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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07. 2024

'기'를 아십니까?

용기와 오기 사이에서

뜨거운 저녁이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새벽에 거북이 달리기 하고 돌아온 이후 며칠을 끙끙 앓았다. 뻔하디 뻔한 결과다. 유연했던 한때를 믿고 준비운동 하나 없이 굳은 근육을 달래주지도 않고 무작정 달리기만 했던 탓이었다. 이런 내가 집에 돌아와서 정리 운동을 했을 리가. 열사병이 나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했다. 책상에 앉았다가 일어나는 모습이 아기를 품은 오랑우탄 같다. 그 동물 걸음걸이로 집안을 어슬렁거린다. 나의 이런 모습을 두고 누군가는 ‘용기’를 내라고 응원하고 누군가는 ‘오기’를 부린다고 놀린다.     

 


‘오기’는 안 되는 걸 되려고 애쓸 때 부리거나, 상황을 인정하지 못하고 일말의 희망을 붙잡고 있을 때나 명백한 결과를 인정 못해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상황에 자주 쓰인다. 성공 지향적인 우리 사회에서 ‘오기’ 부리라는 긍정서술어보다는 부리지 말라는 부정 서술어가 더 자주 사용된다. ‘오기’는 실패에 좀 더 기울어진 의미다. 오기는 말뜻 그대로 해석하면 오만한 기운이다.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믿거나 타인의 능력과 상황을 무시하는 매우 주관적인 판단이다. 오기는 다 진 상황에서도 이겨 먹고 싶은 마음을 내려놓지 못할 때 나온다. 오기와 오만은 무모한 도전에 필수다. 무모한 도전은 제대로 알지 못하고 무턱대고 하는 거다. 무턱대고 하다가 성공하면 이를 두고 용기 있는 도전이었다고 말 바꾼다. 말꼬리 이어가는 말장난 끝에 결국 결과에 따라 모든 표현이 달라진다는 것을 눈치챘는지?     

 

알고도 덤비는 용기는 용감하고 모르고 덤비는 만용은 무모하다고?

그런데 도전할 때 어떻게 결과를 알고 도전할까? 수많은 예측 모델과 예상 시나리오대로 되면 좋겠지만, 우리 다 경험해 보지 않았나? 삶에 얼마나 많은 변수가 매복되어 복병처럼 툭툭 튀어나오는지! 내가 이렇게 삼복더위 새벽에 한강 변을 뛰게 될지 한 달 전의 나도 나를 몰랐다.   


살면서 수 없이 마음먹고 생각하고 선택해야 한다.

그때마다  용기가 필요하다. 누군가는 쉽게 결정하고 선택하지만 나는 그렇지 못했다. 안 그런 척하는 것뿐이다. 그래서 신이 있다면 신에게 따져 묻고 싶을 때가 너무 많았다. 난 왜 늘 용기를 내어야만 살 수 있는지, 나는 왜 소심한 겁쟁이로 태어나 늘 생각만 많고 행동은 굼뜬 거북이인지, 왜 나는 왜 반백 살을 살고도 사는 게 뻔해지질 않는지, 왜 기가 약해서 맨날 용기와 오기를 부리면서 삶을 살아야 하는지….     

                        



왜 겁도 없이 달리기 대회 참가 신청을 했을까?

용기 낼 필요도 없는 선택이었다. 뛰어 보고 나니 질문의 답이 나왔다. 이건 누군가와 경쟁하는 대회가 아니다. 오롯이 나 혼자서 주어진 시간에 들어오면 그만이다. 경쟁에 취약한 나에게 딱 맞는 운동이다. 나 하나만 이겨 먹으면 되는 정확한 1인분의 운동이다. 그러니 용기도 오기도 부릴 필요가 없었던 거다.


용기와 오기는 경쟁 속에서 나온다.  내 모든 경쟁심은  10대에 다 소진해 버린 것 같다. 태어날 때부터 경쟁 속에서 태어났다. 출생률이 가장 높았던 시대에, 요즘 말하는 다둥이 집안에서  오빠 언니 동생을 두루 갖춘 끼어 있는 자녀로 오기와 용기 없이는 사회적 생존이 불가능한 운명으로 말이다. 그때 다 써 버린 경쟁심 덕분에 20살 이후 독립하면서 누군가 나를 경쟁 상대로 삼아 버리면, 상대가 원하는 것을 해주거나, 아니면 그 게임에서 나가버렸다. 그때마다 나는 엄청난 용기로 맞짱이냐 포기야 고민하며 오기 부려야 했지만 주변은 몰랐다. 주변은 결국에 내가 던진 평화주의자 카드와 도망자 카드를 기꺼이 받아 주었을 뿐이었다. 전쟁 없는 평화는 늘 환영받았다. 사람 좋다는 말로 미화된 내 사회생활은 나에게 용기와 오기의 외로운 줄타기였다.  허공에 매달렸던 줄을 스스로 끊어 버렸다. '나는 자연인이다' 를 외치며 도심 속 산사에 홀로 지내는 프리랜서에게 더는 오기 부릴 일이 없다.  좋은 평화를 깨달았다.


용기는 우리가 왜 살아가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본질적이고 중요한 감정이다.”
<신학자 폴 틸리히 (Paul Tillich)>


뛰어 보고 나니 지금까지와는 다른 용기와 오기가 필요하다는 걸 깨달았다.

타인에게 질 수도 있다는 생각은 쉽게 받아들이면서 왜 나의 결정과 결심과는 유연하지 못한 지, 몸이 아픈대도, 걸음걸이가 인간 진화 단계 전의 모습으로 바뀌었는데도 대회를 반드시 나가 보겠다고 오기 부리는지 정말 모르겠다. 무의식적으로 시들어 가는 신체가 지구에 머무를 시간이 아직은 길다는 것을 몸으로 증명해 보이겠다는 걸까? 온몸이 아파 죽겠는데도 대회 참가를 포기하지 않는 오기는 도대체 뭘까? 도대체 살면서 용기 있게 증명해야 하려고 아등바등 하는 걸까? 지금 살아 있는 것 자체가  용기 있는 거라고!  신학자 폴 틸리히의 말로 내 존재의 용기를 위로한다.  나에게 내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용기를 낸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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