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것의 소중함
내가 사랑하는 날 것의 소중함은 다양하다.
가령 사람의 온기, 강아지나 고양이의 사람보다 높은 체온이나 부드러운 촉감의 정수리부터 등까지 이어지는 곳이라든지 혹은 갖 지은 따끈한 밥과 반찬들, 바로 연주되는 라이브 음악들이 그러하다.
그 밖에도 사랑하는 날 것들을 나열하자면 한참 걸리겠지만 그 모든 것의 공통점을 꼽으라 하면 아무래도 물리지 않는 진정성이라고 해야 할까.
대체 그게 무슨 말이냐고 당최 알 수 없는 문장이라고 할 수도 있다. ‘물리지 않는 진정성’이라니.
물론 요즘 세상에 사람의 손을 타지 않는 것이 없지만 사회가 원하는 만큼 빠르고 신속하게 어떤 과정을 생략하고 행할 수 있고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는 것들이 이미 포화상태다. 그러니 쉽게 말하자면 굳이 시간을 들여서 정성을 쏟아낸 결과물들을 난 ‘날 것’이라고 표현했다고 볼 수 있겠다.
어떤 과정으로 한 번 더 가공되지 않아 불편함을 감수해야 하는 행위 혹은 대상인 동시에 가공되지 않은 고유의 에너지가 남아있는 행위나 대상.
날 것들은 본연의 에너지가 있다. 그래서 심금을 자극하고 감동하게 만드는 재주가 있다. 서툰 솜씨든 흐트러진 모습이든 중요치 않다. 그 존재에 가치를 두게 해 자신도 모르게 그 힘에 동하는 것이다.
가만 생각해보면 그랬다. 점점 나이를 먹어가면 갈수록 예전에는 좋아했던 간편한 데워먹는 음식들, 그때의 취향에 맞았던 인스턴트같이 자극적인 드라마나 간편한 mp3 플레이어가 금방 질려버려 한동안 쳐다보지도 않았던 일들도 왠지 지금에 와서야 이해가 가기도 한다.
원래의 성향이 한 가지 깊게 정착하여 파고들기에 시간이 많이 걸리는 편인 이유도 있겠지만 나뿐만 아니라 그 누구라도 집밥이 질린다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리워하면 그리워하지 그 누가 엄마의 식탁을 싫증 낼까. 집밥은 그런 의미에서 날 것에 가깝다. 가공되지 않은 엄마의 손 맛은 그 자체로 고유하니까.
날 것들이 뿜어내는 그 고유의 에너지는 어쩌면 천천히,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날로그에서 오는 귀찮음 들을 하나하나 벗겨내어 알맹이를 굳이 빚어내는 일에 닮아있으니까. 그 과정 속에 어떤 기운이 모여 날 것의 에너지가 되는지도 모르겠다. 몰입과 정성 들임으로부터 탄생하는 날 것의 힘. 결국 우린 그 에너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 근원으로부터 태어난 고유의 존재 아닌가.
‘날 것’은 결국 살아있는 것이고 살아있는 존재는 살아있는 존재가 필요한 것처럼. 무릇 삶을 가진 자들은 본능적으로 그러하듯 삶들을 서로 갈구할 수밖에 없는 존재의 굴레인 것인가 한다.
어떤 운명론을 믿는 편은 아니지만 그런 굴레라면 한 번쯤 못 본체 하고 넘기며 미소 지을 수 있을 것 같은 그런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