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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그럴듯한 제이 May 16. 2019

나도 나를 잘 모르겠어서

검사지 작성과 그 결과 01

네 종류의 검사지는 최근 몇 년간 절대 앉을 일이 없던 책상 앞에 내가 지그시 앉아있는 시간을 가지게 했다.

처음엔 집 근처 도서관에 짐을 열심히 꾸려가서 한두 시간, 그리고 아무도 없는 고요한 집 안 식탁 위에서 한 시간.

집중이 잘 되다가도 어떤 질문들은 도무지 알 수가 없어서 시간을 많이 잡아먹게 만들었다.

정말 별 것 아닌 검사지인데, 평소에 글쓰기를 좋아하고 사색하는 것을 좋아하던 나이기에 의심의 여지없이 나 자신을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 또한 큰 착각이었음을 여실히 깨닫게 되는 시간이었다.


거기다 나름 꼼꼼하다고 생각했는데 웬걸 빠뜨린 문항이 군데군데 있었다. 알맞은(나에게 가장 가까운) 선택지를 선택할 수가 없어서 나중에 다시 읽어보고 선택하려 남겨두었던 문항들.

분명 꼼꼼히 체크했다 생각했는데 병원에 가져가니 안내해 주시는 직원분께서 나를 불러 밀려 쓴 게 아닌지 확인해보라고 할 때 알았다.


검사지를 작성하고 제출하는 기간 동안 스스로가 왜 이리 제정신이 아닌 것 같고 내가 알던 내가 아닌 것 마냥 산만하고 어수선할까 싶었다.

문항을 읽고 간단히 체크만 하면 되는 일에 어찌나 시간을 잡아먹던지.

보통 2시간에서 길어도 세 시간이면 끝난다는 그 검사지들을 나는 보통 사람보다 시간을 더 많이 써가며 체크해야 했다.


다행히 글로 풀어쓰는 설문지는 그나마 빨리 끝낼 수 있었다. 그보다 나에게 해당하는 간단한 단어들을 선택하는 것이 난 더 어려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모든 사고가 정지해버리는 듯한 착각마저 들 정도였다.

예를 들면 분명 선택지에 나와있는 a와 b 중에 난 두 가지를 다 가지고 있고 그 경중을 따지기 곤란할 정도로 능력치가 같은 것처럼 느껴져 어디에 더 가까운지를 잘 모르겠는 경우. 혹은 두 가지 다 아닌 거 같은데 굳이 선택해야 할 때 난 어느 쪽인가를 택해야 하는 경우가 그랬다. 그리 깊이 생각할 단어들이나 문장이 아닌데도 무슨 그런 어려움이 있다고 그랬는지.


게다가 더 어이가 없었던 것은 세 가지 설문지를 끝내고 나중에 하려 남겨둔 설문지를 상담가기 전날 새벽에 펴보니 제일 긴 몇 백 문항짜리 설문지여서 결국 다음 날 미리 작성해 두었던 세 가지만 제출하고 나머지 하나는 한 주가 더 지난 뒤에 제출하게 되었다는 거다.

덕분에 검사 결과를 상담치료를 시작하고 한 달이 조금 더 지난 4번째 상담 때 들을 수 있었다.


가벼운 마음으로 갔는데 다행히 정상의 범주에 속하는 우울이라고 하셨다. 뭐 다행이라고 하기도 우습지만 그렇다고 하시니 아 그랬구나 했다.

속으로는 상담센터를 3주 정도만 빨리 갔어도 다른 결과가 나왔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긴 했지만 어찌 됐든 경도라 하니 상태가 좋지 않은 것보단 나으니까 스스로를 위로했다.


정상의 범주니 걱정 말라며, 충분히 더 나아질 수 있다고 말해주는 선생님을 앞에 두고 얕게 웃어 보였다.  요즘 들어 선생님께서 자주 하시는 말씀이 그 정도의 무게도 견뎌냈는데 더한 것도 극복해 낼 힘을 얻었다는 말이 사실 난 그리 듣기에 좋게 들리진 않는다. 여전히 무겁게 나를 짓누르고 있는 그 과거 기억들의 무게들을 다시 겪게 된다면 난 정말 극복할 수 있을까.

아마 한 차례 더 같은 무게로 나를 눌러온다면 난 사실 견뎌 낼 자신이 없는데 하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선생님께는 굳이 말하지 않았다.


어찌 보면 네 번째 상담이 끝날 때 선생님이 하셨던 말이 맞는 말일지도 모르겠다.


여기와 서는 솔직해지셔야 돼요. 괜찮은 척, 괜찮아진 척하지 않아도 돼요. 그러니 혹시나 억지로 웃거나 밝은 척하는 거라면 여기서 만큼은 편하게 계시다 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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