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나를 증명하기
우리는 살면서 자신이 누구인지 증명하라는 요구를 받고 산다. 누구 하나 대 놓고 요구하지는 않지만 인간 세상에 섞여 살려면 당연히 해야 하는 존재의 의무로 인식하며 따르려 한다. 자기 증명의 묵시적인 요구는 제법 압박감을 발휘한다. 특히 부모님이 나를 증명해 주던 시절을 지나 소규모 사회생활로 나가는 순가 부터 능력과 능력의 결과물이 곧 나를 나라고 알려주는 증명서가 된다. 학생 시절의 성적표, 온갖 자격증을 그 대표로 들 수 있고, 이후 사회 초년생이 되면 목에 걸고 다니는 회사 출입증과 명함으로 확장된다. 그리고 중년의 나이에 들어서면 능력의 세계가 물성의 세계로 변환되는 단계에 이른다. 대표적으로 부동산과 자동차다. 어디에 살면서 어떤 차를 소유하는지는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는지보다 더 즉각적으로 자본주의적 기준이 세워진다. 소유가 존재를 아이러니하게도 빠르게 드러낸다.
사회가 만들어 놓은 타임 라인에 잘 적응하지 못하거나 사회가 요구하는 단계별 시간별 미션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면 뒤로 처지거나 대열에서 밀려난다. 우열과 앞뒤, 상하와 대소의 경쟁사회의 빛과 그림자는 언제나 존재한다. 지구상에서 인류가 존재한 이후 경쟁은 개인과 사회의 발전을 만들어 냈지만 동시에 ‘아싸와 루저’라는 개념도 만들어냈다. 냉정하지만, 세상의 기준은 내가 아니라 세상이다. 내가 아니라 하더라도 세상이 던지는 루저 꼬리표를 달고 싶지 않다면, 세상에 능력을 증명해야 한다. 그리고 그 증명은 과정이 아닌 결과로 평가받는다. 결과로 보여주기 가장 확실한 게 바로 사물이다. 사물에 이름표를 붙이고, 선을 그어 사방에 경계석을 세워 내 것임을 증명할 수 있다. 타인의 소유를 내 것으로 만들려면 거기에 대한 대가를 내면 된다. 사회가 인정하는 정당한 대가 없이 소유권을 뺏어오는 것이 도둑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더 많은 곳에 내 이름표를 달려고 하는 건 자기 보존 본능의 자연스러운 결과이기도 하다.
사회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은 미국이 마케팅 중심의 소비사회를 향해 브레이크 없이 달려 나갈 때, ‘소유냐 존재냐’의 책을 통해 두 가지 실존 양식을 비교 설명했다. 소유는 사물과 관계하고 존재는 체험과 관계한다. 이 두 가지는 동전의 양면처럼 분리할 수 없지만 무엇을 먼저 두고 비율을 더 많이 두는지에 따라 삶의 가치와 사회적 성격이 달라진다. 소유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존재하기 위해 소유하는가?
아이러니하게도 체험 역시 소유할 수 있다. 여행으로 자아를 발전시키고 확장하면서 이해의 폭과 깊이를 넓히는 체험이라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여행 다녀온 곳의 도장 찍기 형식으로 여행을 다니는 사람도 꽤 있다. 그들은 기억과 사진을 소유하기 위해 여행한다. 000 다녀온 사람이라는 수식어를 하나 더 늘리기 위해 여행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내가 ~ 가봐서 아는데’라는 표현을 자주 쓴다. 자신의 체험을 소유만 하기에 그것만 안다. 그리고 변치 않는 사물처럼 기억을 고정해 버리고 만다. 한 모임에서 나에게 몇 개국을 여행해봤느냐며, 자신은 50여 개국이 넘는 곳을 다녀 봤는데, 나보다 더 많이 다녀 봤냐고 물었던 사람도 있었다. 그 모임은 주거지, 직업, 자동차, 학력 등 사회가 요구하는 객관적인 증명을 말하지 않는 것이 특색이었다. 그런데 그 질문을 던진 사람은 어떻게 하든지 소유를 내세워 기선제압하며 자신의 소유와 힘을 내세우고 싶어 했던 것 같다.
왜 달리기냐고 묻는다. 여전히 잘 모르겠다. 어느 날은 이런 것 같고 저런 날은 저런 것 같다. 그런데 꼭 그 이유를 알아야 하나? 그런데 확실한 건 하나 있다. 내가 달리기를 좋아한다는 사실 그리고 달리기는 타인에게 소유로 자신을 증명하거나 내세우는 용도로 그다지 효과가 대단하지 않다는 점이다. 러너들의 SNS를 보면 대부분 하루 달린 거리와 시간의 기록이 전부다. 소유 지향적인 사람은 아마도 달기기 기록과 대화 참가 경험으로 또 경쟁하려 들지도 모르겠다. 달리기는 고가의 취미와 달리 진입 장벽이 매우 낮다. 입던 옷 입고 나가 뛰어도 그만이다. 하지만 달리기를 기록으로 소유하고 경쟁의 대상으로 삼는 거 결코 쉽지 않다. 한마디로 달리기는 어렵다. 5K, 10K, 하프 그리고 풀코스 이걸 다 기록으로 소유하려면 얼마나 많은 신체의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지 뛰어 보지 않아도 상상이 가는 정도다. 고통은 매우 주관적이기에 비교 불가다. 오롯이 자신만이 알 수 있는 고유의 경험이다. 나는 이 신체의 고통을 체험하며 내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알고 싶어 도전한다.
세상이 요구한 미션과 의무를 나름 성실하게 수행했고 이제는 자유로워졌다. 내 삶의 중심을 세상으로 삼아 반백 년을 살았다. '남들처럼' 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면 위에 떠올라 있으려 아등바등거렸고 지금, 다행히 수면 위에 여전히 떠서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삶의 단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나 아닌 다른 이들의 생명과 그들의 삶을 일정 부분 책임지고 인생에서 받은 숙제를 해냈다. 의무에서 해방된 지금, 삶의 방향을 ‘나’ 중심으로 변환 중이다.
하지만 아직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겠다. 타인이 기준이 되었던 삶에서 타인이 사라지고 나니 기준점도 사라졌다. 내 삶의 기준을 나로 잡으려면 나의 희로애락부터 알아야 할 거 아닌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고 어디에 눈물과 분노의 트리거가 숨어 있는지, 웃음보가 어디서 터지는지 정도라도 알아야지. 그러니 다양한 것들을 경쟁 심 없이 해보면서 나를 알아가야 한다. 아이들에게 수많은 악기를 가리켰고 그 결과 한 아이는 자신이 현악기와는 맞지 않는다고 과감히 말하며 악기 배우기를 거부했었다. 그 대신 다른 악기에 집중했었다. 나도 마찬가지로 이것저것 해 봐야, 내가 뭘 잘하고 못하고 좋아하는지 알겠지. 그 첫 도전으로 달리기를 도전한 것 같다.
세상의 중심은 내가 아니지만, 내 삶의 중심만큼은 '나'이기를 바라기에! 세상에 더는 내가 누구인지 증명할 필요가 없기에, 나 좋자고 도전해 본다. 내가 좋은 걸 하면서 살아있는 존재감을 확인하는 거라고 근육통을 이겨 내기 위해 '나 달리기 좋아해'라고 나를 가스라이팅 하는 것도 괜찮네!
그럼 장바구니에 담아놓았던 운동복을 결제해 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