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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민 Jun 05. 2017

#50 아는 만큼 보인다.

2017.2.14. 그리고 보이는 만큼 피곤하다, 학교에서 만큼은.

올해 순수하게 내 손으로 기안한 문서가 180건이 넘어섰다. 그러나 나 같은 덜렁이는 발송해야 할 문서에 수신인을 안 쓰거나, 제목을 빼먹거나, 오타를 내거나 수식을 틀리거나 등등으로 여러 번 교정을 받아야 했다. 분명 내가 2-3번 확인을 하는 데도 보이지 않던 게 결재라인을 올라가면 그분들에게는 보이는 것이다. 그것만큼 민망한 일도 없다. 그래도 어쩌랴, 아직 내 눈에는 그것까지 안 보이는 게 다행이라 믿고 싶다. 아직은 "공무원"때가 묻지 않은 것 같아서 말이다. 


학교에서 신규로 발령받은 이후로 약 7년 정도 교육청의 굵직한 주력사업의 홍보 영상이나 학교 영상들을 만들었다. 영상은 그 자체로 종합예술이고 당연히 PD의 성향과 개성이 드러날 수밖에 없다. 허나, 교육 관련 영상을 만들 때는 그 개성과 영혼을 빼야 한다. 오로지 몇 명의 요구사항을 맞춰줘야 하는 것이다. 재밌는 점은 딱 봐도 영상 만드는 프로그램이 무엇인지도 모르실 분들이 각종 행사와 워크숍에서 멋진 영상들은 많이 보셔서 아는 것 없이 안목만 무지하게 높다는 것이다. 


그 영상이 어떻게 만들어지는지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 어떤 기술력이 필요한지 는 잘 모른다. 그 정도 영상은 업체나 전문가의 힘을 빌려야 하고 고액의 제작비용을 지불해야 한다고 이야기하면, "그렇게 안 만들어도 되고, 비슷하게 만들면 된다."라고 말한다. 고흐의 그림을 비슷하게 라도 그릴 수 있으면 그건 사실 똑같이 그릴 수 있는 거랑 마찬가지 아닌가? 학교를 여러 번 옮겨 내가 방송과 영상 작업을 했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수가 적어지면서 누군가 "혹시 영상 다룰 줄 아세요?"라고 물으면 "아니요. 그런 거 잘 못해요."라고 답한다. 


학교는 아이러니하게도 자신이 아는 것, 잘하는 것을 숨겨하는 곳이다. 아이들에게는 능력과 끼를 마음껏 발산하라고 하지만, 정작 교사가 그 끼를 발산하면 그 끼를 활용한 연구학교와 업무와 잡일이 붙어버리는 곳이다. 


아는 만큼 보이지만 보이는 게 많으면 피곤해진다. 그래서 보이지 않는 척을 한다. 눈을 감는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진짜로 다시는 눈을 뜨지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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