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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an 05. 2024

문을 열었더니, 이불을 개고 있었다

확실하다. 이 아이는 내 족속이 아니다.

부모에게 '나를 닮은 자식'이란 어떤 의미일까?

그리고 '나와 닮은 구석이라곤 없는 자식'은?


나는 얼굴도 성정도 엄마를 닮았는데, 외탁했다며 친가 식구들이 수군댈 때 묘하게 따돌림받는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나에겐 엄마에게 없는 강점과 재능이 (당연히) 있었는데, 엄마가 특별히 기뻐하고 감탄한다는 걸 알았다.

아빠는 (자신과 똑 닮은) 동생을 끼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그건 어느 정도 동생의 무던한 성격과 막내를 대하는 아빠의 편한 마음 때문인데, 자라면서는 나를 보는 아빠의 데면데면한 눈빛에 자주 서늘해지곤 했다. 아빠를 닮지 않아서 그렇다고, 그건 내 잘못이 아닌 걸, 서운했다가 변명했다가 끝내는 냉정해졌다.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생명이 내 몸 안에 생겨났다는 걸 알았을 때, 전율이 훑고 갔다. 여러 가지 마음과 생각이 한꺼번에 들기도 하고 차근차근 찾아오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이 아이는 대체 어떤 아이일까, 어떻게 생겼을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그야말로 가슴이 두근댔다. 반은 나, 반은 남편으로 구성될 게 확실한데도, 그 조합이 어떨까... 그것은 잠을 설치게 하기에 충분한 상상이었다.


하지만, 이랬으면 좋겠다, 저랬으면 좋겠다, 구체적으로 원하지 않았다. 새 학기를 맞이하며 만나는 담임선생님이나, 회사의 상사, 블라인드 데이트 상대가 아니니까. 서로에 대한 어떤 선택권, 실제로 퇴짜를 놓거나 적어도 싫어하거나 아니면 욕이라도 할, 그럴 자유가 없었으니까. 아이는 아무것도 따지지 않고 내게 왔고, 덕분에 우리는 맺어졌다. 나도 아무것도 따지면 안 되지. 내게는 그런 권한도 없고, 그럴 염치도 없었다.


딸 혹은 아들이었으면 좋겠다, 예뻤으면/잘 생겼으면 좋겠다, 키가 컸으면 좋겠다, 똑똑했으면 좋겠다, 순했으면 좋겠다... 그런 마음이 스치기라도 할라 치면, 못 볼 것을 본 것처럼 서둘러 진압했다. 기원하듯 바라는 것 이상으로, 이렇지 않으면 실망할 텐데, 하는 마음이 들지 않도록 경계했다. 아이가 알 것 같았다.


그럼에도, 아주아주 조금은, 아무도 모를 만큼 희미하게, 나는 사실 나보다는 남편을 닮기를 바랐다. 나도 아직 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으니까. 그런 채로 나를 닮은 아이를 감당하는 것이, 지키고 돕는 것이 가능한 일인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를 닮은 아이가 당첨됐다. 외모가 문제가 아니었다. 불안도가 높았고, 예민했다. 어쩔 수 없이 까다로웠다.

깨면서부터 비명을 지르며 울었고, 조금만 불편하고 뭔가 맞지 않으면(그렇게 짐작할 수밖에) 자지러지듯 울었다. 아주아주 오래. 달래고 진정시키는 것은 대체로 불가능한 일처럼 다가왔다. 겨우 그 '미션 임파서블'을 수행하고 나면, 나는 혼이 나가 있었다.

그런 일을 하루에 여러 번 치르고, 그런 나날을 몇 달 보내면, 나에 대해서나 삶에 대해서 사뭇 다른 감각을 지니게 된다.


그래도 나는, 일생일대의 미션처럼 최선을 다했다. 모유를 주는 일에도, 잠을 재우는 일에도, 눈을 맞추며 말을 걸고 손목에 병이 생기도록 안아주는 일에도. 그렇게 안정감을 주는 것이 내게 온 아이를 사랑하는 길이라 여겼다.

