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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VIVA Oct 10. 2024

해가 진다

몸 사리지 말고 하나 둘 셋!

      노을이 지고 창밖이 어두워지지만 밖은 여전히 뜨거워 보인다.  대낮의 대지 열이 유리창으로도 전해진다. 행여나 오늘도 나에게 핑계를 될까 봐 오후부터 미리 러닝 할  옷으로 갈아입고 문서 작업을 했다. 오늘 계획한 작업량도 마무리했고 창박은 이제 완전히 깜깜하다. 오늘 뛰기만 하면 변덕 없는 하루로 마무리될 것이다. 


밤의 한강은 완전히 다르다. 빛이 사라진 그곳은 찬송가를 흥얼거리며 새벽 기도를 마치고 돌아오는 할머니도 안 보이고, 반려견을 기다리며 하품하는 할아버지도 찾아보기 힘들었다. 대신 어둠 속에서도 반짝이는 생기 넘치는 친구들이 가득하다. 그들의 수다 소리, 나지막하게 들려오는 음악소리, 게임하다 벌칙에 걸려 서로 깔깔 거리는 소리, 맥주 마시고 삶의 버거움을 쏟아내는 소리, 반짝이는 그들의 시간이 한강과 함께 흘러가고 있었다.

    지난 첫 시도 때 얻은 근육통이 거의 사라져 스트레칭을 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었다. 스마트 워치와 핸드폰의 앱을 연동하고 아주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오늘의 목표는 뛰는 행동만으로 1km를 완주할 수 있는지, 그리고 얼마나 걸리는지를 확인하는 거다.


    첫 번째 시도 때는 무작정 5km를 완주하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리는지를 확인했다. 신청한 대회 10km 코스다. 러닝 코스가 도심이기에 주최 측에서는 교통을 통제한다고 했다. 아마 코스 중간마다 모범택시 운전사 연합회 같은 곳에서 경찰 복장과 비슷한 옷을 입고 거리를 통제할 게 분명했다. 대회 측에서 이런 수고를 하루 종일 할 리가 없다. 통제 시간은 2시간 30분. 하지만 10km 권장 시간은 1시간 30분이다. 그렇다면 1km를 몇 분에 달려야 하는 거지? 거리와 시간과 속도의 상관관계가 도통 이해되지 않았다. 내 속도가 킬로 미터당 몇 분인지, 그리고 대회 측에서 말하는 시간 안으로 들어오려면 어떤 속도를 뛰어야 하는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아무리 시간과 거리와 속도를 산출한다고 한들, 내 걸음 속도와 뛰는 속도를 모르기 때문에 결괏값은 허수로 다가왔다. 이제는 몸으로 확인할 시간이다. 

    첫 번째 시도에서 5km 거리를 완주하는 데 거의 한 시간이 걸렸었다. 게다가 그건 뛴 게 아니었다. 뛰는 건지 걷는 건지 모르겠는 행동과 뛰는 척 걷는 동작의 반복이었다. 뛰어야 한다는 강박만 머릿속에 있었을 뿐 머리와 가슴의 기대만큼 몸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 좌절과 실망을 안고 다시 한번 도전한다. 내가 과연 1km를 쉬지 않고 뛸 수 있을까?      


    세상에나! 1km가 이렇게나 길었나? 숨이 턱턱 막혀 귀에 압이 차 오르기 시작할 때가 겨우 500m 정도거리였다. 스마트 워치가 말해주는 현재 나의 속도는 분당 9분 10초 안팎. 이렇게 뛴다면 10km를 완주하는데 90분이 걸린다는 건데, 이 속도로 계속해서 달릴 수 있다는 보장도 할 수 없는 지경이다. 1시간 30분이 아니라 교통 통제하는 2시간 30분을 꽉 채워야 10km를 완주할 것 같은데..... 다리가 후들거린다. 갓 태어난 아기 사슴이 주어진 생을 살아가려 대지에서 얇은 다리로 온 힘을 주고 일어나지만, 나는 반백년이나 이 땅에 있었다. 후들거리는 다리가 우습지 않나? 중력을 거슬리는 일이 이토록 힘든 일이었던가? 체력을 방치한 자책 끝에 오기가 올라왔다.


