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록 스포츠에 입문들 하시오!
한 끗의 차이가 만들어 내는 변화는 얼마나 될까? 우선 한 끗은 얼마만큼을 나타내는 걸까? 표준 국어 대사전에 따르면 ‘끗’은 접어서 파는 피륙의 길이를 나타내며 단위성 의존 명사를 말한다. 피륙은 원단을 말하는데 특히 아직 자르지 않은 베, 무명, 비단 등의 천을 통틀어 말한다. 지금은 원단을 둥그렇게 말지만 가끔 한복 원단집을 가면 얇은 나무 판에 원단을 말아서 보관하는 곳도 있다. 그렇게 나무 판대기에 한번 말아 접은 길이를 말한다.나무 판대기의 너비마다 분명 오차가 있었을 것이고, 과거에 사용된 단위를 지금의 단위인 센티미터나 미터로 나로서는 정확히 환산할 수 없지만 한 끗의 차이를 말할 때는 아주 작은 미세한 차이를 말한다는 것은 정확하다.
한 끗 차이는 상황을 극대화하는 표현으로 자주 사용된다. 공모전 발표 시즌이 되면 한 끗 차이로 붙었느니 떨어졌느니 하는 문구가 자주 보인다. 한 끗 차이로 떨어진 사람에게는 다음 기회를 도전해 보라는 희망 고문을 선사하고 한 끗 차이로 붙은 사람에게는 오만하지 말고 계속 노력하라는 자중의 메시지를 은연중에 드러낸다. 이러한 미세한 차이, 디테일의 차이는 사람이 사람을 선발하는 과정에서 기준이 주관적일 수도 있기에, 운칠기삼이라는 말로 대치되기도 한다. 노력은 누구나 하는 기본 필수 항목이고 당락은 하늘에 맡긴다는 뜻이다. 노력과 운이 합작을 이루면 붙은 사람은 한 끗 차이로 상금과 데뷔의 영광을 누린다. 당선의 그 한 끗 차이 도대체 뭘까?
학교 시험이나 공식 기관에서 시행하는 시험에 한 끗은 한 문제 차이 정도 일 것이다. 한 문제 차이로 등급이 좌우되거나 당락이 결정된다. 그래도 사람이 읽고 판단하고 뽑는 것이 아니니 나름의 객관성이 보장된다. 물론 문제 출제가 어느 성향이며 어느 쪽에 더 많이 취중 되었는지 어느 정도 운과 사람의 주관 영역이기는 하지만 공모전이나 오디션 같은 주관적인 선발 과정보다는 객관적이다.
스포츠는 한 끗의 차이가 너무나 명확하고 명백하다. 눈에 보이는 한 끗 차이는 누구나 인정할 수밖에 없다. 만약 그 한 끗 차이가 인간의 눈으로 판명되지 않으면 비디오 판독을 통해 심판들이 확인하고 승부를 결정한다. 스포츠, 객관적이고 명백한 승부의 세계, 그래서 누군가는 이를 두고 냉정하다고 말하지만 냉정하다는 것은 결국 공평하다는 뜻으로도 해석된다.
어쩌면 이런 이유로 달리기에 빠져들었는지도 모르겠다. 말과 글의 세계는 매우 주관적이다. 내가 좋아하는 작품을 상대가 좋아해 주리라는 법은 없다. ‘아’와 ‘어’의 한 끗 차이로 긍정과 부정이 달라지기도 하고 글쓴이의 의도와 읽는 이의 해석이 같으리라 기대하는 어리석다. 어디에 장단을 맞춰 춤을 춰야 하는지, 리듬과 박자의 기준이 애매해 한동안 이 춤 저 춤 섭렵하며 막춤꾼이 되자고 비뚤어지기도 했었다. 노력을 한 거 같은데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 나오는 일이 잦아져서 지금은 ‘내 멋대로’ ‘주관대로’ 하며 오기의 단계를 걷고 있다. 어떤 날은 열심히 하다가 어떤 날은 모니터에 등 돌리고 있기도 하고 독자와의 밀당이 아닌 나의 노력과 밀당을 하고 있다고나 할까.
이런 계산과 밀당이 필요 없는 달리기 세계는 당혹스럽게 설렌다. 주관적인 감정과 편향이 제거된 이곳은 오롯이 노력 하나로 결과가 나온다. 조금 더 정신 집중하면서 자세를 잡는다. 힘들다고 바로 무너지는 게 아니라 조금만 조금만 한 끗 만 더 버티면 생각지도 못한 기록을 얻는다. 물론 이해가 전혀 되지 않을 만큼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날도 있다. 그런 날은 분명 전날 치맥을 배 불뚝할 정도로 했거나 수면이 불충분했거나, 워밍업을 제대로 하지 않은 날이다. 인과응보의 세계이며 한 만큼 결과를 보는 세계이다. 노력에 걸맞은 결과가 나오다니, 세상에나! 살면서 노력하지 않은 사람 없을 텐데, 우리 모두는 노력 대비 결과에 만족했나? 만족하지 못했다면, 인풋과 아웃풋의 오차 없는 세계, 달리기에 입문하시기를! 최소한 내 몸에 투자한 내 노력이 한 끗의 차이 없이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는 거 하나는 보장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