그리고 한편으론 나를 위로하는 일이기도 했다. 도대체 뭐가 불안하냐고, 왜 이렇게 예민하고 까다롭게 구느냐고 타박받는 대신, '나도 이렇게 사랑받고 싶었어' 그런 마음이었다.


덕분에 아이는 차차 내 품에서 평온해졌고, 내가 보이지 않아도(화장실에 가거나 요리를 하거나 할 때도) 남편과 잘 놀았다. 울지 않고 깼고, 울지 않고 목욕했다. (꽤 오래 걸렸지만, 결국) 울지 않고 잠들었다.


하지만 정성을 다하고 뿌듯했던 만큼이나 진이 빠졌었나 보다.





둘째가 생기고 나는 태명을 '고평'('고요하고 평온하게'. 시편 131:2에서 따온 말)으로 지었다. 여전히 첫째에게 온 신경을 쓰며 지냈기 때문에, 태명은 입 밖으로 소리 내어 한 번도 불러보지 못했지만, 이름에 그런 바람을 담을 정도로 그 시절 최대 염원이었나 보다.


첫째 임신 때는 이불도 들지 않았는데, 둘째는 초기 때도 만삭 때도 첫째를 안고 업었다. 그런데도 둘째는 유산의 조짐이나 배뭉침 같은 일도 없이 잘 컸다. 입덧의 폭풍이 지나간 후로, 예정일보다 열흘 먼저 나온 것 말고는 신경 쓰이게 한 일이 없었다. (그랬기 때문에 첫째만 신경 쓸 수 있었겠지만)


작아서 출산도 수월했다. 첫째가 터를 닦아놓아서 모유수유도 가뿐했다. 심지어 해가 지면 잠들고, 해가 뜨면 일어났다. 밤에도 한두 번밖에 깨지 않았다. 울기는 했지만, 횟수, 성량, 반응속도, 달래지기까지 드는 시간과 에너지 모두, 첫째의 만 분의 1도 되지 않았다. 재울 때 서비스가 필요했지만, 역시 금방이었다. 첫째는 재우기를 포기했었던 친정엄마가 둘째를 두고는 이렇게 말했다. "얘는 곰 세 마리 열 번만 부르면 자." 


나는 정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다.


첫째 때 극심하게 고생했으니 반동처럼 주어진 복 같기도 했고, 설마 태명 덕분인가 의심하기도 했다. 아니면 임신 내내 오만 근심걱정들에 휩싸이는 대신 임신은 잊고 첫째를 사랑할 일만 생각했던 게 일종의 태교였던 건가 싶기도 했고, 그것도 아니면 엄마로서 (첫 아이 때와 비교도 안 되게) 숙련된 손길 때문인가 의아했다.

어쨌건 간에 나는 감사했다. 좋았다. 편했다.  


어느 날은, 첫째를 어린이집에 보내놓고 안방 침대에 뻗었다. 한참 멍 때리고 있다가, 아 참, 둘째는 뭐 하고 있지? 싶어서 거실로 나왔다. 범보의자에 앉혀 두었었는데, 그대로 앉아서 옆에 있는 장난감 바구니를 뒤적뒤적하고 있었다. 그러다 하나 잡아 놀더니 던지고, 또 뒤적뒤적. 나는 우와, 감탄했다.


첫째는 그때까지 한 번도 혼자 두지 않았다. 그렇게 두면 큰일 났었기 때문에, 그러면 안 되는 줄 알았다. 화장실 가거나 식사를 하거나 할 때 아이 발달에 맞춘 '집중할 거리'(모빌, 보행기, 아기체육관 등)를 세팅해두고 후다닥 일을 치르고 왔다. 쉴 새 없이 말을 걸고 내 손길과 온기를 느끼게 해줘야 했다.


