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생 친구로 만들고 싶은 뜀박질
잔뜩 낀 구름 사이로 주홍빛 노을이 살짝 비친다. 일몰 시각이 다가온다.
노트북을 접고 옷을 갈아입는다. 스마트 워치에 블루투스 이어폰까지 챙긴다. 머리를 질끈 묵고 시원한 에어컨 밑에서 가볍게 몸을 푼다. 스트레칭에서부터 층간 소음 나지 않을 정도의 가벼운 점프로 몸을 푼다. 아니 몸을 턴다는 표현이 더 맞겠다. 종일 앉아 있어 경직된 몸의 근육을 탈탈 털어주는 동안 창밖이 어둑어둑해진다. 이제 나갈 시간이다. 운동화를 신는다.
습관이 될 때까지 뭔가를 억지로라도 해야 하는 지점이 있다. 그 임계점을 넘고 나면 변화와 성장 속도가 단순 합도 아니고, 곱도 아닌 제곱으로 빠르게 늘어난다. 눈덩이를 굴리는 것 같다고나 할까. 그렇게 되고 나면 습관이라고 할 것도 없이 몸과 마음과 머리가 삼위일체 되어 자동스럽게 그 행동을 한다. 아기가' 엄마'라는 첫 단어를 하고 나면 다른 단어의 습득은 물론 문장 구사를 해내는 속도는 빛의 속도와 비교할 수 있다. '엄마'를 습득하는데 1년이 걸렸지만, 그 지점을 넘고 나면 하루에 수백 개의 단어까지 습득할 수 있다. 그래서 모든 배움과 학습의 성장을 경험하려면 임계점을 반드시 넘어야 한다. 임계점은 개인마다 다르다. 누구는 빠르게 누구는 느리게 서로 다른 속도이겠지만 멈추지만 않는다면 느리더라도 도달할 수 있다.
그 지점은 알 수 없다. 정해지지 않았으니 스스로 깨달아서 알아내야 한다. 그 지점을 넘기 위해서는, 넘어서서 자동반사적인 반응이 나오기 전까지는 의식적으로 다짐하고 결심하고 마음먹어야 한다. 세상에 가장 어려운 게 마음먹는 거라고. 그래서 시작이 반이라는 말이 나온다. 마음먹는 습관, 그리고 마음먹은 것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습관, 그것이 만들어져야 임계점을 넘어선 성장과 성취를 말할 수 있다.
임계점이라는 단어 앞에 갑자기 민망해진다. 이제 막 러닝을 시작해, 겨우 걸음마하는 수준인데. 게다가 벌써부터 네임드 마라톤 대회에 출전할 생각을 하고 국내도 모자라 해외 마라톤을 꿈꾸다니! 그래도 하나, 나에게 칭찬해 주고 싶은 게 있다. 러닝타임을 밤으로 잡고 나니, 우선 작업의 속도가 빨라졌고 일상이 탄탄해졌다는 사실이다. 나는 프리랜서. 시간과 공간에 자유로운 것 같지만, 그 자유를 관리하지 않으면 엄청나게 많은 에너지와 시간 낭비를 볼 수 있는 당혹스러운 직업이기도 하다. 특히나 마감일정이 여유 있거나, 일이 어렵지 않을 때는 띵가 띵가 놀다가 후다닥 일을 끝내기도 한다. 그래서 일상이 한없이 늘어졌다가도 뜨거운 물에 다시 들어간 고무줄 마냥 팽팽해지기도 한다.
그런데 '달리기'라는 행동을 밤시간에 고정해 놓고 나니 낮시간이 적당히 팽팽해진다. 빨간 망토의 소녀가 되어 SNS의 숲을 헤매다가 늑대에게 잡아 먹힐 뻔한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는데, 이제는 샛길에 눈길 주지 않고 작업에 집중한다. 이거 하나 정말 맘에 든다. 거기에다가 몸을 고되게 하니, 잠이 어찌나 잘 오는지, 평생 꿈 없이 잠을 잠 적이 없었는데, 머리 베개에 두면 바로 잠들고 해 뜨면 눈을 뜬다. 누군가는 밤에 운동하면 심장과 혈류가 안정되지 않아 깊은 수면을 방해한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심하게 운동을 아직은 하지 않는 듯 한지, 꿀잠이라는 것을 요즘 반백년 살고 나서 그 말뜻을 온몸으로 체험하고 있다.
이런 일상을 선순환의 습관으로 만들기 위해 두 가지를 지키기로 했다.
해가 지면 무조건 집 밖으로 나가기
달리기에 대한 영상 또는 자료 검색하지 말기
이 두 가지가 지켜지면 다른 것들은 자연스레 따라올 것이라 믿었다. 나에게 가장 큰 마음 에너지를 요구했던 것이 집 밖으로 나가는 건데, 이왕 나갔으니, 그 노력이 아까워 한강 다리 하나, 두 개, 세 개 까지 찍고 집으로 돌아온다. 어떤 날은 걷고 어떤 날은 뛰고 또 다른 날은 걷다가 뛰다가 정말 기분이 무지 좋은 날은 너무 앞만 보고 가다가 돌아올 체력이 없어 택시를 타고 돌아오기까지 했다.
러닝 학습 영상이나 자료를 더는 검색하지 않는 이유는 동기 부여 충만할 때 이것저것 스스로 지적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가끔 너무 멋지게 잘 뛰는 영상을 보면서 자세를 따라 하려 애쓰다가 그 자세가 나오지 않아 자포자기 할 것 같았다. 그리고 누군가의 기록과 비교되는 게 솔직히 말해 싫었다. 나 자신은 그 누구와도 비교거리조차 되지 않았지만 순수하게 뛰고자 하는 동기와 열망을 누군가와 비교하면서 나의 마음을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었다. 거기에 누군가는 무조건 뛰라 하고 누군가는 초반에 자세를 잡아야 한다고 하고 누군가는 이런저런 옷을 입고 신발을 신으라 했다. 그 많은 조언과 경험치를 고려하려면 아예 시작조차도 못할 것 같았다.
우선은 뛰어 봐야 한다. 스포츠 브랜드의 유명한 그 문장! 걍 하라고! 이건 오직 해 본 사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문장이다. 해 봐야 안다. 자신이 어떤 상태가 내 실력과 내 위치가 어딘지. 그런 다음에 하나둘씩 고쳐 나가도 된다. 나의 뛰고 싶은 열망에 스스로 찬물을 들이 붇지는 말라고! 이렇게 뛰어 보는 거야. 뛰다 보면 답이 나오겠지. 아무 계획도 대책도 없는 이 순간이 자유롭다. 늘 계획과 준비로 조심스러웠던 내 삶이 답답하게 여겨질 정도로, 이 대책 없는 뜀박질이 너무나 자유롭다. 평생 뛸 수 있으면 좋겠다. 아니, 평생이라는 미래를 기약하지도 말자. 지금 당장 뛰자! 오늘도 내일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