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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모도 헤도헨 Dec 15. 2023

외롭진 않은데 심심하다

뭐든 재미있게 하는 자가 승자


나는 심심하다는 골병이 들어 있었다.
엄마도 오빠도 심심함이 얼마나 깊숙이 나의 생기를 잠식하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다.

/ 박완서, <엄마의 말뚝 1>



아기가 태어나고, 한바탕 폭풍 같은 시간이 지나고, 드디어 평화가... 아니라, 낯선 일상이 찾아왔다.


집. 맑은 날 햇살이 들어오기도 하고, 흐린 기운이 들어차기도 하고. 고요하거나 음악이 있거나. 빨래를 널기도 하고. 내게 달라붙는 아이를 안았다가 요 앞에 나갔다 오기도 하고. 책을 읽어주기도 하고, 인형을 흔들어보기도 하고. 노래를 불러 재우기도 하고. 내 집에서 보는 이 아무도 없는데 가시방석에 앉은 듯 눈치 보며 후딱 밥 같은 걸 먹고. 아기가 깨는 소리에 하이톤으로 이름을 부르며 달려가 같이 뒹굴대다 사진을 찍고. 간혹 아이가 사부작대며 혼자 놀면 물끄러미 쳐다보다, 생각하곤 했다.


이 마음은 뭘까.





나를 꾸준히 찾으며 안부를 궁금해하는 건, 남편과 친정엄마였다.

내 일상의 흔적이라 할 만한 것들, 별거 없는 일정(병원에 가서 예방접종을 했다거나 조리원 동기모임을 했다거나)을 물어주고, 똑같은 아기의 사진(같은 배경과 각도로 수십 장... 가끔 수유나시 차림으로 아이와 누워 찍은 셀카도 있지만)에 감흥을 보여주고, 나의 기분(듣다 보면, 더 이상 새로운 거 하나 없는, 좁고 어두컴컴한 인생의 동굴로 끌려가는 듯한)을 듣고도 계속 연락을 취하는 것 역시 남편과 친정엄마뿐이었다.


그들 역시 비슷한 반응을 하고, 늘 같은 말을 했다.

그런 재미없는 통화라도 반가운 나날이었다.


어느 날은 한숨을 쉬면서 엄마에게 말했다.



외롭진 않은데, 심심하네...




엄마는 답했다. "아이고. 심심할 틈이 어딨어... 할 일 없고 심심하면 다행이지."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알았다. 엄마는 아빠의 역할까지 하면서 셋을 키워야 했으니까. 복에 겨운 말처럼 들릴 수 있겠구나, 싶었다. '복'까지는 아니어도, 너무 편해서 하는 말인가, 나도 그런 생각을 했다. 다시는 그런 말을 하지 않았다. 그냥 어떻게 어떻게 견뎠다. 얼마나 감사해, 얼마나 사랑스러워, 그런 마음을 곱씹으면서.


어떤 뭉텅이 여백의 시간이 내게 주어졌고, 그걸 어쩔 줄 몰라했다는 뜻이 아니다. 나는 늘 5분대기조 상태였고, 나의 세계는 어떤 계획다운 계획도 할 수 없는 쪼개진, 소소하지만 확실하지 않은 '짬'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파편은 모아도 어떻게도 엮이지 않았다. 내가 하는 일들은 이름도 없는, 이름 붙일 수도 없는 것들이었다.


하루는 무지하게 길고 일주일은 빨리 가는 역설처럼, 내가 살고 있는 삶은 설명하기 어려웠다. 분주하지만 헐거웠고, 짜치는 일들로 힘에 부쳤다. 행복한데 불행했다. 언제나 활짝 웃고 지내면서, 폭소는 사라졌다. 외롭진 않은데, 심심했다.


아이가 둘이 되고, 셋이 되었다. (어쩌자고 나는, 만 3세까지는 어린이집에 보내지 않고 끼고 있기로 했던가.) 이런저런 요령이 생기고, 아주 많은 것들을 포기하며 지냈는데도, 나는, (세 아이 모두 미취학아동이던 2년 동안 특히) 정신없이 바빴고, 어떤 '고요의 시간'도 없었다. (그래서 한밤 중에 잠을 자지 않고 그 시간을 만들다 우울증에 걸렸다는 슬픈 사연은 여기...)


