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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Dec 29. 2023

쌀알과 기저귀, 도비와 시지푸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은 노동과 성취의 세계

육성으로 '헉!' 소리가 나오는 순간이 있다. 몇 초간 그대로 멈춰 눈만 깜빡이는 때.

아이를 키우다 보면 그런 일이 잦다면 잦다. 아이들은 차 안에, 차 키는 꽂아두고 밖으로 나와서 (급히 뭔가를 하고) 들어가려는데 차 문이 잠겼을 때라든가, 아이를 업고 정신없이 미역국을 끓이고 마지막에 소금을 '톡톡' 뿌리려고 했는데 자잘한 구멍이 있는 쪽이 아니라 뻥 뚫린 쪽의 뚜껑을 열어서 소금통의 소금 절반이 '왈칵' 쏟아져버린 때라든가(무슨 수를 써도 살릴 수 없었다).


‘직후의 황망함'과 '수습할 때 걸린 시간'을 따져, 나의 멘붕 리스트에 올라간 사건 두 개를 적어보겠다.


2위부터. 남편이 돌쯤 된 첫째를 안고 주방(겸 거실)을 왔다갔다 거닐었다. 노래를 불러주었던가, 이야기를 해주었던가. 기분이 좋은 첫째는 다리를 팔랑팔랑 흔들고 있었다. 그 발 끝에 싱크대 위에 있던 밥솥(전기밥솥의 내솥)이 걸렸다. 그래서 밥솥이 바닥으로 내동댕이 쳐졌는데, 문제는 그 안에 씻어놓은 쌀과 적당량의 물이 들어있었다는 것이다.

촤, 촤륵ㅡ(쿵, 터덩, 텅!) 경쾌한 소리와 함께 수천, 수만의 촉촉한 쌀알들이 주방 바닥 구석구석에 안착했다.


밥은 어쩌다 버려도 쌀은 버리기 어색하고 어렵다는 점(그래서 쓸어담은 쌀에서 먼지를 떨어내 먹어야 하나 한참 고민하였으나…), 주방 구석구석을 오랜만에 깔끔하게 치우고 조금은 후련한 기분이 들었다는 점이 기억난다.

어쨌든 남편이 같이 있었고, 함께 황망해하고 함께 뒷수습을 했다. 충격과 일거리를 나누어서인지, 찌그러진 내솥을 버리고 새로 사는 데 예상보다 비용이 들긴 했으나, 별다른 타격은 없었다.





그런데 1위의 순간은 첫째 아이가 잘 때 나 혼자 맞이했다.


띠로리롱, 빨래가 끝난 소리에 세탁기 문을 열었다. 음? 뭐지?

세탁기 안에는 아기가 쓰는 얇은 이불, 속싸개, 아기 옷, 가재 수건 등이 들어 있었는데, 그 사이사이 투명한 알갱이들이 불규칙적으로 촘촘하게 박혀 있었다. 하나씩 꺼내어 털면 뭔가 떨어지긴 하는데, 떨어지지 않고 늘러붙어 있기도 했다. 이게 뭐야, 대체... 그러다 내가 넣지 않은, 넣었을 리 없는 물체를 하나 발견했다. 일회용 기저귀.


아기 소변을 두둑히 받아낸 기저귀는 공처럼 돌돌 뭉쳐졌을 것이다. 쓰레기통에 들어가지 못하고 이불 위에 뒹굴었나 보다. 그리고 그대로 자신을 감싼 포근한 이불과 함께 세탁기로 들어갔나 보다. 물과 세제가 쏟아질 때 흡습제는 최선을 다해 쑥쑥 흡수했나 보다. 그러나 감당하기 벅찼나 보다. 빵빵하게 부풀어오른 기저귀는 드럼세탁기의 옷감 손상도, 물 소비도 적게 한다는 낙차방식 세탁이 이루어질 때 결국 터졌나 보다. 순면 촉감 하얀 기저귀 안에 가려져 있던 흡습제는, '울트라 씬'이라는 용어에 확실히 매우 부적합한 용량과 존재감으로 세탁기와 세탁물을 뒤덮고 있었다.


