넌덜머리가 나지만 기분이 드럽지만은 않네?
1. 김연수와 박완서와 장강명
2년 전쯤 김연수의 <소설가의 일>을 읽고 처음으로 단편소설을 썼다. 그 책을 읽고 용기를 얻었는지, 의욕이 생겼던 건지 정확히는 기억나지 않는다. 아무튼 ‘해봐. 일단 해봐. 소설 쓰는 거 별거 아니니까.’ 그런 부추김에 넘어가보고 싶었던 것 같다.
그쯤 박완서의 단편들을 읽었고 이런 식으로라면 해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김연수의 책은 이론편, 박완서의 책은 실전편. 그 두 권을 길잡이 삼아 내 맘대로 소설이라고 썼다. 소설의 꼴이라고도 하기 어려운 이야기들을 한 편씩 완성할 때마다 얼마나 살아있는 것 같던지.
그리고 지난 겨울 장강명의 <책 한 번 써봅시다>를 읽고 장편소설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다. 역시 정확히 무엇 때문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데, 글쓰기는 자전거 타기처럼 타면서 배우는 거라는 말에 어쨌든 해봐야 한다는 거네, 하지 않고는 영원히 모를 일이라는 거구만, 그렇담 해보겠어, 했다. 특히 그가 ‘초고를 완성하고 나서의 기쁨’에 대해 말했는데, 그걸 너무나너무나 맛보고 싶었다.
2. 초고 완성의 기쁨
그래서 그걸 느꼈느냐 하면, 지금 그런 구름 위에 있느냐 하면, 안타깝게도 그리고 억울하게도, 그렇지 않다. 7-80퍼센트 썼을 즈음엔 기분이 좀 붕뜨고 설렜었다. 정말 한 편 쓰긴 쓰겠구나, 하는 생각이 설레발을 쳤다. 하지만 마지막 20퍼센트는 끔찍한 괴로움 가운데서 썼고, 이야기를 마친 기쁨이 그것을 크게 덜어주진 못한 것 같다.
3. 글에 대한 욕망
무엇이 그렇게 괴로웠냐 하면, 진부하게도, 잘 쓰고 싶은 욕망과 실제 내 능력 사이에서 타협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르겠다. 이게 첫 장편소설이라는 걸 인식하면서도, 글이란 게 그런 건지, 내가 그런 사람인지, 잘 쓰고 싶었다. 아니 잘 써야 했다. 그 ‘잘’이라는 것도 여러 기준과 잣대가 있다는 걸 알면서도, 잘. 그래도 중반까지는, 이 정도면 나 스스로에게는 부끄럽지 않다, 나의 최선으로 쓰고 있다,는 마음으로 힘들어도 견딜 만했는데, 마지막을 향해 가니까, 글이 원하는 게 보였다. 그런데 나는 그걸 잘 쓸 수 없었다. 머리를 쥐어뜯다가 깨달았다. 아무리 내가 쓴 거고 쓰고 있는 이야기지만, ‘글도 남이구나'. 내가 다 맞출 수 없구나. 그럴 땐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하는 거구나.
내려놓고 편하게 썼다. 잠깐은. 하지만 곧, 나는 이 정도의 사람이구나, 하는 생각에 우울해졌고, 여기서 벗어나려고 잘 써보려고 하고, 그러면 잘 안 돼서 괴롭고, 어쩔 수 없이 내려놓고, 그럼 우울해지고, 또...
(그러다 보면, 그런데 이 짓을 내가 왜 하는가? 라는 근원적 질문에 답을 하는 시간이 찾아오고...)
4. 퍼즐
소설을 고작 한 편 써놓고 소설 쓰기란 게 이런 거였구나! 깨달은 듯 말하는 게 아무래도 웃기지만, 이 순수하고 강렬한 느낌은 기록하고 싶다.
