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모도 헤도헨 Dec 23. 2023

통탄의 유치원 졸업식

더 나아지려고, 더 잘해주려고 애쓰던 날들

육아를 하다 보면, 멘토로 삼는 사람이 생긴다. 멘토까지는 아니어도, 눈여겨보며 참고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내 인생을 스쳐간 사람들이 몇 명 있는데(그에 관한 글을 언젠가 써봐야겠다), 그중 한 명이 <삐뽀삐뽀 119 소아과>를 쓴 소아과의사 하정훈 님이다.


첫째를 키울 때는 그 책을 거의 정독하다시피 읽었다. 이후로도, 때때로 찾아보며 도움을 얻었다.

인터넷 검색으로 얻은 다량, 다양의 정보에는 미묘하게 다른, 때로는 정반대의 '사실'과 '의견'이 동시에 있다. 그것을 두루 살피다 보면 흐름이 파악되고 전체적인 그림이 보이고 거기서 어떤 '진실'을 건져낼 때도 있지만, 때로는 단 하나의 정석 같은 정보를 바로 얻는 게 필요, 아니 간절하다. 나머지는 소음과 장해가 되는 때.

나의 경우에, 아기라는 생명체를 책임져야 하는 일에 <삐뽀삐뽀 119 소아과>가 그런 도움이 되어주었다. 한동안 처음 임신한 친구에게 선물로 주곤 했다.


또 다른 육아 멘토 중 한 명인 소아정신과의사 서천석 님의 팟캐스트에 하정훈 샘이 나온 적이 있다. 그때 인상적인 내용 하나. "선생님도 육아에 후회하시는 게 있나요? 후회되는 게 있다면 무엇인가요?" 대충 그런 질문이었는데, 하정훈 샘은 채 말이 끝나기도 전에 답했다. "영어유치원 보낸 겁니다." (왜냐하면...)


살면서 여러 가지 후회를 하지만, 어떤 후회는 뼈에 사무친다. 아차, 하는 실수로 어떤 말과 행동을 하고도 후회하지만, 진중하게 '고민'하고 '선택'한 길이 결국 틀렸던 경험은 '통탄'의 기운이 묻는다. 그런 후회였다.

나는 그렇게 느꼈고, 그때 첫 아이가 두 살이었나 세 살이었나, 그때도 별생각 없던 '영어유치원'은 내 옵션에서 깔끔하게 지웠다.


육아는 삶의 핵심적인 방식이다. 어떤 주말은 아무렇게나 보낼 수 있고, 얼만큼의 돈은 쓰고 잊어버릴 수 있겠지만, 자식을 키우는 일엔 웬만해선 그런 대충의 '척'을 할 수 없다. 자신의 가치관과 바탕(혹은 바닥)이 결국 드러나고야 만다. (그래서 마치 자식의 성취가 자신의 결과물인 양 매달리게 되지만, 결과는 또 다른 영역이라는 걸 깨닫는 순간은 오고야 말고...) 그런 면에서, 다른 사람의 육아를 그대로 취할 수는 없다.


하지만 '키우고 나니 가장 후회하는 것'이나 '돌아보면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되는 것' 같은 건, 취하든 취하지 않든, 감추어진 보물 같아서 언제나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나도 후회하는 것이 있다. 12년을 돌아보면 딱 두 가지가 '뼈에 사무치는' 후회로 떠오른다. (하나는 다음 기회에 쓰기로 하고) 그중 하나가 첫째가 7세가 되었을 때 유치원을 옮긴 것이다.


첫째는 네 살 때 처음 기관에 갔다. 보내기 전, 심혈을 기울여 기관을 고르고 골랐다. 지역 카페를 탈탈 털듯이 검색하고, 댓글로 채팅으로 질문하고, 후보를 서너 군데 뽑아서, 백일 된 둘째를 데리고 직접 가서 상담을 받았다.

