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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Jan 19. 2024

'이건 중요하지 않아'

뚝, 가벼운 소리에 어떤 스위치가 켜졌다.

어딜 가나 할 일이 있었다. 아이가 생기고 달라진 일상 중 하나였다.


기저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나면, 택배상자가 그대로인 걸 발견한다. 내용물(아이 간식이라 하자)을 일단 빼놓고 상자를 다용도실에 가져다 놓으면, 빨랫감이 쌓여 있는 게 보인다. 세탁기를 돌리고 주방으로 나와 보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김가루와 밥풀이 눈에 띈다. 닦으려고 물티슈를 뽑으면, 이게 마지막 통이라는 걸 깨닫는다. 물티슈를 주문하려다, 휴지는 얼마나 남았더라? 화장실에 가보면, 수건이 젖어 있고 비누가 떨어져 있고 목욕장난감이 널브러져 있다. 목욕장난감을 정리하고 비누를 올려놓고 젖은 수건을 빨래통에 넣으러 다시 다용도실에 가다가, 아까 빼놓은 아이 간식이 보이고...


청소, 빨래, 요리, 설거지. 가사는 그 정도인 줄 알았는데, 그 안에 넣을 수 없는, 이름 붙일 수 없는, 자잘한 일들이 내가 가는 길마다 늘어서 있었다. 어디서 시작해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루에 몇 바퀴를 왔다갔다해도 끝나지 않았다. 거참, 신기했다.


이름도 없는, 소소한 일이니까, 힘든 일도 아니니까, 보이는 대로 생각날 때마다 하나씩 한다. 로봇이 된 것 같다. 해야 할 일이 소리 없이 나를 부르고, 하기로 한 일이 겹겹이 쌓이는데, 이것들은 모두 곁가지. 아이가 나를 찾는다. 아이가 우는 소리가 들리고, 마음이 바빠진다. 나는 사람을 키우는 사람이었지, 깨닫는다.





원래 나는 작고 덜 중요한 일부터 했다. 후딱후딱 해치우고, 그렇게 확보한 남은 시간 동안, 잡념을 떨치고 집중해서 크고 중요한 일을 했다. 학생일 때 공부를 그렇게 했고, 회사 다닐 때 일을 그렇게 했다. 결혼하고 나서도 아내로서 내 몫의 가사를 그런 식으로 했다. 그렇게 해서 생긴 '여가'에 친구를 만나고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미래에 대한 고민을 했다.


그런데, 아이가 생기고 그런 식으로 했더니, ‘남는 시간’이 없었다. 생명체가 하나 더해지고 생겨난 급격한 변화가 처음엔 일시적인, 비상시의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딴생각할 겨를도 없이, 매진했다.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갈 줄 알았으나, 내가 탄 열차는 점점 더 빨라지는 것만 같았다. 이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하는 걸까, 인정할까 말까 하는 사이, 아이가 하나 더, 그리고 또 하나 더 찾아왔다.


그 무렵 <선녀와 나무꾼> 이야기를 떠올리는 밤이 많았다. 아이가 셋이 되면, 엄마는 예전에 살던 모습으로는 절대로 살 수 없겠구나. 그때처럼은 절대 살 수가 없는 거야. (나는 엄마가 되기 전 입던 옷들을 그제야 버렸다.)


자잘한 일을 하고 나서 중요한 일을 하려 한다면, 그 일은 영원히 할 수 없을 것이었다. 짐이 늘어나 집 안에 물리적 틈이 없는 것처럼 확실한 사실이었다. 아무리 쓸 만한 물건도 부피가 크다는 이유로 버려야 했고, 아무리 애정과 추억이 가득한 물건도 현재진행형으로 쌓이는 애정과 추억에 자리를 내줘야 했다.


나에겐, 시간의 틈이 없었다. 하고 싶고, 해야 하는 많은 일들이 미뤄지고, 잊혀지고, 내팽개쳐졌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생각하면 가볍고 하찮을 뿐인 일들도 얼마나 어렵고 번잡하게 느껴졌는지.


비가 쏟아지는 등하원길. 막내를 아기띠로 안은 채 우산을 쓰고, 둘째의 우산을 잡아주면서, 물웅덩이에서 장난치는 첫째를 부르며 목적지에 도착하는 일.

거의 매일 가는 놀이터. 자꾸만 시야에서 벗어나는 첫째를 눈으로 쫓으며 둘째의 그네를 밀어주고, 유모차에서 찡얼대는 셋째를 꺼내 걸음마를 시켜주면서 둘째가 미끄럼틀에서 위험하지 않은지 살피다 첫째를 찾는 일.

장을 볼 때, 저마다 관심 있는 것들 앞에 멈춰 서서 몇 번이나 발이 묶였다가, 사라진 아이를 찾다가, 사려고 했던 것과 사려고 하지 않았던 것들을 사서 돌아오는 일.

아이가 아파서 병원에 가면, 아픈 아이와 아프지 않은 아이에게 간식도 먹이고 책도 읽어주고 화장실에 데리고 가 응가도 닦아주면서,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마냥 기다리던 일.

