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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민 Jun 08. 2017

#53 낱말로 정의되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2017.2.18. 

커피숍에서 라테를 주문했다.

"휘핑크림이 그 맛이네?"
"무슨 맛?"
"있잖아, 우리가 자주 가는 유기농 빵집에서 위에 소보루인데 안에 크림이 있어."
"그런데?"
"그 소보루 크림빵의 크림 맛이야."

"아, 슈크림?"

그랬다. 난 그 '슈크림'이라는 낱말이 생각이 나지 않았던 것이다. 

친구는 한입 마셔보더니 "맞네, 슈크림 맛 휘핑"한다.

머릿속에서만 머물던 생각과 느낌, 그리고 미각의 정보가 몇 줄에 걸쳐 입을 맴돌았지만, 우리가 합의한 낱말 '슈크림'하나로 정리가 된 것이다. 사고를 단순하고 빠르게 정리하고, 의사소통을 원활하게 하는 데 있어 낱말의 정의는 무척이나 필요하고 유용하다. 그러므로 누군가와 (특히, 다수) 대화를 할 경우에는 주제와 관련된 낱말과 용어의 정의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신뢰" 있는 진보와 보수의 정의를 다시 내려야 했고, 여성 혐오와 인권에 대한 정의도 공부해야 했다. 왜냐하면 이런 낱말들은 생각과 토의를 통해 정리된 게 아니라 책과 미디어, 어깨 너머로 듣고 지레짐작해버린 낱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고 나서 돌이켜 보니 내가 교실 속에서 쓰는 '당연히 합의되었으리라' 생각하는 낱말에도 의구심을 품게 되었다.

"배려" "존중" "약속" "신뢰" 등

우리는 이 낱말의 의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설명할수 있을까? 

그저 낱말로만 인지되는 허상은 아닐까?

용은 상상 속의 동물이다. 아무도 본 사람이 없다. 하지만 낱말로 존재하기 때문에 실제로 인지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러나 용의 모습 제각각이고, 누가 맞다고 할 수도 없으니 용에 대해서 토의를 하면 대화가 되지 않을 것이다. 신에 대한 논쟁이나 패권주의에 대한 이야기처럼.

학급에서 흔히 쓰는 저 낱말에 대해 나와 아이들은 "용과 같이" 인식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배려하라, 존중하라, 약속과 신뢰를 생각하라'고는 하는데 나는 그 의미를 정확하게 경험하고 이해하고 정리하였는가. 살면서 많은 배려와 존중을 받았는가? 약속과 신뢰를 정의할 만큼의 확실한만 한 경험과 생각을 가지고 있는가? 내가 이 정도라면, 아이들은 도대체 저 낱말을 얼마나 이해하고 있을까?


입버릇처럼 내뿜던 배려와 존중이 아이들에게 경험되지 않은 죽은 낱말이 되지 않도록 해야 한다. 

교실 속 대화와 눈빛, 나의 말투와 어조,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이 따뜻하고 벅차오르는 듯한 느낌은 무엇일까?" "내가 지금 한 말과 행동으로 친구가 달라지는 데 왜 그럴까?" 하는 그 무엇인가가 솟아오를 때,

그때 비로소 그것들을 낱말로 정의해낼 수 있을 것이다. 

말로만 떠벌리는 것이 아니라, 행동을 통해, 분위기와 감정을 통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할지도 모르는 낱말에 대한 감수성을 높이고 공감대를 만드는 일에 올 1년을 투자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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