소설 쓰기는 퍼즐조각 더미를 옆에 두고 퍼즐을 맞추는 것 같았다. 완성된 모양도 모르고, 모든 조각이 다 있는지도 모른다. 결국 다 맞출 수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고 시작했고, 이 퍼즐판에 들어가지 않을 조각도 섞여 있었다.
아무튼 처음엔, 엄청난 소설이 나올 것 같아 막연하면서도 설렜다. 크게 얼개를 잡고, 모퉁이와 모서리처럼 뚜렷한 조각들 덕에 쉽기도 하고 재미가 있었다. 그 초반 특수가 지나자 어려워지기 시작했고, 그 고비를 넘기니 몰입되는 때도 있었다. 그리고 막판으로 가면서… 이제 내가 잘 맞춰놓은 것들 때문에, 더 이상 융통성을 부릴 수 없고 정교하게 화룡점정을 찍듯 마무리해야 하면서, 위에 썼듯이, 어려웠다. 그즈음엔, 자꾸 이걸 뒤엎고 다시 시작하고 싶다는 생각, 이거 말고 다른 퍼즐 맞추고 싶다는 생각, 그럼 더 잘할 것 같다는 생각이 불쑥불쑥 들었다. (실제로 다음 소설 구상이 이때 됐고, 그건 술술 풀릴 것 같고, 막 그랬다.)
그런데, 바로 이게 대부분 글 쓰는 사람이 겪는 과정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처음 구상할 땐, ‘이러다 나 유명해지는 거 아냐?’ 싶다가, 조금 지나면 ‘생각보다 잘 안 풀리네?’ 깨닫고, ‘뭐가 뭔지 모르겠어’, ‘갈아엎고 딴 거 쓸까?’ 하면서 꾹 참고 써도 ‘역시 재능이 없어’라며 괴로워하게 되고, 결국 ‘때려치우고 영화나 보자’, ‘지금은 바쁘니까 다음에 쓰자’, ‘이번엔 포기하지만 다음엔…’ 이렇게 도망치고... 갈수록 멘붕, 결국 어둠에 계곡에 빠진다고. 누구나! 이 계곡을 빠져나오는 방법은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자’는 생각. 그리고 그렇게 써나가면, 개중 누군가는 ‘넌덜머리가 나지만 기분이 드럽지만은 않네?’를 경험하고, 여기서 멈추지 않고 뼈를 깎는 퇴고를 하면 개중 누군가는 ‘맙소사, 이걸 내가 썼다고?’ 경지에 이른단다.
5. 쓰다/살다
소설이 삶과 비슷하다고 하지만, 소설 쓰기가 더 비슷한 것 같았다.
ㅡ내 맘대로 쓰는/사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고,
ㅡ내 맘대로 쓰는/사는 것과 내 맘대로 되지 않는 것 사이에서 궁금하고 재미있고,
ㅡ어떻게 써야/살아야 할지 막막하지만 꾸역꾸역 하다 보면 어떻게든 되어가고,
ㅡ잘 쓰려고/살려고 애쓴다고 그렇게 되지도 않고,
ㅡ내 판단과 타인의 판단이 다른데, 타인의 판단이 더 맞고 의미 있는 것 같지만, 사실 내 만족이면 되고,
ㅡ눈치 볼 것도 완벽할 것도 없고,
ㅡ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인에게 어떤 식으로든 울림과 영향을 주길 바라고,
ㅡ왜 쓰나/사나 하면서, 때때로 다 집어치우고 포기하고 싶고 이게 다 무슨 의미인가 싶지만, 그 순간 벗어나면 또 다른 국면이 펼쳐지고,
ㅡ지루하고 노동 같은 쓰기/일상 중에 가끔 반짝 재미와 엄청난 감동이 밀려오는데,
ㅡ가만 생각하면 사실은 쓰는/사는 모든 순간이 의미 있고 감사한 것
등등.
