섯 개의 닉네임 사용자는 연결되어 있는 것으로 추정됩니다.
1번이 질문하면, 2번이 댓글을 달고, 2번이 질문하면 3번이 댓글을 달고, 이런 식으로 돌아가면서 호응해주고 있는데요.
그렇게 하는 글들이 100퍼센트 특정브랜드 화장품, 전자제품, 아기용품 홍보 글입니다.
카페 운영진은 이 문제를 조사하여 확인해주시고,
순수한 카페로 거듭날 수 있도록,
믿을 수 있는 카페로 유지될 수 있도록 조치해주시길 강력히 요청합니다.
+) 덧붙여, 이 카페뿐 아니라 다른 유명 카페에서도 비슷한 사례로 의심되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블로거들이 개인적으로 스폰을 받고 밝히지 않은 채 홍보글을 올려 파문이 일었던 게 엊그제인데, 이제 그런 일들이 카페를 통해 벌어지고 있나 봅니다.
기업의 돈으로 아닌 척 활동하는 회원은 밝혀지는 대로 퇴출시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글에 대한 댓글은 오드리햇반 등에 대한 성토 일색이었다. 그동안 썼던 일상글에도 비아냥거리는 댓글이 새로 달렸고...
“보통 일이 아니네... 여기 접어야 하는 거 아냐... 중요한 카펜데. 후.”
왼쪽 팀장은 중얼거리더니 일어서서 대표실로 갔다. 진주는 뭔가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대표실에서는 화가 난 대표의 목소리가 간혹 들렸다. 잠시 후 왼쪽 팀장이 신경질적으로 머리를 박박 긁으며 나왔다. 그가 자리에 앉으며 말했다.
“진주 씨, 대표실로.”
진주는 마른침을 삼켰다. 사무실 안이 이 작은 소란스러움에 술렁거리는 게 느껴졌다. 진주를 흘끔거리기도 하고, 옆 사람끼리 작은 목소리로 수근거리기도 했는데, 금요일 오후라 다들 조금 풀어져서 설렁설렁 일하다가 재미있는 구경거리가 생겨서인지 이 시간에 어울리지 않는 생기가 돌았다. 진주는 숨을 한 번 크게 쉬고 대표실로 갔다. 현호는 무언가를 보고 있었는데, 진주는 그게 자신의 이력서와 자기소개서라는 것을 금방 알아챘다. 앞장에 진주의 증명사진이 붙어 있었다. 현호는 진주가 들어온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읽었다.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나의 이력들이 얼마나 쓸모없는지, 나를 소개한 말들이 얼마나 부풀려졌는지 기막혀하는 건 아닐까? 진주는 달려가서, 자신의 입사지원서를 홱 낚아채고 말하고 싶었다. 거짓말 같아요? 나에 대해 얼마나 안다고 그래요?
잠시 후 고개를 든 현호는 진주와 마주한 자리로 옮겨 앉았다.
“그동안 일하는 건 어땠어요?”
“재미있었어요.”
진주는 서둘러 대답했다.
“그래요? 사기라고 생각하지 않았어요?”
진주는 말문이 막혔다. 뭐라고 답해야 할지 고민하는데 현호는 많이 기다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하는 일은 사기나 속임수가 아니에요. 브랜드와 제품의 특장점을 홍보할 때 대중에게 직접 광고하기 전에 오피니언 리더, 인플루언서를 활용하는 거지. 그들에게 투자하기도 하고, 그들을 직접 만들기도 하고. 단순히 속이는 거라고 생각하고 일했다면, 크게 오해한 거예요.”
“그게 아니라...”
“일이 커질 수도 있어서 수습이 필요하겠어.”
“죄송합니다. 저는...”
진주는 자신이 겨우 도착한 이 자리가 갑자기 귀중하게 느껴졌고, 어떻게든 만회하고 싶었다.
“아무래도 진주 씨는 이 일이 맞지 않는 것 같은데, 그만 하는 걸로 하죠.”
진주는 무슨 말인지 이해하려는 듯이 눈썹을 꿈틀거렸다. 그때 현호가 짧게 한숨을 쉬며 말했다.
“서로 시간 낭비하지 않는 게 좋겠어요. 지금까지 일한 급여는 오늘 안으로 들어갈 거예요.”
현호는 일어서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릴없이 진주도 일어나서 대표실을 나왔다. 사람들이 자신을 보는 눈길이 느껴졌다. 천천히 자리로 가서 컴퓨터에서 개인 파일을 삭제하고 바탕화면으로 세팅해 두었던 고양이 사진도 없앴다. 책상 위에 둔 휴대폰 거치대, 텀블러, 양치세트를 가방에 아무렇게나 집어넣었다. 가방을 메고, 누구한테 뭐라고 인사해야 할지 몰라서, 그냥 아무 방향으로나 까딱, 까딱 인사를 하고 회사 문을 나섰다. 뒷목이 따끔거렸지만 차마 문지르지 못했다.
퇴근시간만큼은 아니었지만, 금요일 오후의 강남 한복판에는 사람들의 물결이 일렁거렸다. 그 가운데 진주는 아무 파도도 타지 못하고 바다의 바닥에 붙어 걷는 듯 무겁게 발을 옮겼다.
첫 직장이었다. 첫 직장이었는데... 진주는 눈을 끔뻑이며 앞으로 자신의 삶이 어떻게 될지, 겨우 올라탔다 떨어진 이 길에 언제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 그것보다 당장 출근을 그만둔 것을 사람들에게, 특히 엄마아빠에게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골똘히 생각하느라, 2주 동안 출퇴근하며 지하철을 타는 동안 처음으로 자신 앞에 자리가 났는데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