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당신들의 마음을 이해합니다
러닝을 시작하고 첫 반년 동안은 있던 옷을 입고 뛰었다. 필라테스를 시도했을 때 샀던 레깅스, 스판기가 있는 바지, 펄럭거리는 면 티셔츠, 십 년 전에 사둔 점퍼. 그걸로도 충분했다. 먼 거리를 뛰지 않았고 무엇보다 내 달리기는 겨울에 시작되었으니까.
하지만 여름이 찾아오니 달라졌다. 면 티셔츠와 바지가 몸에 달라붙었다. 보통의 브래지어 역시도 그랬다. 운동을 하고 나면 인간의 몸이 대부분 물로 이루어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다. 그게 내 몸뿐 아니라 옷도 모조리 적실 수 있다는 사실도.
기능성 의류를 만난 건 그즈음이었다. 면만을 고집하고 살아온 나에게 얄팍하고 맨질한 낯선(무려 폴리에스테르 100%라니) 소재의 옷은 내게 등산복을 떠오르게 했다. 하지만 확실히 다르다는 추천에 결국 스포츠웨어에 손을 뻗게 되었다. 반신반의하는 마음으로 산 저가 브랜드의 원플러스원 티셔츠를 처음 입고 뛴 날, ‘기능성’이 단지 단어만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땀이 났는데 달라붙지 않았다. 면 재질의 티셔츠를 입고 달린 나, 어쩌면 스스로에게 모래주머니를 채웠던 걸지도.
그때부터 내 옷장은 서서히 바뀌어갔다. 원래 패셔너블한 사람이 아니라 예산에서의 비중이 작았던, 책정해 둔 의류 구매비용은 자연스레 스포츠웨어에만 쓰이게 되었다. 누가 러닝을 비용이 안 드는 운동이라고 했던가. 맨몸으로 뛰려면 더 세밀한 장비가 필요했다. 햇빛을 막아줄 모자, 반팔로 해결되지 않는 더위에 입을 민소매티셔츠, 긴 바지, 짧은 바지, 얇은 바람막이, 그 위에 또 입을 바람막이, 패딩 베스트, 양말… 갖추다 보면 캘리포니아의 러너를 다시금 부러워하게 된다. 아 물론 어느 순간부터 티셔츠는 사지 않게 되었다. 각종 대회에 참가하다 보면 받게 되는 티셔츠가 오히려 멋지니까.
클라이밍은 또 어떻고. 여기야말로 ‘간지’가 중요하다. 등판의 프린트가 화려한 티셔츠는 기본이다. 다리를 쫙쫙 찢어야 하는 일이 생기므로 헐렁한 클라이밍 전용 바지가 무척 도움이 되니 두어 개쯤은 장만하게 된다. 그러다 보면 초크를 담아 다닐 파우치도 개성이 있으면 좋을 것 같다. 그럼 사야지 어쩌겠어. 그럼 또 클라이밍화도 바꾸고 싶다. 이 세계에도 나름의 아름다움이 존재함을(처음 클라이밍화를 보면 이게 뭔가 싶어 진다) 깨닫게 되었기 때문에.
근육이 생기고 살이 빠져 몸이 바뀌게 되니 스포티한 의복이 점점 더 어울리게 된다. 고프코어란 어쩌면 생체인들을 위한 유행일지도. 그렇게 지내다 보면 사회생활용 옷은 뒷전이 된다. 어느 순간 기능성 의류를 입고 출근하고 싶어 진다. 그러다 문득 깨닫는다. 알록달록한 등산복을 평소에도 입고 다니는, 나보다 연배가 높은 분들의 마음을… 가벼운데 겨울에는 따뜻하고 여름에는 시원한, 말 그대로 ‘기능성’ 의류가 정말 기능적으로 완벽하다는 사실을… 내가 입는 모든 옷에서 바삭바삭 소리가 나는 느낌은 과연… 느낌이기만 할까…?
하지만 다행히 등산복을 입고 출근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수행하는 운동이 늘어나며 이상하게 신발장이 가득 차게 되었다. 평소에 신을 신발은 없는데, 운동마다는 신발이 필요하니까. 신발장에 신발은 많은데 평소에 신고 다니는 건 은퇴시킨 러닝화뿐인 사람이 내가 되다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