보내본 적이 없으니(다녀본 적도 없다고 할 수 있고), 어떤 곳이 좋은지, 내가 어떤 곳을 좋다고 여길지 사실 잘 몰랐다. 다만, 어렴풋이, 공부를 많이 시킨다거나 특별활동이 많다거나, 그런 걸 내가 원하지 않는다는 건 알았다. 바깥놀이를 많이 하고, 생태감수성을 키울 수 있는 곳, 먹거리에 대해 믿을 수 있는 곳. 그 정도가 기준이 되었고, 둘째 조리원에서 만난, 넷째 엄마의 추천으로 한 어린이집에 등록했다. 아주 넓은 텃밭(그래서 텃밭 활동이 철마다 있고, 그곳에서 난 식재료로 급식을 했다)과 넓은 잔디밭, 뒷산, 닭과 토끼와 공작새를 키우는 작은 우리가 있는 곳이었다.


그때는 사소한 일에도 미심쩍은 마음이 들고, 엉뚱한 일에 감탄도 하고 그랬던 것 같다. 이제 와 생각해보면, 꽤 괜찮은 곳이었다. 그런 환경이 있고, 여기에 좋은(아이에게 맞는) 선생님을 만나면 좋지 않을 수가 없다. 프로그램은 거들 뿐.


아무튼 첫째는 여기서 3년을 잘 다녔다. 3년째에는 네 살이 된 둘째도 함께 다녔다.


그렇게, 두 아이를 믿고 맡기고 나는 셋째를 키우면 되었는데. 정신없고 분주한 중에도 첫째를 위해 무언가를 해줘야 한다는 강박 때문이었는지, 신경은 쓰고 있다는 위안이 필요했던 때문인지, 나는 줄기차게 고민했다.


일곱 살이 되어도 계속 이 어린이집에 보낼 것인가? 1년은 유치원에 보내야 하지 않을까? 더 좋은 곳, 더 좋은 교육(내게 이것은 공부 쪽은 아니었지만)이 있을 텐데, 너무 한 곳에서만 유아기를 지내게 한 게 아닐까? 새로운 곳에서 다른 자극이 필요하지 않을까?


나는 또 검색을 했고, 댓글과 채팅으로 사람들에게 물었고, 설명회를 다녔고, 전화로 물었고, 상담에 다녔다. 돌도 되지 않은 막내를 아기띠로 안고.


결국 다니던 어린이집 근처에 있는 유치원으로 옮기기로 했다. 아이비리그의 한 이름을 딴, 건물도 크고 인원도 많은 규모 있는 유치원이었다. 다양하고 체계적인 유치원스러운 활동이 가득했다. 거기엔, 내가 중요하게 여기던 생태활동도 포함됐다.

이렇게 몇 줄 글로 쓰고도, 이곳은 내가 부모로서 추구하던 곳이 아니라는 걸 지금도 알겠는데, 그땐 뭐에 씌었던 걸까, 마침내 아이를 위해 한 발짝 더 나아간다고 설렜다. (어릴 때 집 근처에 크고 유명한 유치원이 있었다. 나는 다른 작은 유치원에 다녔는데, 가지 못한 큰 유치원에 대한 로망이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니까 아이들은 어린이집에 잘 다니고 있었다. 나 역시 불만은커녕 만족하면서도, 더 나은 곳이 있다고 믿었다. 아이들이 더 넓은 세계에서, 더 좋은 것을 얻길 바랐다. 그래서 옮기는 것이었다.


이 선택을 후회한 것은 입학하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아서다. 아니, 입학하기 전부터 이런저런 준비를 하며 알아챘다. 좋아 보이던 것들은, 좋아 보이게 하기 위해 할 수밖에 없는 어떤 것들과 함께라는 사실을 어김없이 깨달았던 것이다.