그러나 수정 가능하다는 건 다르다,고 적었는데, 이제 와 생각하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영화 <어바웃 타임>에서, 과거로 돌아갈 수 있어도 어느 순간 그러지 않게 된다는 이야기를 아버지가 아들에게 해준다. 한 번 충실하게 살면 된다고, 늘 두 번째 사는 것처럼 여유를 가지고 살라고. 나는 그 말이 솔직히 납득되지 않았었다. 내게 그 능력이 있다면 언제든 돌아가서 더 좋은 결과를 위해 바꾸는 일을 계속할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안 그럴 것 같다. 수정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힘이 든다. 어느 순간, 수정본이 더 좋았는지 헷갈린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게 별로여도, 그냥 받아들이게 된다. 반 년을 생각하고 쓰고 또 읽고 하다 보니, 쓴 내용으로 정말 산 것 같아졌는데(심지어 소설 속 주인공의 나이를 내 나이로 소개하다 깜짝 놀란 적도 있다), 자꾸만 바꾸는 게 내 삶을 부정하는 기분이 들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내가 그 말을 했어야 해’, ‘그때 그 행동은 하지 말았어야 해’ 정도의 명확한 수정은 기꺼이 하겠지만, 나의 학창시절, 나의 20대, 나의 결혼생활, 이런 건 그게 완벽하게 마음에 들지 않더라도, 나의 삶으로, 내 정체성으로 받아들인다. 아쉬움이 남고, 다른 선택을 했다면 삶이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할지언정, 그걸 통째로 다시 살고 싶진 않다. 그건 어마어마한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기도 하고, 또 그런다 해도 불만족하는 부분이 있을 거란 걸 이제는 아는 나이니까. 그냥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들이는 쪽이 낫다고, 지금부터 바꿀 수 있는 오늘을 정신차리고 잘 살자고 마음을 고쳐 먹듯이, 이제부터 잘 쓰자는 쪽이 되었다.
더 잘 쓰려고, 자꾸만 자꾸만 썼던 글을 읽고 읽고 또 읽으려니 정말로 토할 것 같아서 대는 핑계다. 말하자면 나는 위에 쓴 단계 중, ‘완성하는 데 의의’를 두었고, ‘넌덜머리가 나지만 더럽지만은 않은 기분’ 근처인데, 여기서 손을 놓느냐 기적을 맛보는 순간까지 퇴고를 거듭할 것이냐는 또 다른 작가적 역량에 달려 있는 것이다. 내게 과연 그 역량이 있는지는 두고 볼 일.
6. 발견
나는 왜 동성애 이야기를 썼는가? 나는 왜 동성애를 반대하고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사람들에게, 특히 교회에 분개하는가?
긴 이야기를 줄이는 건 어렵지만, 없는 이야기를 늘이는 건 불가능하다는 게 내가 글을 쓰면서 깨달은 진리 중 하나다. 장편을 쓰겠다고 마음먹고 나는 길게 할 수 있는 이야기, 내가 진짜 할 말이 있는 이야기를 찾았다. 하지만 쓰면서 스스로에게 자꾸 묻게 됐다. 도대체 나는 왜 이 문제에 이렇게 관심이 많은 거지? 나는 동성애자도 아니고, (적어도 내게 커밍아웃 한) 동성애자 지인이 있는 것도 아니어서 실질적인 고민을 할 기회도 없었는데.
다 쓰고 나서 어렴풋이 깨달았다. 나는 한 인간이 자기 본성대로, 본연의 생겨먹은 대로 살아도 된다고, 그래야 한다고 주장하고 싶은 것이었다. 어떻게 생겨먹었든, 잘났든 못났든, 얼마나 ‘정상’에서 벗어나 이상하든, 이 세상에 태어난 대로 살아도 된다고, 있는 그대로 존재해도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그것은 뭔가 잘못된 일도 아니고, 누구의 실수도 아니고, 벌 받아야 할 죄도 아니라고. 나는 내가 믿는 하나님 역시 그러실 거라 생각한다. 아니, 믿는다.