그런데 저러고 혼자 놀다니. 나는 나에게서 이런 아이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 자체에 놀랐고, 좀 이상하지만 뿌듯했다. 배 속에서도 나와서도 아무것도 해주지 못했는데, 또 불운하기도 했는데(태어나기 직전에 시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셨다. 남편이 크게 흔들렸고, 나도 어려웠고, 집 안 분위기 전체가 어수선했다), 이렇게 잘 커주다니. 미안하고 고마웠다.

아이를 키우는 일이, 아이와 함께 있는 시간이 '치유의 시간'이었다.


(아이가 돌 때쯤 '계란 알러지'가 있다는 걸 알면서, 이런 편하고 쉬운 육아는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다른 글에 쓰겠다.)





둘째가 마냥 둥글둥글, 순둥순둥 하진 않았다.

이를테면, 어쩌다 한 번 울면 정말 서럽게 오래도록 울었다. 나는 이 아이가 이런다면 그럴 만한 거라고 여기고, 성심성의껏 들어주었다. (보통 첫째를 혼내는 결과...)

또 싫은 게 바로 드러나지 않고, 싫다고 표현하기까지 오래 걸리지만, 한번 안 한다 하면 고집이 보통이 아니었다. 꼬임도 설득도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도끼눈을 하고, 매를 들고 "셋 셀 거야. 하나, 둘, ... ㅅ"을 해도 눈치도 안 보고 미동도 없이 통곡을 했다. (그럼 내가 세 살짜리에게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겠는가?)

길을 가다 (어떤 이유로) 멈춘 아이에게 "엄마는 갈 거야." 단호하게 말하고 뒤돌아보지 않고 한참을 가도 따라오지 않았다. 담이 큰 건가? 앞뒤를 재지 않는 건가? 담도 작고 앞뒤를 재는 나는 결국 되돌아가서 그 자리에 그대로 앉아 우는 아이를 들고 와야 했다. (어쩌겠는가?)


그래도 이런 일은 아주 드물었고, 얘도 사람이니 뭔가 수 틀리는 일도 있겠지, 싶어서 크게 거슬리진 않았다. 여전히 이쁘고 사랑스러웠다. 시어머니는 언젠가, 내가 둘째를 대하는 걸 보고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다고 지나가듯 말했다. "아무리 자기 애지만, 저렇게 이뻐하나..."


셋째가 생겼을 때, 둘째를 보면서 나는 또 한없이 아리고 애틋해졌다. 너는 동생이 없으면... 영 혼날 일이 없을 텐데. 진심이었다. 그리고, 그 말이 암시하는 일도 진짜 현실이 되었다. 동생이 생기면, 엄마의 한계가 아이에게 훌쩍 닿아버리는 걸까.





둘째가 아마 다섯 살인가 그랬다. 방에서 아이를 혼내고 나왔는데, 한참 아이가 나오지 않았다. 우는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왜 나오지 않지? 무슨 일이지?


방문 앞에서 기웃대다, 문을 열었다. 그런데 아이가... 이불을 개고 있었다.

아니, 이불을... 개다니... 다섯 살짜리가... 왜?


그때까지 아이에게 이불을 개라고 무슨 교육을 시킨 적도 없었다. 이불 개는 모습을 그다지 많이 보여줬다고 할 수도 없었다. (나는 침대 이불을 안 개고 산다... 주말에 남편이 청소하면서 갠다...)


어안이 벙벙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내게, 둘째는 눈물을 닦은 말끔한 얼굴로 "엄마, 내가 이불 갰어." 뭐 그런 말을 했다.

나는 벼락같이 깨달았다.  



이 아이는 나와 다른 족속이구나.






온 가족이 보드게임을 하면, 남편처럼 둘째는, 영... 이기려는 건지 뭐 하는 건지 모를 전략을 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막내가 힘들다고 울면, 나는 "씩씩하게 걷는 거야" 말하고, 둘째는 "에이, 엄마, 그냥 내가 업어줄게." 하고 동생을 업어줬다.

