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쓰면서부터 사용하는 단어와 표현에 조심스러워진다.
자신 있게 이것은 이것이라고 주장하기보다는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는 여지를 늘 남겨둔다.
무엇하나 확신하지 않는 나의 성향 때문이다.
이는 반대로 누군가가
나에게 강한 확신과 신념으로 다가오면
세상으로 간신히 뻗었던 촉수와 더듬이를
재빨리 오므리고 피신처로 향한다.
피신처는 물리적인 혼자만의 공간일 수도 있고
빛의 속도로 외부 자극을 모두 차단하는 순간일 수도 있다.
감정은 스스로 일어나지 않는다.
모든 감정은 내가 무엇인가 접했을 때 일어난다.
그것이 내 안의 생각이건, 사물이건, 사람이건
외부 자극 없이는 가만히 있는 감정이
혼자서 움직이지는 않는다.
자극이 우선 감정을 만들어 내고
감정을 어떻게 처리하는지는 나중이다.
무엇하나 확신하지 않는 성향이라 해도
내가 확신하는 게 하나 있다.
나는 감정에 매우 취약하다.
이 사실을 얼마 전에야 인정했다.
아니, 깨달았다는 표현이 옳겠다.
인정은 마치 내가 사실과 진실에 맞서서
부인하는 듯한 어감이 든다.
인정이든 깨달음이든 내가 알아차렸다는 게 포인트다.
어렸을 때부터 울음과 토라짐이 많았던 나는
그런 이유도 모른 채 그런 모습을 극복하기에만 급급했다.
‘예민하다’ ‘까탈스럽다’ ‘유난이다’라는 말을 들으면
우선은 상당히 억울했지만
성격 파탄자나 사회 부적응자 대우를 받는 것 또한
견딜 수 없어서 성격개조가 목표였던 때가 있었다.
자기 개발서와 동기 부여 책들부터
심리학 서적까지 몰입하면서 나를 바꾸며
크고 작은 사회 집단 속에서 적극적으로 적응했다.
아니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모든 게 멈춰 버렸다.
한 건전지 회사의 광고에서
분홍 토끼가 정신 사납게 작은북을 치다가
양손이 허공에 멈춘 채 가만히 있는 그 모습과 똑같았다.
의식은 또렷했는데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저혈압으로 쓰러진 것도 아니고
심장마비로 의식을 잃은 것도 아니었다.
세상이 정신없이 빠르게 돌아가는데
나만 혼자 멈춰버린 영화 속의 장면 같았다.
말 그대로 나는 방전이 되어 버렸다.
외부 자극을 더는 소화할 능력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제야 내가 두껍고 무거운 갑옷을 입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외부 자극을 방어할 목적으로 입었던 갑옷의 무게에 내가 짓눌린 거다.
두터운 갑옷을 벗어내자 쪼그라든 내 모습이 드러났다.
나의 맨몸은 초라했지만, 마음이 가벼웠다.
그 가벼운 마음으로 세상을 날아다닐 듯했지만
피부에 자체적인 보호막이 생길 때까지 나는 기다렸다.
갑옷 대신 선택한 건 집이었다.
안전하고 익숙한 나만의 공간에서 홀로 지내면서
내가 왜 갑옷을 입게 되었는지 알아낸 것이
지금까지 살아온 모습과 정반대인
내향형 인간이라는 사실이었다.
그것도 감정에 매우 잘 휘둘리는 인간이라는 사실.
감정에 더는 휘둘리고 싶지 않다는 소망이 생긴 순간이었다.
'감정에 몰입되지 않고 감정에 빠지지 않고
의연하다 못해 초연한 자세로 살겠어!'
라고 혼자 외쳐봤자,
세상으로 나가면 외부 자극을 버티는데
온 에너지를 다 써 버려 힘들었다.
무엇하나 선을 긋고 확정 짓는 것에 익숙하지 않지만
나는 세상을 향해 나에게
선을 그어 달라고 소리 없는 아우성을 쳤다.
물론 아무도 그 선을 지킬 거라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내 감정의 사용법을 적어보기로 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와 함께 있을 때 내가 감정에 휘둘리는지
그리고 그 감정이 나를 어떻게 조정하는 관찰해 보기로 했다.
수동적으로 감정에 휘둘리는 것 보다
주체적으로 나의 감정을 관찰하다 보면
조금은 덜 흔들리고 의연하게 내 길을 갈수 있을 거라 기대해 본다.
사람마다 상황이 다 다르기에 정답도 해답도 없지만
이런 누적된 관찰 속에서 어느 정도의 방향을 찾아 낼수 있을 것 같다.
내향성 인간이 이해가 가지 않을 때,
'제는 왜 저러지?'라고 이해 불가한 상황 속에서
이 책을 펼쳐 보면서 조금이라도
이해의 불씨를 찾을 수 있다면 좋겠다.
그리고 이 책으로 나와 비슷한 내향형 인간형들이
'나도 그래, 맞아' '딱 내모습이네' 라는 공감으로
예민하고 유난스럽다는 세상의 말에
더는 상처 받지 않기를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