턴다고 털리지 않고, 떼어내려고 손으로 잡으면 뭉그러지고... 이걸 어쩐다...


세탁물도 세탁기도 다 버리는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울상을 하고 막막하게 서서, 그럴 수만 있다면 그러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는 것은 세탁기도 나도 알았다.


베란다에서 빨래 하나하나를 털고 털고 또 털어서 널었다. 바닥에 물을 뿌리고 땅에 붙은 듯 떨어져 있는 젤리 알갱이들을 쓸고 쓸고 또 쓸었다. 세탁기는 통세척 코스로 두어 번 돌렸다. 빨랫감이 마르고 나서, 다시 털고 또 쓸고... 그래도 붙어 있는 건 손으로, 돌돌이 테이프로 떼어냈다.

잠에서 깬 아이는 상수였다. 나에게 다가오지 않도록, 무해하다고 하는 화학물질에 손대지 않도록 관심을 돌리면서 나는 이 작업을 했다. 쉽고 지루한, 단순하고도 기나긴 작업이었다.


그랬기 때문에 나는 생각했다. 생각할 것이 없었기 때문에, 생각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에 생각했다.

난 누구이고, 여기가 어디인지 잊자. 잊어버려지지 않지만 잊어버리자.

학교와 사회에서 배우고 익힌 학문이며 사상이며 기술따위는 내던져버리자. 더 나은 삶을 위해 그토록 애써서 채웠던 것은 하나도 쓸모가 없으므로.

참과 거짓, 옳고 그름, 아름다움과 추함의 차원은 세상에 없는 것이다. 적어도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멀리, 널리 두었던 눈길을 거두고, 내 앞의 무질서를 되돌려놓는 행위에 몰입하자.

그러면 언젠가 해내게 되어 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은 노동과 성취의 세계.

나의 하루.

나의 시간.

나는, 시지푸스.



* '기저귀'와 '세탁기'로 검색해보면, 이런 일의 후기들이 주루룩. 때 늦은 위로가 된다. 둘러보니, '건조기'로 수습이 조금은 쉬워진 듯. 그때 나는 건조기가 없었다. 지금은 있다. 때 늦은 아쉬움이 든다.





그로부터 2-3년쯤 지난 어느 날, 세탁기를 열었다. 이번에는 쌀알처럼 작고 하얀 종이 쪼가리들이 불규칙적으로 촘촘히 빨랫감을 뒤덮고 있었다. 첫째가 주머니에 명함 같은 딱지를 10여 장 넣었던 것이 떠올랐다.


흠. 얼씨구.


비슷한 작업을 했다. 덜 놀라고, 더 빨랐다.

겪어봤다고, 익숙해서.


아니, 그보다, 내 세계를 좁히고, 생각을 납작하게 하고, 눈길을 코앞으로 떨어뜨렸으니까.


예상하지 않은, 내 삶에 꿈꾼 적 없는, 무어라고 이름 붙일 수 없는 일들을 타격 없이 맞이하기 위해서는, 어떤 정신줄은 놓고, 어떤 기억은 버리고, 어떤 나사는 풀고, 어떤 문은 닫아야 했다.

그렇게 나의 색채가 없어지고, 자아감을 잃어버리고, 영혼이 잠식되게 두면서 한 시절을 건너왔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별의별일을 다 겪으며 살고 싶었다. 그것은 무전여행이라든가, 바닷속이나 우주 탐험이라든가, 분쟁지역 곳곳을 누비면서 어떤 역할을 감당한다든가, 학계가 놀랄 만한 이론이나 사회의 찬사를 받을 만한 업적을 세우거나... 그런 류의 모험과 성취였다. 이렇게 소소하고, 파헤칠 것도 곱씹을 것도 없고, 어디 말할 데도 없고 글로 쓸 만한(하지만 기어이 썼다!) 사건도 아닌, 이름도 없는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한없이 서글퍼지기도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 세상사가 다 이런 일이라는 걸 깨달은 것 같기도 했다. 적어도 이런 일들이 바탕이라는 생각, 대단하다고 여겨지는 일들은, 때때로 실제로 대단한 일이기도 하지만, 세상은 그런 일들로만 채워지지도 않고, 굴러가지도 않는다는 것, 내가, 혹은 누군가, 어쩌다 그런 드러나는 '대단한 일'을 했다 하더라도, 그냥 그뿐이라는 생각에 어떤 '보는 눈'은 새로 열렸던 것 같기도 하다.