나와 나를 닮은 첫째가 날 선 말들과 퉁명스런 태도로 집 안의 분위기를 몰아갈 때, '좋은 가족이 되고 싶다'며 엉엉 울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우리 집에 나를 닮지 않은 '이런 아이'가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안도했다.


그런가 하면, 둘째는 내가 입으라고 꺼내놓은 옷을 퇴짜 놓기 일쑤였다. 뭐라고 이유를 말하는데, 나로선 일관적이지도 합리적이지도 않았다. (그렇게 까다로웠던 첫째는 아무거나 던져주는 대로 입는 아이가 되었다.) 말했다시피, 절대로,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입지 않겠다고 한 옷은 입지 않았다.

새로운 시도를 두려워했다. 엄청 대단한, 특별한 시도가 아니라, 나로서는 '이걸 왜?' 싶은 그런 정도의 '새로운' '시도'였다. 다른 놀이터에 가는 것, 방과후수업이나 학원에 새로 등록하는 것, 어떤 행사에 (혼자서도 아니고 온 가족이) 참여하는 것 등등. (참고로, 첫째는 늘 같은 것보다 뭔가 새로운 시도를 좋아하는 아이고, 셋째는 뭐든 '하는' 걸 좋아한다) 말했다시피, 꼬임도 설득도 협박도 통하지 않았다. 사소한 일에, 예상치 않은 상황에, 진행이 턱턱 막힐 때마다 피곤했다.

언니나 동생과 갈등이 있거나 나에게 혼나고 나서 한번 울음이 터지면, 달래거나 진정시키는 게 어려웠다. 그동안 쌓인 게 많았구나... 이해하는 것과 별개로, 내가 해주는 어떤 공감도 위로도, 혹은 제재도 통하지 않는 게 힘들었다.


언젠가부터 나는, 남편에게, 그리고 마음을 터놓는 사람들을 만날 때마다, 둘째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내가 이 아이를 제대로 사랑하지 못하는 것 같아. 내 사랑이 통하지 않는 것 같아. 나중에 큰일 날 것 같아.





자라면서 엄마나 아빠, 언니는 마음껏 미워하고 비판했다. 그런데 동생에겐 마음이 달랐다. 싸우고 나면, 상처를 입히고 나면, 나는 속상했다. 이런 일이 또 벌어지지 않으려면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 생각했다. 특별히 내가 어른스러운, 좋은 언니가 아니었는데도 (사실 그 반대에 가까웠다) 그랬다.

'동생'이란 존재는 '자기 수양'을 위해 필요한 건가, 생각했었다.


자식은, 그런 의미에서 '확장판'이자 '심화편', '최고위과정' 그쯤 되는 것 같다.

내가 고르지 않은 아이를, 나는 사랑하기로 이미, 벌써 결심했고, 나는 물릴 생각이 없다.


나와 닮지 않았고, 내 예상을 벗어나고, 내가 이해하기 어렵고, 내 말도 내 사랑도 통하지 않는 아이를 사랑하는 일이, 남은 삶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될지도 모르겠다는 짐작도 해본다. 그런 생각을 할 땐 전혀 웃을 수가 없다.


하지만, 바로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아이가 내게 주었던 기쁨, 치유, 경이로움을 기억한다. 그리고 낮아지는 마음과 기꺼이 바뀌겠다는 의지까지, 나 같은 사람이 받아들였던 기적을.


너는 어떤 어른으로 자랄까. 우리는 어떤 관계가 될까. 어떤 얼굴로, 어떤 눈빛으로 서로를 대하게 될까.

그런 생각을 할 때면, 아이를 처음 품었을 때보다 더 가슴이 두근댄다.  


엄마는 너를 보면, 너와 같이 있으면 평온해졌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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