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을 확인해 볼까 하고 몸을 돌려 충전기에 연결된 핸드폰으로 손을 뻗었다. 눈을 감고 핸드폰을 두 손에 잡았다. 알람이 울리지 않았기에 계획한 시간보다 이르다는 뜻인데. 시간을 확인하는 순간, 다시 몸을 돌려 잠을 계속 잘 것 같았다. 쓸데없는 내적 갈등을 피하는 길은 그냥 하는 거다. 그 어렵다는 마음을 먹었다면, 안 하고 후회하는 것보다 하고 후회하는 게 차라리 낫다는 내 습에 따라 그 자리에서 당장 일어났다. 실눈 뜨고 전날 챙겨 놓은 옷을 주섬주섬 입었다. 양말까지 바짝 당겨 올려 신고 머리를 질끈 묶었다. 그 위에 모자와 선크림까지! 1층으로 향하는 엘리베이터 시계는 5시 30분을 알렸다.
땀이 비 오듯 쏟아진다.
이 상투적인 표현 말고는 생각나지 않았다. 느닷없는 움직임에 몸 곳곳의 관절은 동시다발적으로 경계경보를 울렸다. 나름 코어에 힘을 주고 영상에서 본 대로 자세를 잡고 뛰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내 몸은 반드시 고쳐야 할 자세의 예시대로 되었다. 허리에 힘이 빠지면서 중심이 앞으로 쏠렸고 당연하게도 엉덩이는 뒤로 빠져버렸다. 힘 빠진 다리는 마음의 욕심에 멱살 잡혀 질질 끌려가는 듯했다.
마지막으로 달리기를 한 게 언제였지?
이 또한 까마득한 전생의 기억이다. 그나마 집 밖을 나가야 할 수밖에 없던 시절도 있었다. 반려견이 있을 때는 하루 4번은 기본, 많게는 6번까지도 집 밖을 나가야 했었다. 반려견이 나이가 들면서 그 횟수가 줄어들기는 했지만, 실외 배변습관이 고착되어 안고서라도 밖으로 다녀야 했다. 반려견이 세상과 이별하고 2여 년이 지난 지금, 난 완벽한 집순이다.
그토록 움직이지 않았던 몸을 갑자기 움직이니 정말 마음과 완전히 따로 논다.
몸과 마음이 얼마나 서로 어이없어하는지, 마음은 웃으면서 ‘용기 내서 끝까지 해봐’라고 다정히 격려하지만, 몸은 ‘그 입 다물라!’ 하며 화 난 듯 발로 길바닥을 찍어낸다.
분명 무모한 도전이었다.
준비운동도 없이, 폭염에 쩍쩍 달라붙는 두터운 30수 면티를 입고 걷는 것인지 뛰는 것인지도 모르겠는 속도로 용기를 넘어 ‘오기’ 하나로 목표한 거리를 달성하겠다니! 이제 겨우 500미터도 채 되지 않은 것 같은데 한증막에서 제자리 뛰기를 하는 것 같았다. 저급한 체력 탓도 있지만, 코스도 잘못 선택했다. 나무 그늘이 있는 코스를 갔어야 했는데, 사람을 피한다는 이유로 선택한 이 코스는 너무 뜨겁다. 이러다 대회는커녕 당장이라도 응급차에 실려 갈 수도 있겠다 싶었다.
러닝의 여러 좋은 효과 중의 하나가 잡념 제거라는데, 왜 나는 뛰면 뛸수록 번뇌가 한강물처럼 일렁이는지, 아직 몸이 덜 힘든 건지도 모르겠네. 그럼 더 속도를 내야 하는 걸까? 머리는 내가 저질러 놓은 행동에 대한 질문과 의심 사이를 오가면서 횡설 수설 하는데, 다리는 모든 걸 포기했는지 묵묵하게 달리기 시작한다. 러닝 앱이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1km’라고 거리를 알려 주고 킬로당 속도까지 친절하게 알려준다.
피식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평소에 걷는 속도와 다를 바 없는 속도였다.
‘걷기보다는 최소한 조금이라도 빨라야 하는 거 아냐?
이건 뛰기가 아니라 뛰는 척하는 거잖아!’