'도비'는 어디에나, 언제나 있는데, 그걸 아는 자와 모르는 자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다. 나는 그걸 아는 쪽으로 넘어오긴 했는데, 그 역시 그냥 그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어른'이 됐다고 할 수는 없겠고, 감탄하는 게 달라진 정도랄까. 주위의 시선을 사로잡는 사람이나 역사책이나 뉴스에 날 만한 업적을 세운 사람보다, 보이지 않는 곳에서 이름 없는 일을 묵묵히, 때로 기꺼이 하는 손길에, 그런 손길이 지금까지 꿋꿋이 이어져왔다는 사실에.



시지프(시지푸스)의 신화에서는 다만 거대한 돌을 들어 산비탈로 굴려 올리기를 수백 번이나 되풀이하느라고 잔뜩 긴장해 있는 육체의 노력이 보일 뿐이다. 경련하는 얼굴, 바위에 밀착한 뺨, 진흙에 덮인 돌덩어리를 떠받치는 어깨와 그것을 고여 버티는 한쪽 다리, 돌을 되받아 안은 팔 끝, 흙투성이가 된 두 손의 온통 인간적인 확실성이 보인다. 하늘 없는 공간과 깊이 없는 시간으로나 측량할 수 있을 이 기나긴 노력 끝에 목표는 달성된다. 그때 시지프는 돌이 순식간에 저 아래 세계로 굴러떨어지는 것을 바라본다. 그 아래로부터 정상을 향해 이제 다시 돌을 밀어올려야 하는 것이다. 그는 또다시 들판으로 내려간다.

시지프가 내 관심을 끄는 것은 바로 저 산꼭대기에서 되돌아 내려올 때, 그 잠시의 휴지의 순간이다. 그토록 돌덩이에 바짝 닿은 채로 고통스러워하는 얼굴은 이미 돌 그 자체다!  나는 이 사람이 무겁지만 한결같은 걸음걸이로, 아무리 해도 끝장을 볼 수 없을 고뇌를 향해 다시 걸어 내려오는 것을 본다. 마치 호흡과도 같은 이 시간, 또한 불행처럼 어김없이 되찾아오는 이 시간은 바로 의식의 시간이다. 그가 산꼭대기를 떠나 제신의 소굴을 향해 조금씩 더 깊숙이 내려가는 그 순간순간 시지프는 자신의 운명보다 우월하다. 그는 그의 바위보다 강하다.

이 신화가 비극적인 것은 주인공의 의식이 깨어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한 걸음 한 걸음 옮길 때마다 성공의 희망이 그를 떠받쳐 준다면 무엇 때문에 그가 고통스러워하겠는가? 오늘날의 노동자는 그 생애의 그날그날을 똑같은 작업을 하며 사는데 그 운명도 시지프에 못지 않게 부조리하다. 그러나 운명은 오직 의식이 깨어 있는 드문 순간들에만 비극적이다. 신들 중에서도 프롤레타리아요, 무력하고 반항적인 시지프는 그의 비참한 조건의 넓이를 안다. 그가 산에서 내려올 때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 조건이다. 아마도 그에게 고뇌를 안겨 주는 통찰이 동시에 그의 승리를 완성시킬 것이다. 멸시로 응수하여 극복되지 않는 운명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 알베르 카뮈, <시지프 신화>



삻이 달라지고 나아질 거라는 확신, 성공의 희망 없이 시간을 버텨내고 노동을 계속하는 것은 비극이다.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그것이 신화로 전해질 만큼 우리 삶의 원형이라면, 나는 육아의 시절을 통해 비로소 조금은 훈련했다는 생각이 든다.

 

여전히 고통스럽지만, 오늘도 손과 발을 움직여볼까. 그런 운명을 멸시로 응수해볼까.



밥솥 내동댕이 사건. 기저귀 폭파 사건은 사진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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