월간 계획표, 일주일 일정표, 학부모 통신문 등을 보면서, 입학식을 치르면서, 셔틀버스를 태우고 내리면서, 이곳이 특별하고 다양하고 수준 높은 교육을 한다며 애쓰는 것들, 그리고 그만큼 놓치는 것들, 겉으로 보이는 것과 실속 사이의 헐거운 틈이 확실히 보였고, 내가 가장 싫어하는 것에 내가 깜빡 넘어갔다는 걸 인정했다.


유치원 원복을 입어보며 좋아했던 아이들도, 새 유치원의 (어린이집엔 없던) 공간이나 프로그램에 좋아했던 아이들도, 이전 어린이집이 그립다고, 어떤 선생님이 보고 싶다고 툭툭 말했다. 아이들이야 자연스레 이런 말을 할 수도 있었겠는데, 나는 내가 아차, 싶었기 때문에 이런 말이 더 심상하게 들렸던 건지도 모른다.


나는 이전 어린이집 담임 선생님께 전화해서, 혹시 다시 돌아갈 수 있는지 여쭈었다. 그렇게 묻기까지 밤마다 잠을 설치고 무거운 가슴을 진정시켜야 했다. 돌이킬 수 없을 것 같은 실수를 저질렀을 때의 괴롭고 불안한 상태였다.


부끄럽기도 했고, 이미 입학하면서 들인 비용도 적지 않았지만, 이제라도 돌아가는 게 낫겠다고 확신했다. 그런데 그 어린이집도 인기가 많아서 자리가 없었다. 5세 반은 없고 7세 반은 있었던가. 옮기려면 둘을 한꺼번에 옮겨야 하니, 며칠 더 기다려 보았다가, 그냥 이곳에 만족해야지 하고 털었다. 시간을 더 지체했다가는 이곳에서 적응하는 게 더 어려워질 테니까. 괜찮을 거야, 내가 섣불리 판단하는 걸지도 모르잖아. 마음을 가다듬었다.





내가 이렇게 전전긍긍했던 건, 더 좋으려고 한 선택이 더 나쁜 결과로 이어진 것이 당황스러웠기 때문이었다.

나는 사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었다. 더 좋은 것을 찾고, 머뭇거리지 않고 선택했다. 나는 척박한 곳에서 개척하듯 살았기 때문에, 그런 선택은 거의 언제나 옳았다. 유목하듯, 익숙한 것을 버리고 떠나는 것에 미련을 두지 않았다. 새로운 곳엔 더 좋은 것이 있을 것이었다. '익숙함'은 이제 새 땅을 찾아 떠나야 할 징표였지, 그 자체로 어떤 장점이 있으리라곤 생각한 적이 없었다.


여차저차 1년을 보냈다. 때로는, 이건 괜찮네, 하면서, 대체로는 실망하면서. 너무나 가기 싫어하는 둘째를 설득하느라 진이 빠지고, 힘들게 적응하는 첫째를 안타까워하면서. 얻은 게 전혀 없진 않았다. 그렇게 생각하면서 더 심각해지지 않으려 애썼다.


그랬는데 졸업식. 졸업식에도 여전히 보여주기식의 행사가 잔뜩이었다. 그리고, 그보다... 이 커다란 유치원에 1년만 다닌 첫째에게 졸업식은 별 감흥이 없었다. 친구들에게도, 선생님에게도, 공간에도 정이 없는 상태였고, 그것은 서로에게 그러했다.

아주아주 길고 유난한 행사가 진행되는 내내, 첫째와 나는 들러리, 아니 방청객처럼 한쪽에 앉아 있었다. 지루하고 지치고 질리는 시간이었다. 정말 아쉬워하고 애틋해하는 아이들을 보며, 첫째가 만약 다니던 어린이집에서 졸업했다면... 그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익숙함'이 주는 것, 뿌리내린 곳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게 있다는 걸 처음으로 절감하는 시간이었다.