마음이 몸을 타박하기 시작했지만, 1킬로미터 정도 지나자 몸은 이제야 주제 파악이 된 듯했다. 더도 들도 아닌 딱 버틸 수 있을 만큼의 속도를 유지했다. 저 멀리 뜬 구름 속에서 몽글몽글 말을 해대던 마음을 획 끌어다가 발 옆에 나란히 두었다.
독일어로 ‘bodenständig’이라는 단어가 있다.
독일어는 합성어 천지다. 이 단어도 의미를 두 개로 나눌 수 있다. Boden(바닥) + stehen(서다) 이 두 단어를 합치면 ‘바닥에 서있다’, ‘바닥에 서다’라는 의미다. 여기에서 파생한 ‘bodenständig’은 여러 의미가 있지만 강조하고 싶은 뜻은 ‘현실적인’이라는 개념이다. 이 단어는 뜬구름 잡는 소리와 반대라는 의미로도 사용되고, 자기 분수에 넘치거나, 허영이 많거나, 사치스러운 의 반대말의 개념으로도 사용된다. 허세와 과대 포장 없이, 자신이 서 있는 곳이 어디인지 객관적인 모습과 수준을 주관적으로 인정한다는 뜻이다. 사회의 시선과 평가를 개인이 인정할 때 가능하다.
이 표현은 기업회의나 부자들의 모습에서도 자주 쓰인다. 독일 기업에서 창의적이고 혁신적인 아이디어보다 bodenständig 한 제안을 더 선호한다거나, 찐 부자들은 티 나지 않게 bodenständig 한 라이프 스타일을 즐긴다는 는 표현을 독일 신문기사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나 역시도 독일 생활 동안 이 단어가 독일인의 보편적인 태도를 잘 보여준다고 생각했었다. 뜬구름 속에서 상상과 공상에 기꺼이 빠져 있는 나에게는 다소 밋밋하고 김 빠진 사이다 같은 느낌이었지만, 그들이 두 발 딛고 당당하게 땅바닥에 서 있는 현실적인 모습에 자주 감동했었다.
달리기를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내 삶에 대해 bodenständig 해졌다.
지금까지 애써 힘껏 붙들고 있던 희망과 꿈이 한순간에 다 날아가 버린 것 같았다. 내가 지금 여기 서 있는 곳은 쨍하고 해 뜨는 저 푸른 초원 위의 하얀 집이 아닌 뜨거운 아스팔트 바닥이었다. 여기에 발을 데지 않으려면 또 뛰어야 한다. 뛰어가면 어디가 나올까, 수없이 도전하고 기대하고 실망하고 좌절하고 원망하면서 또 도전하고 기대하고 울고 포기했다가 또 같은 희망 고문이라는 뫼비우스의 띠에 기꺼이 올라탄다. 올해도 공모전이란 공모전에는 다 도전했고 지금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다. 이 기다림의 풍선이 저 허공에서 터져 버리면 추락이겠지만, 다행이다. 땅바닥 위에 서 있어서. 한계 비용, 매몰 비용, 남아 있는 생의 시간, 가능성, 기회비용까지 앞으로는 시간과의 경쟁일 텐데... 내 체력과 중력의 무게를 철저히 온몸으로 느끼면서 두 발을 딛고 서 있었다. 두 손을 무릎 위에 올리고 상체를 숙여 숨을 고른다. 그 짧은 시간 동안 평소라면 느끼지 못했던 오만가지 감정이 밀려왔다.
무계획으로 시작한 무모했던 첫 번째 달리기는 완벽한 실패이자 성공이다. 속도와 기록면에서는 뛰기라고 할 수도 없는 기록이었지만 내가 어디에 서 있는지 나의 위치와 체력과 필력을 완전히 다르게 접근해야 한다는 사실까지 파악하는 데는 완벽하게 성공했다. 운칠 기삼이 따르는 공모전은 모르겠고, 우선은 내가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 곧 다가올 단기 마라톤 대회에 참가하고 주최 측이 권장하는 1시간 30분의 완주에 도전해 보자. 드라마 공모전은? 정말 모르겠네, 오늘은 여기까지만. 숨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