소설은 부족했지만, 내 할 말이 어디에 있는지 알았다. 그리고 실은, 나, 못나고 모난 나도 이대로 세상에 존재해도 되느냐고 스스로 묻고 답한 거란 것도.
7. 숙제
처음 단편을 썼을 때가 내가 가장 우울했을 때였다. 반 년 동안 십여 편을 쓰면서, 나는 점점 나아졌다. (약 때문이기도 하다.) 그리고 나는 이야기를 쏟아냈기 때문인지, 나았기 때문인지 단편소설을 쓰겠다는 욕망이 옅어졌다.
글을 쓴다는 게 나에게 어떤 의미인지, 어떤 의미가 될지 그동안 나는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지금까지의 결론은, 일정 기간 동안, 그 길로 좀 더 가볼 걸, 좀 더 쏟아볼 걸 하는 후회가 들지 않도록 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했을 때 내게 ‘장편소설 쓰기’라는 도전은 자연스러웠다. 단 한 편을 쓰고,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다든가, 흥미를 잃는다든가, 할 수 없다는 걸 깨닫는다면, 심지어 그 한 편이 쓰레기 같은 망작이었다면 매우 안타까운 일이었겠지만, 난 그래도 좋겠다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망할 권리'가 있으니까. 인생을 내 멋대로 허비할 권리가. 그리고 다행히, 어쩌면 불행하게도, 나는 두 번째 할 이야기가 생각났고, 장편소설 쓰기에 재미를 느껴버렸고, 어쩐지 해볼 만한 것이, 다음 번엔 더 잘할 것 같고 그러고 싶은 마음이 든달까.
무엇보다도, 쓰는 동안 나는 거의 우울하지 않았다. 물론 우울해질 때도 있었지만(막판엔 글이 그 이유가 되기도 했고), ‘난 이 소설을 마무리 지어야 해!’라는 생각이 나를 놀랍도록 단단하게 붙들었다. 그것은 멋진 소설을 쓰는 것, 혹은 작가로 성공하는 것이나 세상에서 인정받는 것 같은 이유와는 별개의 것이었다. 한 마디 혹은 짧은 글로 명쾌하게 또는 논리적으로 할 수 없는 말을 긴 이야기로 풀어보겠다는, 내가 만든 우주 안에서 해결해보겠다는 순수한 꿈, 팔딱팔딱 뛰는 날 것의 욕망이었다. 삶을 붙드는 숙제가, 앞으로도 계속 생겨날 수 있다는 것은 마법 같은 일이다.
8. 자전거
다시 장강명의 자전거로 돌아가보자. 나는 어쨌든 자전거를 타고 목표 지점을 찍고 집으로 돌아왔다. 엄청 긴장했고, 파들파들 떨면서 다녀오느라 그 여정은 어디 내보일 게 못되고, 가기 전의 예상과 기대와는 달라서 당황스러운 점도 있지만, 어쨌든 갔다가 살아 돌아왔다!!! 그래, 이 기쁨인 것 같다. 초고 완성의 기쁨이란. 시간이 갈수록 뭉근히 찾아온다.
한 번 다녀왔다고, 작법책이 달리 보인다. 글쓰기에 관한 이야기도 다르게 들린다. 역시 타면서 배우는 것이었다. 다음엔 자전거 여행에 필요한 것을 더 잘 준비할 수 있을 것 같고, 점점 더 익숙해지고 유능해져서 언젠가 두 손을 놓고 탄다는가 하는 재주도 부리고, 더 멀고 더 재미있는 목적지로 떠날 수도 있을 것만 같다.
할 일 많은 세상에서 글이라는 도구로 뭔가를 하려고 하는 게 하찮게 여겨질 때도 있다.
글 가지고 언어적으로 사고하는 게 (분명 희열을 주기도 하지만) 때로 말도 못하게 지긋지긋하다.
하지만, 이거 안 하고 뭐 하려고? 물으면 난 아직 할 말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