뒤에 두고 온 것을 생각지 않고 나아가는 것에도 적정선이 있구나, 처음으로 깨달았다. 이런 교훈을 얻는 건 나인데, 감당은 아이가 했다는 생각에 미안했다. 아이는 그때 어땠는지, 나중에 어떻게 기억할지 모를 일이지만.





나는 이후로 아이들의 기관이나 학원을 선택할 때 훨씬 단순해졌다.

첫째가 초등학교에 들어갈 때 둘째를 그 학교의 병설유치원에 보냈다. 막내는 집에서 가까운 어린이집에 다니다, 역시 언니를 따라 병설유치원에 갔다. 그리고 오늘 졸업식을 했다.


병설유치원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면, 독립된 건물에 보통 6세 반 1개, 7세 반 1개가 있다(5세 반이 있는 곳도 있고, 7세 반만 있는 곳도 있다). 지역마다 다르겠지만, 아이가 다닌 곳은 항상 정원보다 재학생 수가 적었다(방학이 긴 것, 셔틀버스가 없는 것이 커다란 허들). 각 반에 담임선생님 한 분에 방과후선생님 한분씩, 총 네 분이 계신다. 등교(교문에서 유치원까지 20미터^^)와 청소를 도와주시는 시니어 선생님이 계시기도 한다. 공교육인 만큼 교육과정을 철저하게 지킬 뿐 아니라, 양질의 체험활동을 하고, 재정적 지원을 받는다(지역, 인원, 상황에 따라 다른데, 둘째는 간식을 따로 챙겨 보냈고, 막내는 다닌 2년 동안 교육비 포함 경비로 낸 금액이 0원이었다). 초등학교와 일정과 행사가 겹치고 급식도 함께 한다. 학부모의 마음에 들기 위해, 입소문이 나게 하기 위해, 이 기관이 이렇게 좋다는 걸 보여주는 식의 그 무엇도 없다는 점이 나는 너무나 좋았다.


아무튼 처음엔 당연히 낯설어 하지만, 한번 익숙해지면 (구성원의 드나듦이 거의 없다. 가끔 충원되는 정도) 아이가 활개치며 지내기 딱 좋은 크기의 세계다. 7세 가을부터는 선생님들과도 친숙해지고, 친구들도 다 친하고, 동생들은 동생들이고, 공간도 익숙하고... 집만큼, 때로는 집보다 '내 세상'으로 여기게 된다. 유치원에서 살고 싶다고 할 정도로("침대 있으니까 잘 수도 있어, 엄마"), 학부모 상담 시간에 담임선생님께서 한숨과 함께 웃으면서, "학교 가면, 그래도 3,4월엔 긴장하며 지내겠죠..." 할 만큼.


그런 유치원을 졸업하니 아이는 아쉽지 않을 리 없겠지만, 거의 대부분의 친구들을 학교에서 계속 만날 수 있고, 선생님들과도 "우리 이제 급식실에서 만나자~" 하고 헤어지니, 그냥 방학하는 느낌으로 가볍게 집으로 돌아왔다.


클래식 트리오를 섭외하여 짧은 공연을 하고, 누구 하나 도드라지지도 기죽지도 않게 상과 선물을 수여하고, 원가와 송가를 부르고 끝난, 소박하고 싱겁기 그지없는 졸업식이었지만, (그래서 어떤 엄마들은, "너무 신경 안 썼더라", "선생님이 바쁘셨나 보네" 할 정도로) 나는 참 유쾌하고 가뿐한, 감사한 마음만 가득한 졸업식이었다.





그래도, 여지없이 첫째의 유치원 졸업식을 떠올렸다.

더 나아지려고, 더 잘해주려고 애쓰던 날들과 그랬는데 마음과 달라서 씁쓸했던 순간들.

그리고, 그렇게 만난 우리의 오늘.



축하한다. 이제 우리 집엔 미취학아동이 없다는 게 싱숭생숭하네.



이전 10화 외롭진 않은데 심심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