그때, 깨달았다. '심심할 틈'이 없을 뿐 '심심하다'는 것을.

나는 외롭지 않은 것(제발 외롭고 싶었다)은 물론이고, 심심했다. 여전히.





내 옆에는, 아니 내 곁에, 내 품에 눈을 맞추고 같이 웃고 사랑을 나눌 존재가 있었다. 그래서 외롭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할 일도 많았다.

엄마 말대로 '심심할 틈'이 없었지만, 그래도, 모든 순간에, 때때로 사무치도록, 심심했다.


왜 육아는 재미있지 않았을까?


'재미'는 어떤 경우에 느낄 수 있을까?

내 마음대로 될 때. 그리고 망쳐도 될 때.

나는 이 두 가지가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를 키우면서 절대로 안 되는 두 가지가 있다면 바로 이것이다.


재미로 하는 게 바로 취미인데, 어떤 정신과의사가 '나이 들수록 취미가 있는 자가 승자'라고 했을 때 나는 격하게 동의했다. 그러니까, 나의 그 시절을 돌아보건대, '취미'를 사수했어야 했다고 후회하곤 한다.


공부하느라 일하느라 바쁠 때는, 학교나 회사에 속해 있어서 이래저래 사람들과 어울려 지낼 때는, '취미'가 없어도 재미있게 지낼 수 있다. 혼자만 있어도, 그냥 나 하고 싶은 거 아무거나 해도 재미있고 좋을 수 있다(위의 글처럼).


하지만 공간적으로 제약되고(감옥에 갇힌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친구다운 친구가 내 세계에서 거의 사라진 상태에서(나를 온전히 비추는 거울이었던 남편은 세상으로 난 아주 조그만 창이 되었다), 말이 통하지 않고 잘 알지 못하는 한 존재에게 모든 것을 맞추며 지낼 때(달리 어쩌겠는가? 이토록 무력한데. 게다가 사랑하는데) 시간은 흩어진다.

서서히, 웃음과 함께 생기도 사라지고, 기능적인 사람이 되어갈수록 영혼의 색채와 자아감도 잃어버린다.


내 취미는 책 읽기와 산책이었다. 그런데 아이와 함께 그림책을, 아이가 잘 땐 육아책만 열심히 읽었던 게 패착. 아이를 유모차에 태우고 한 시간이고 두 시간이고 동네를 산책했던 시간이 그나마 내 일상을 버티게 해주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막내가 세 살이 되었을 때, 동네책방에서 글모임을 시작하면서 나는 소생했다고 할 정도로 살아났다. 3년을, 2주에 한 번씩 글을 쓰고, 내 이름으로 사람을 만나면서 징검다리를 건너듯이 조금씩 나의 세계를 찾아나왔다.


그런 사람들을 안다. 아이랑 놀아주다가 아이가 까무룩 잠이 들면, 아니면 혼자 잘 노는 틈에, 바느질을 하던 사람(그러기 위해, 바느질 바구니를 늘 곁에 두고). 짬이 날 때마다 그림을 이어 그린 사람. 글을 쓴 사람. 요가를 한 사람. 공부를 하고 자격증을 딴 사람.


아이와 함께 그 시간을 '견디어내기만' 해도, 돌아보면 퀀텀 점프를 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식으로든 사람이 바뀌지 않을 리가 없는 시간이니까. 하지만 다시 돌아간다면, 사랑하는 딸이 엄마가 된다면, 견딘다고 느끼지 않도록, 스스로를 아예 잃어버리지 않도록, 이전보다 좁고 막힌 사람이 되지 않도록, 재미있는 것을 찾으라고, 취미의 성을 쌓으라고 말하겠다.


물론, (그게 가능하다면,) 육아 자체에서 재미를 찾을 수 있으면, 육아를 재미있게 할 수 있으면 더 좋고. 나야, 셋째를 키우다 끝물에야 비로소 이런 생각이 들었지만.

좀 마음대로 키울 걸, 마음 편하게 되는 대로 할 걸. 그런다고 안 망가지는데, 그래야 나도 웃고 아이도 웃을 텐데. 놀아주지 말고 같이 놀걸, 놀아주면서 나도 놀걸. 우리 다같이 심심하지 말고 재미있게 지낼걸. 계속계속.


네가 이러고 있을 때, 사진 한 장 딱 찍고, 나도 놀 걸 그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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