어쩌다 외식하는 날. 아기의자와 아이 식기와 앞접시와 가위를 부탁하고, 뜨거운 것들을 조심시키며 자르고 덜어주고, 조용히 시키며 먹이고, 무언가 떨어뜨리면 식탁 밑으로 몸을 수그려 줍고, 무언가 엎지르면 식탁 위와 식탁 밑을 닦고, 주인과 주위 손님에게 여러 번 사과를 하는 일.


눈이 열 개, 손이 열 개여도 모자라서, 내가 갈기갈기 갈라지던 나날.

순간적으로 일어난 일을 순식간에 해결하지 않으면 일이 몇 배나 커져서, 늘 신경을 곤두세우고 아이들에게 날이 서 있던 하루하루.





안경을 새로 맞췄었다. 좁은 안경점에서 남편이 세 아이들을 안고 끼고 조심시키고 조용히 시키는 동안, 시력검사를 하고 안경테를 골랐다. 휴. 해야 할 일을 하나 해치웠다, 하고 돌아왔다.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안경테가 부러졌다. 가는 뿔테였는데, 급히 안경을 닦다가 부러졌다.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안경점에 가서 안경테를 맡기고, 새로 돈을 지불하고, 며칠 기다렸다.


그렇게 다시 받은 새 안경을 쓰고 일주일도 지나지 않은 어느 날. 한 번 그런 일이 있었으니, 조심한다고 했는데, 또 (급히 닦다가) 안경테가 부러졌다. 뚝.


뱃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끓어올랐다. 뒷목을 타고 뜨거운 게 올라왔다. 콧김이 뿜어지는 것 같았고, 머리통에서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는 게 느껴졌다.


나는 너무 바쁜데, 할 일이 얼마나 많은데, 몸이 열 개라도 모자란데, 시간도 없는데, 또...! 거기까지 애들을 데리고 또...! 으으으...


쌓였던, 뭉쳤던, 짓눌렀던 무언가가 폭발할 것 같았다. '뚝' 하는 그 가벼운 소리가 어떤 스위치를 켜는 소리라도 된 듯이.


나는 눈을 감았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이 순간, 나는 꽥, 포효할 수도 있었다. 아무에게나, 보이는 것에 내 멋대로 이름을 붙여, 화낼 이유를 삼을 수도 있었다.


하지만 어쩌다 그렇게 된 건지 모르겠는데, 나는 말했다.




이건 중요하지 않아.




이건 정말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귀찮은 일이 벌어졌지만, 이건 내 일상에, 내 인생에 너무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도를 1부터 100까지 매긴다면 1도 되지 않는 일. 1부터 1000, 아니 1부터 1억까지 범위를 잡아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까, 나는 여기서 흔들리면 안 되는 거였다.





익힌 파스타면을 채반에 건져냈을 때처럼 찬찬히 열기가 식었다. 더 이상 끓어오를 수는 없었지만, 금방 차가워지는 것도 아니었다. 그대로 두면 저 안 어딘가는 꽤 오랫동안 뜨거운 채로 남을 것이었다.


하지만, 터져버릴 것 같던 순간 길게 숨을 내쉰 나는, 그 순간을 '격변'으로 기억한다. 그리고 꽤 상쾌했다고.





최근에 셋째 친구의 엄마에게 '벌새'란 소리를 들었다. 함께 전시관에 갔다가, 아이들이 보이지 않아서 한참 찾았고(나 혼자), 다 함께 식당으로 이동하다 또 안 보여서 "OO야!!" 하고 모두가 놀랄 만큼 크게 소리쳤던 것이다(바로 옆에 있었다).


나를 제대로 보았다고 생각했다. 1초에 수십 번 날갯짓하는 벌새처럼, 끊임없이 주위를 살피고 무슨 일이 생길까 조마조마하는 상태로 있는 것이다. 셋째를 키우느라 많이, 말할 수 없이 많이 느긋해졌는데도, 이렇게 간파당하고 말았다.


육아하면서 겪은 어려움, 괴로움, 막막함, 그리고 기진맥진함 등은 어쩌면 내가 이런 사람이어서 더 많이, 더 심하게 경험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하지만 내가 이런 사람인 건 초기 설정값이었다. 바꿀 수도, 어쩔 수도 없는 일일 뻔했는데, 그나마 이만큼 무디어진 것에 스스로 경의를 표하곤 한다.


가끔 아이들이, 어른인 내 눈에 별거 아닌 일로 울고불고, 호들갑을 떨고, 화를 내고 분을 못 삭이고, 근심걱정에 잠을 못 이룰 때마다, 대체 별것도 아닌 일로 왜 그러냐고 핀잔을 주는 대신, 저러다 말겠지 무시하는 대신, 나는 묻는다.


"자, 아무것도 아닌 일이 0이야. 진짜 최고로 중요한 게 100이야. 그럼 이건 몇이나 돼?"


잠시 눈을 깜빡이며 생각하는 아이들의 얼굴에, 내 숨결을 살며시 맞대어 본다.



내가 이런 사람어서, 더 힘들었던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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