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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an 12. 2024

너의 비행기를 되돌릴 수 있다면

좋은 엄마는 되고 싶고, 깜냥은 안 되고

딸을 한 사람으로부터 지켜주지 못했는데, 그 사람이 바로 나였다.

/ 앤절린 밀러, <나는 내가 좋은 엄마인 줄 알았습니다>


'내가 아니어도 돼'와 '이건 내가 잘하지'의 결정이 빨라질 때, 가당찮게 품고 있던 욕망과, 그 욕망에서 기원한 긴장이 수그러든다.

허지원 외, <잠 못 드는 당신을 위한 밤의 심리학>



첫째는 내가 봐도 힘들어 보였다.


둘째 출산을 두 달 앞두고, 우리는 남편 회사 가까이로 이사했다(두 시간 거리에서 한 시간 거리라는 게 함정).

친정과 시댁과 멀어졌고, 6년 다닌 교회를 떠났다. 남편 하나 보고 내린 결정이었다. 날마다, 밤마다 함께 있는 남편이 육아에 더 중요하니까.

아무런 연고가 없는 곳이었다. 한 번도 발 디딘 적 없고, 아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도시였다.

아이도, 나도 새로운 환경에 적응해야 했다.


그 무렵 갑자기 시아버지가 쓰러지셨고, 한 달간 중환자실에 계시다 돌아가셨다.

말 그대로 너무나 갑작스러운 일이었고, 모두에게 너무 힘든 시간이었다. 시어머니와 남편은 거의 무너졌다.

나는 출산을 앞두고 더 불안정한 상태가 됐다. 의지할 데가 없었다. 물리적으로 정서적으로 첫째와 둘만 남았다.

아이도, 나도 이 상황을 견뎌야 했다.  


둘째가 나왔다. 순한 아이였지만 갓난아기와 30개월 첫째를 온종일 혼자 돌보는 일은 쉽지 않았다.

처음으로 첫째에게 소리를 지르며 화를 냈고, 동생을 해코지 한 그대로 내 손으로 첫째를 벌 주기도 했다.

육아의 암흑기였다. 그러면서도 만 3세까지는 옆에 끼고 있겠다는 내 고집에 남편과 다투는 날이 많았다.

아이도, 나도 날마다 좌절했고 날마다 울었다.


36개월이 되던 이듬해 3월에 첫째는 어린이집에 다니게 됐다.

고르고 고른 '좋은' 어린이집은 셔틀버스를 타고 20분을 가야 했다.

아이는 처음으로 엄마와 떨어져서, 커다란 차를 타고, '사회'에 들어갔다.

아이가 언젠가는 겪어야 할 일이었다. 나에게도 미룰 일이 아니었다.


6개월 사이에 일어난 변화였다. 어느 것 하나도 서너 살 아이에게 호락호락한 일이 아니었다.


첫째가 어린이집에 가고 둘째랑 둘만 남으면, 한참을 멍하니 앉아, 어제 제대로 놀아주진 못하고 첫째를 혼낸 일, 오늘 셔틀 시간에 늦지 않기 위해 닦달한 일을 떠올리며 괴로워했다.

퀭한 눈으로 하이에나처럼 만회할 길을 찾다가, 이런 경우 첫째와 둘만의 시간을 가지라는 말을 보았다.





'둘만의 시간'을 갖는 것은 요즘도 세 명의 각 아이들과 때때로 하는 일이다. 지금은 그게 그다지 어렵지 않다. 시간을 마련하는 것도, 무얼 할까 일정을 짜는 것도, 나머지 아이들에게 설명하는 것도.


하지만 그땐, 젖먹이 둘째를 두고 첫째와 따로 나가는 것이 너무 어렵고 거대한 일처럼 느껴졌다. 그랬기 때문에 더더욱 비장한 마음이 되었다.

여러 가지를 따져 날을 잡고, 친정엄마나 시어머니를 모셔오고, 평소 하지 않던 유축을 해놓고, 무엇보다 아주 특별한 기억을 만들어줘야겠다는 일념으로 한참 검색을 하고, 마침내 어딘가 예약을 했다.


