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근처 오래된 빌라 골목 앞에는 화단이 하나 있다.
쩌적 갈라진 아스팔트와 담배꽁초 가득한 잿빛 골목이지만
누군가 심어 둔 화단 위만큼은 언제나 형형색색의 계절꽃과 초록잎으로 가득하다.
언제부터였던가, 이사 온 후 처음 눈에 들어온 풍경도 그 화단 위에 곧게 핀 해바라기와 금계국 몇 송이였다.
태양이 내리쬐는 무더운 여름에 회색 바닥은 들끓고 더운 살 위로 삐죽 선 털들이 엉겨 붙는 날이었다.
한시라도 빨리 시원한 에어컨을 맞고 싶어 투덜대며 집으로 향하던 초저녁,
더위에 싫증이 나는 와중에도 골목과 어울리지 않는 붉은 잎들에 시선이 쏠렸던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 화단에 옹기종기 모여 핀 꽃들이 어두운 분위기에도 지지 않고 올곧게 허리를 피우고 있었다.
이렇게 못생기고 낡은 골목에 누가 먼저 꽃을 심을 생각을 했을까.
골목 아저씨들의 담배와 오래된 환풍구의 매캐한 연기로 회색빛만 돌던 거리에도
누군가는 채색된 낭만을 갖고 있었다.
이후 하루가 다르게 일교차가 커지고 계절이 변해도
화단에는 늘 그 시기에 가장 예쁘게 피는 꽃이 심어져 있었다.
해바라기, 금계국, 튤립, 코스모스, 이름 모를 다홍색과 보라색 꽃
담배꽁초가 즐비한 골목에서 그 화단 주변만큼은 쓰레기 하나 찾아볼 수 없었던 것도
색채가 없는 거리에 유일하게 피어난 붉은 희망을 지키기 위해 이뤄진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해바라기를 처음 발견한 4년 뒤로부터,
화단에는 여전히 봄꽃이 핀다.
언젠가 흙갈이를 한 후로 예전만큼 다양한 가짓수는 아니지만
한 번 지켜낸 낭만은 여전히 시들지 않았다.
그리고 앞으로도 쭉 계절마다 다른 색채를 발견할 수 있을 거란 믿음.
믿음만큼은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