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연민 Jun 14. 2017

#73 그래, 그냥 웃고 말지

무법자는 사실 두 가지 의미가 있다. 법이 없어도 되는 사람, 법이 있으나마나 한 사람. 학급에도 이런 학생이 있다. 그야말로 모든 시스템에 면역인 학생 말이다. 이런 친구가 한 명 있으면 선생님은 고통과 고뇌에 휩싸인다. 장담하건대 그 어떤 교육이론과 실천학도 이 학생은 못 이긴다. 그런 학생이 있다. 

요즘 우리 반에 스피너라고 불리는 장난감이 유행이다. 돌리면 스트레스 해소에 도움이 된다는 데, a는 수업시간에도 시도 때도 없이 돌린다. 카운팅을 당하고 타임아웃이 되어도 돌린다. 

"다음에 또 이런 일이 생기면 선생님도 화를 낼 것 만 같군요, 기회를 충분히 준 것 같은데요?" 
"네 진짜 주의할게요."

그렇게 말하고 책상 속에서 몰래 돌리고 있는 거다. 
 "아무래도 스스로 통제하는 게 어려운 것 같으니 선생님이 보관하고 방과 후에 줄게요"

깜빡 돌려주는 것을 잊을까 봐 칠판에 올려두었는데, 없어졌다. 이내 a를 보니 열심히 돌리고 있다. 

"으하하" 그저 웃음을 터뜨렸다. 

얼마나 가지고 놀고 싶을까, 수차례의 주의와 나와의 약속도 깨 가면서... 평화적으로 대하나 폭력적으로 대하나 이 학생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수십 번을 이야기해도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럼 나는 어떤 방식을 선택해야 하나. 

왜냐면 그는 이미 나에게 답을 했기 때문이다. 
열 번 찍어도 안 넘어가는 사람에게 계속된 구애와 변화를 요구하는 것은 어마어마한 폭력이니까. 

첫 번째, 인정이다. 행위의 인정이 아니라 존재의 인정이다. 우리 반에는 너 같은 아이가 있어선 안된다가 아니다. 너 같은 아이도 우리 반에 있을 수 있다는 인정이다. 이걸 해야 a를 제외한 아이들이 a를 동등하게 바라본다. 자주 혼나는 아이는 교사뿐만 아니라 다룬 학생들도 가세하여 혼난다. 이게 가장 큰 문제다. 
"그럴 수 있어, 누구나 실수를 하고 반복하니까"

두 번째, 기다림이다. 지금 너의 행위에 대해 스스로 교정할 기회를 주는 것이다. 먼저 말하지도 카운팅도 하지 않는다. 그저 기다리기만 한다. 
눈치도 없는 a는 항상 뒤늦게 기다림의 의미를 알아차린다. 
"모두가 같은 속도의 삶을 사는 게 아니니까."

세 번째, 웃음이다.

솔직히 화가 난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매번 공문 틀리는 나를 관리자들은 어떻게 대해 왔던가? 나는 어떻게 대해주길 바랄까? "그래, 그냥 웃고 말자." 한 번에 입력돼서 실행되면 로봇이지. 우리 반에서 가장 인간에 가까운 건 너인가 보다. 하고 만다.

마지막, 포기다. 이건 과정이 포기가 아니라 결과의 포기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a가 바뀌기를 기대하지 않는 거다. 그럼 이런 과정을 뭣하려 하는가? 

1. 내가 살기 위해 
2. a를 제외한 다른 학생들을 위해 

나는 화내고 a는 혼나는 모습이 반복되면

영화 속 주인공과 악당 같은 이분법 프레임이 생기고, 내가 없는 상황에서 내 역할을 자연스럽게 따라 하는 학생 무리가 생긴다. 권력의 폭력은 이렇게 학습된다. 

사실, 삶이란 게 그렇다. 내뜻대로 안 되는 게 더 많다. 그런데 교실은 생각보다 내 맘대로 할 수 있는 게 어마어마하게 많다. 조금 보태서 대통령보다 할 수 있는 게 많을 거다. 26명의 삶과 그 뒤의 학부모, 가족까지 합치면 약 100명의 삶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거다. 그러니 1,2명이 내 뜻대로 안 된다고 좌절하면 안 된다. 언제까지나 나는 여기 함께 민주적으로 살기로 한 '인간'이기 때문에. 

가끔씩 스스로를 '조물주'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을 막아주는 a에게 한 번 더 웃어줘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71 신중한 비유와 예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