그러니까, 시간 없고 가난한 연인이 된 것처럼, 짬이 나는 대로 손을 꼭 잡고 산책하면 될 것을, 그러다 아이스크림 하나씩 잡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눈을 바라보면 될 것을, 시시껍절한 이야기를 하고 배를 잡고 웃으면 될 것을,

통장을 털고 빚을 내서, 스포츠카를 렌트하고, 풍선을 달고, 꽃다발을 사고, 다이아몬드 반지를 준비하고, 레스토랑을 대관하고...

뭐 그런 태세였던 것이다. 그렇게 단 한 번으로 사랑하는 일을 완성할 것처럼.


그러니 나는 어깨에 힘이 너무 들어가서, 아이가 오기 전부터 마음이 바빴고, 그렇게 마련한 시간에 흠이라도 생길까 노심초사했고, 아이가 완전히, 최고로 만족하기를 바라마지 않았다.





그렇게 '성대한' 날 중 하나다.

친정엄마가 오셨고, 앤서니 브라운의 그림책을 원작으로 한 어린이뮤지컬을 예약했다. 둘째의 이유식을 정성껏 만들어놓고, 유축을 해두었다. 첫째를 위해 준비한 간식 등을 챙겨 아이가 어린이집에서 돌아오면 나설 예정이었다.


그날 첫째는 어린이집에서 비행기를 만들어왔다. 종이비행기가 아니라 커다란 나뭇대에 천을 댄, 연처럼 생긴 비행기를 천사의 날개인 양 어깨에 매달고 왔다. 그리고 그걸 그대로 하고 가겠다고 우겼다. (우리는 버스와 지하철을 타고 갈 예정이었다) 그걸? 거추장스럽고 조악할 뿐인 장난감을? 게다가 커서 가방에도 안 들어가는데? 너는 분명 금방 흥미가 떨어질 거고, 그럼 내가 계속 들고 다녀야 할 텐데?


지금 나의 막내가 그러겠다고 하면, 네 살이 아니라 여덟 살이지만, "그래, 그러든지" 할 것이다. '아무리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겠지' 직관적인 확신에, '저러고 싶겠지' 하는 약간의 연민과 이해, '그러거나 말거나...' 대체로 그런 심정으로. '대충 들고 다니지 뭐. 너랑 아웅다웅할 걸 생각하니 피곤하다, 피곤해.' 가뿐하게 그렇게 넘어갔을 것이다.


하지만 그때는 왜 그렇게 꽉 막혔던 걸까. 왜 그렇게 팍팍했을까.

한참을 그건 두고 가자고 설득했고("그건 너무 크고 끝이 뾰족해서 사람 많은 곳에서 다른 사람을 찌를 수 있어. 봐, 엄마 가방에도 안 들어가잖아. 그리고 분명 너는 금방 안 하고 싶다고 할 거야"), 설득이 통하지 않아서 화가 났고, 이러다가는 늦겠고, 억지로 빼서 두고 가자니 시작부터 아이가 울겠고... 이를 물고 타협안을 냈다. "그럼 계속 네가 매고 다녀. 이건 엄마 가방에 들어가지도 않고, 엄마는 절대 들어주지 않을 거야."  


당연히 아이는 그러겠다고 대답했고, 물론 나의 예상은 맞았다. 30분도 지나지 않아서, 공연장에 도착하기도 전에 비행기는 내 손에 들려졌다.


만약 지금 나의 막내와 그런 상황을 맞이했다면, "요놈아, 그 봐라, 엄마 말이 맞지!" 하고 말았을 것이다. 속으로 쿡쿡, 웃기도 하면서.


하지만 그때는...


나는 아이를 불러 세웠다. 지하철 플랫폼이었다. 나는 울화를 꿍꿍 눌러 담은 목소리로, 하지만 아이를 가르친다는 확신으로 말했다.




봐. 엄마 말이 맞았지?
엄마가 이거 금방 안 하고 싶을 거랬지?
사람이 많은 곳이라 이걸 들고 다닐 수는 없어.
그러니까 이건 버린다.




그리고 정말 쓰레기통에 버렸다. 길어서 잘 들어가지 않아, 나뭇대를 딱, 부러뜨려서. 아이 눈앞에서, '단호하게'. ('단호하라'는 건 또 어디서 주워듣고 와서...)


아이는 나를 막지도 못하고, 아무 말도 못하고, 그대로 있었다.





그날 사진엔, 공연장 앞에서 찍은 사진, 공연이 끝나고 무대 위에서 배우들과 찍은 사진, 둘이서 먹은 저녁식사 사진... 그렇게 웃으며, 행복한 하루를 보낸 것처럼 남아 있다.