 ‘여기서 포기할 수는 없지, 내 몸 하나 건사하지 못한다니’   

 

    나를 아는 모든 이가 믿지 않는 사실, 내가 태권도 3단이라는 사실이다. 흔히들 하는 어린 시절 국민 체육이 아니라 다 커서 내 발로 직접 찾아가서 태권도를 배웠었다. 때는 고등학교 2학년, 거의 매일 저녁 동네 태권도 도장을 나갔다. 엄마한테는 대학 입시에 반영되는 체력장 점수를 잘 받기 위해서라는 명분을 내세워 설득했다. 태권도 도장 등록은 바로 진행되었다. 하지만 나의 진짜 이유는 호신용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군가가 나를 계속해서 윽박지르고 협박하고 때로는 때리기까지 해서 참다못해 태권도 도장을 스스로 나갔었지. 맞짱 뜰 기세는 없었지만, 그래도 검은띠라고 하면,  그 자격증 하나로 상대가 쉽게 건드리지 못할 거라는 순진한 울분이 내 맘 그득했었다.


    엄마가 허락했던 또 다른 이유는 어린 시절 살던 동네가 그리 안전하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서울 속 공장 지대, 지금은 너무나도 핫한 부동산 가격대를 형성하고 있지만, 나 어릴 때는 그곳에서 봉고차 인신매매도 성행했더랬다. 지금 세대는 봉고차라는 단어조차 어색할지도 모르겠다. 봉고차 납치 사건의 가장 대중적인 모습은 아마도 영화 <범죄도시 2>에서 강해상의 등장신을 보면 이해가 갈 거다. 그런 일이 서울 한복판에서도 종종 있었다. 신문에도 TV 9시 뉴스에도 범죄 현장으로 언급되던 지역,... 나의 어린 시절의 기억이 유쾌하지만은 않다. 이런 이유를 열거했던 고등학생 여학생이 태권도를 배운다고 하니 공장 운영에 바빴던 엄마아빠는 어쩔 수 없이 태권도 도장 등록을 허락했던 게 아닐까 마음대로 상상해 본다.


     그때 배운 품새나 겨루기는 실생활에 별다른 이득이 없었다. 성인이 된 이후 나를 괴롭히던 사람과 물리적 정서적 거리가 생겨 자연스레 방어태세로 긴장할 필요가 없었다. 그렇다고 배운 게 사라지지는 않는지, 그때 얻은 어설픈 품새와 겨루기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그때 다져진 기초 체력으로 잘 버텨온 거 같다. 태권도보다는 오히려 스트레칭 기법이나 요령이 날 버티게 한 것 같다. 등산과 요가 거기에 두 아들의 육아까지 확실하게 잘 써먹었으니까. 하지만 이건 윈도 11 시대에 윈도 비스타 같은 소리를 지껄이는 것이나 다름없다. 업데이트가 절실한 몸, 어쩌자고 이렇게 방치했을까, 겁내지 말고 몸 사리지 말고 더 뛰어 보자! 


     한강에서 밀려오는 습기와 내 몸에서 흐르는 땀이 범벅이 되어 숨이 턱턱 막힌다. 걷지 말고 뛰는 거다. 계속 뛰어야 한다. 가로등이 띄엄 띄엄한 숲 속 산책로에 들어서자 나무에서 뿜어내는 이산화탄소로 앞이 아득해진다. 도대체 스마트 워치는 언제쯤 나에게 1km의 거리를 알려주는 걸까, 앞에서 나 만큼 느려 보이는 한 사람이 다가온다. 분명 팔을 가슴팍 주변으로 올린 폼이 분명 뛰는 것 같은데. 서로가 서로의 모습을 알아볼 즈음의 거리가 되었을 때, 그는 나에게 '잘 뛰시네요, 파이팅!'이라 했다. 그 숨넘어가는 사이에도 말이다. 그는 나에게서 자신의 모습을 봤을지도 모르겠다. 힘들어 죽겠는데, 자책 대신 그 힘들어 보이는 모습을 발견한 상대에게 응원의 말을 던지는 용기. 그는 타인을 그렇게 응원하면서 자신을 동시에 응원하고 있었다. 그 말에 미쳐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그는 스쳐 지나갔고, 생판 모르는 사람의 응원이 오랫동안 귓가에 머물렀다. 


      숲길에서 나와 가로등이 환한 밑을 지나갈 때, 스마트 워치가 1km 지점을 지났다고 알렸다. 오호라! 아까 보다 기록이 올라갔다. 사람의 응원 덕분이었을까? 하면 되는 건데, 왜 몸을 사리고 있었을까? 몇 초 차이로 희망과 좌절이 오고 간다. 이런 게 기록 스포츠의 세계인가? 신기하네, 좀 더 뛰어 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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