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는 줍니다만...

by VIVA

일요일 오후

따듯한 바닥에 누워 책을 보다가

기지개를 켜던 참에

주중에도 벙어리인 전화가 울렸다.

벌떡 일어났다. '누구지?...'


책상으로 다가갔다.

발신인은 통성명도 하지 않은

'컴퓨터 수리 기사님'이었다.

순간 망설였다. '왜? 이 시간에?....'

그러는 사이 전화가 끊겼다.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바닥에 엎어진 책을 집어 드는 순간

다시 전화가 울렸다. '흠....'

마치 무대 뒤에서 관중이 기다리는 강연자가

잠시 숨을 고르고

스포트 라이트를 향해 걸어 나가는 것 마냥

나는 큰 숨을 들이마시고 전화를 받았다.

'안녕하세요, 저 기억하시죠?...'


나는 그를 잘 모른다.

컴퓨터에 문외한인 지라

컴퓨터를 구매할 때 몇 번 조언을 구했고

구매한 컴퓨터에 문제가 있어 수리를 맡겼다.

서로에게 사회적으로 친절하게 거래를 한 관계,

딱 거기까지 였다.

그는 아이의 외국어 교육에 관해 조언을 구했다.

나는 안심하며 나의 생각을 말했고,

사견이라는 단서까지 달면서 책임의 무게를 덜어냈다.


이야기의 주제가 그의 연애사로 바뀌고 있었다.

'아이코....' 나는 몹시 당황스러웠다.

그는 자신의 연애사를 나와 상담하고 싶어

외국어 이야기를 꺼낸 것 같았다.

듣기는 했지만

도대체 나에게 왜 이런 고민을 '의뢰'하는지

'왜 나한테??....'라는 질문의 해답만 얻기 위해

대화의 안테나가 작동했다.


한 시간이 넘어가고 있었다.

그는 멈출 줄 몰랐고 나는 끊어낼 줄 몰랐다.

책상에 앉아 진지하게 듣다가

스피커폰으로 전환하고 뭉친 어깨를 풀기 위해

간단하게 스트레칭을 했다.

그는 때로는 달떠서 때로는 슬퍼서

때로는 몽상적으로 때로는 현실적으로

연인의 행동을 일일이 다 설명했다.

'이해가 안 가요, 도대체 왜 그러는 걸까요?'

나도 그렇게 질문하고 싶었다.

왜 나에게 이런 어려운 고민을 풀어놓는지...


그렇다고 내가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건 아니었다.

아침 드라마에서나 볼 법한 막장과

20대 로코에 나올 법한 달달함이

제대로 뒤범벅된 에피소드가 줄줄이 나왔다.

세상에 이런 일이 진짜로 있나 싶어

신기하고 흥미롭기까지 했다.

'진짜요?' '어머나!' '어떡해!'를 남발하며

바닥에서 요가를 하다

중간중간 멈추며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그가 갑자기 큰 숨을 내쉬었다.

나는 행여나 나의 가벼운 태도가 들키기라도 한 듯

전화기를 후다닥 들어 귀에 딱 가져다가

진중하게 그의 이야기를 들었다.

한숨 돌린 그는 나에게 너무나 고맙다고 했다.

후련하게 마음과 생각이 정리되었다며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다고 했다.


'앵????? 내가 뭘 했다고?....'

나는 정중하게 거절하고

뒤늦게 찾은 연애 감정을 축복한다고 전했다.

그리고 그는 내가 묻기도 전에

내가 궁금했던 점에 대해 답을 했다.

'사회적 윤리적 잣대 없이

이야기를 잘 들어줄 것 같고

연륜과 경험으로 편견 없이

자신을 대할 거 같아서'

거의 한 시간 반 만에 전화는 끝이 났다.

나는 기진맥진했다.


참으로 고되다,

타인의 바닥을 오롯이 홀로 보고 듣는 일은!

내 의견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지 않는다.

감정과 생각이 빤히 얼굴에 드러나는 타입이라고 해도

가급적이면 말로 표현하지 않는다.

표현하는데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는 타입이라

말을 안 하고 아끼는 면도 있다.

누군가는 나에게 계산된 행동 아니냐 묻기도 하지만

이건 내 방어 능력이 매우 약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과 속을 보였을 때

상대의 반응을 제 때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누울 자리라고 내가 딱 믿지 못하면

다리, 아니 발가락 조차 뻗지 못한다.


그래서 어떤 자리에서건 이야기를 듣는 편이다.

꼭 가야 하는 모임이 아닌 이상에는 참석하지도 않고

억지로라도 모임에 앉아 있어야 하는 상황이면

작은 눈이 더 작아지도록 씩 웃고만 온다.

나는 나를 버티느라 고개를 끄덕이며 웃는 건데

이런 모습에 많은 오해를 산다.

'잘 들어준다!'


많은 이들이 나에게 밑도 끝도 없이 고민을 풀어놓으면

그들의 나를 향한 믿음과 신뢰를 저버릴 수도 없고

그들의 고 민또 한 무시할 수 없어 듣기는 한다.

감정이입이 되지 않으려 버티고 버티다가

결국 그들의 감정에 휩쓸려 힘들어한다.

그들은 고민을 털어놓았기에 가벼워졌고

나는 그들의 고민으로 무거워진다.


사회화가 되다 말았는지

아니면 내 천성인지 아직도 모르겠다.

누군가 나의 방어벽을 밀고 들어오면

그를 다시 쫓아내지 못하고

황당하고도 뻘쭘하게 있다가

그가 나가 사라지고 나면

방어벽을 다시 세우느라 온 힘이 다 빠진다.

이런 일이 반복되다 보면

분명 요령도 생기고 꾀도 생길 텐데

여전히 나를 방어하거나

나만의 심적 공간을 지키는데 미숙하다.


소싯적(?)에 그 활달한 사회생활이 전생인 듯 낯설다.

지금 나 홀로 지내는 것이 참으로 온전하게 좋다.

시도 때도 없이 뻗어지는 안테나와 예민한 촉수를

다 내려놓고 사니 얼마나 편한지...

그런데도 맥락 없이 나를 찾아내는 사람이 있을 때는

골방에서 조차 바로 긴장을 타니

나의 내성적인 성향이 천성임을 인정할 수밖에




하루 지나 그로부터 연락이 왔다.

때 늦은 저녁을 넷플릭스와 함께 하고 있었다.

그는 나의 상담(?) 덕분에 용기 내어 대화를 했고

그녀와 관계 회복의 조짐이 보였고

그날 오후에 둘이 손잡고 철학관에 들렸다고 했다.

그리고 그 둘의 합은 '천생연분!'

재혼하면 초대하겠노라 하더라.

음식 먹는 소리 티 나지 않게 하려

된 밥을 잽싸게 꿀꺽 삼켰다.

'아... 네... 축하드려요...'

누구도 부여하지 않은 임무를 완수한 느낌이었다.

'휴우... 다시는 전화 오지 않겠군'

식탁을 치우고 설거지를 하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애초에 철학관을 가지 왜 나한테 굳이...'


얼마 전 나에게 '인생 상담소'를 차려보는

지인이 떠올랐다.

생각이 떨궈지도록 머리를 절래 절래 흔들었다.

'이걸로 충분해...

나도 내가 감당이 안되는데.누구의 삶을 감히!!!'

그렇게 영화 한 편을 보고 잠을 자려 누웠는데

전화를 하면서 바로 반응하지 못한 아쉬움이 남아 있었다.

'아... 철학관 전화번호 물어볼걸.....

아. 내 팔자야!...'





이전 13화심리 테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