하지만 내 기억엔 비행기를 보란 듯이 부러뜨리던 내 손과 그때 아이의 당황한, 표현하지 못한 비명이 서린 얼굴만 남았다. 그 사진을 보면서 나는, 거기에 찍힌 아이와 나의 웃음에서, 첫째만을 위해 마련한 특별한 날이니 즐거워야 한다는, 웃어야 한다는, 그것으로 어떤 슬픔과 힘듦과 혼란은 잊고 가려야 한다는 애씀과 어색함을 기필코 찾아낸다.


아이는 아마, 그날의 공연도, 자신의 비행기도 거의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공연이야 사진을 보면, 어떤 단상은 남아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엄마가 자신의 장난감을 지하철 쓰레기통에 버렸다는 (그것도 부러뜨려서) 기억은 잊었더라도, 그날 엄마 때문에 뭔가 속상했었다는 기억조차 없을지라도, 막무가내로 굴다가 즐거움이 부러뜨려진 놀람과 아픔은 어딘가에 분명히 남았을 것이다.

그게 무엇 때문인지, 누구 때문이었는지 알 수 없는 채로.





아이의 사진을 갓난아기 때부터 쭉 보다 보면, 어느 순간 아이의 얼굴에서 대책 없는 웃음이 거두어졌다는 걸 깨닫는다. 그 시기, 그와 비슷한 일들로 내가 아이에게서 어떤 해맑음을 베어버렸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가만 돌아보면, 내가 아이에게 주려고 했던 것은, '공연 관람'의 경험도, '엄마와 둘만의 시간' 자체도 아니었다.

익숙했던 행복을 잠깐이라도 다시 누리는 시간을 통해, 너를 둘러싼 세계가 달라진 것 같아도, 너를 여전히 사랑하는 엄마가 이렇게 그대로 있으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안정감을 가져도 괜찮다고 속삭여주고 싶었다. 그런 따스함은, 그런 편안함은 영혼에 스며드니까.


하지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았다. (원하는 대로 되기는커녕...)

아이를 사랑하는 마음으로,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의지로, 그럴 수 있는 길과 방법과 기술을 공부하는 것으로 되지 않았다. 다른 많은 일처럼.

내 깜냥이 되지 않았다.


아이에게 무언가 특별히 잘해주는 것보다, 특별히 잘못하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말을 들었을 때 나는 내가 했던 많은 일을 떠올렸다. 못해준 게 많으니까 더 잘해주려고, 기회를 놓치면 안 되는 것처럼 호시탐탐 애썼던 것과, 그럴수록 초라해진 여력으로 잘못한 일을 착실하게 쌓아갔던 것, 그러면 또 못해준 걸 만회하려고...


나태주의 시처럼, 날마다 간구의 첫 번째 이름도, 참회의 첫 번째 이름도 첫째 아이였는데, 이루어지는 것도 없이, 눈물만 많아졌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눈치도 못 챘다.


조금이라도 감을 잡은 것은, 아이를 둘이나 더 낳고, 우울증으로 날마다 갱신되는 바닥을 치고… 치고… 또 치고 나서였다.


아무리 소중하고 아무리 사랑해도, 아무리 누가 이러저러해야 한다고 알려주고 그게 좋아 보인다 한들, 내 것이 아닌 것은 줄 수 없었다.


가당찮은 욕망을 털어버리고, 그걸 붙들고 애쓰느라 나를 짓누른 긴장에서 벗어나고 보면, 내가 줄 사랑은 사실 작지도, 초라하지도 않았다.

사랑은 언제나… 그럴 리가 없다.


둘째가 잠들었거나 혼자 놀 때, 첫째 아이를 품에 안고 이불 속에서 뒹굴걸. 오랜만에 업어줄걸. 머리를 다시 묶어주고 서랍을 통째로 꺼내와 패션쇼를 할걸. 셋이 집앞에 나가 (둘째는 유모차에 앉혀놓고) 꽃반지를 만들고 비눗방울이나 불고 올걸. 오는 길에 아이스크림 하나씩 입에 물고.


그 정도로 충분했는데. 너에게도 나에게도.

그 정도는 충분히 할 수 있었는데.




너의 비행기를 되돌릴 수 있다면, 너의 해맑음도 돌아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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