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은 글을 써본 사람인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초등학교 과정을 이수한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원하든 원치 않든 일기나 독후감을 써봤을 테니까.
타의에 의해 쓰는 걸 제외한다면, 나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공책에 소설을 끄적거리기 시작했다. 그럼 그게 뭔가를 자발적으로 써본 최초의 작품이냐 묻는다면-아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나는 같은 반 친구와 펜팔을 주고받았다. 휴대폰이란 게 등장하긴 했지만 상용화되지 않았고, 엄마의 귀가가 늦어질 때면 나는 엄마의 삐삐에다 '82535(빨리오세요)'라고 보내곤 했다. 그런 시절이었다.
펜팔의 룰은 간단했다. 둘만의 펜팔 노트를 만들어 하고픈 말을 쓴 뒤 노트를 건네주는 것을 반복한다-그게 전부였다. 그것은 다른 누구도 알 수 없는 둘만의 아지트였고 비밀이었다. 그 펜팔노트는 오랫동안 잊혔다가 한참 뒤에 내가 성인이 되고 나서 발견됐는데, 지금은 또 어디에 있는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귀중한 역사적 자료인데 잘 보관할 걸 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쨌든 그 펜팔이 나의 최초의 자발적 글쓰기였다.
한 가지 아쉬운 점은 펜팔을 했던 친구가 남학생이었다는 것이다.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쓰기 시작한 소설은 게임 소설이었다. 그 시절 나는 전국에 PC방이 우후죽순 생겨나는 데 지대한 공헌을 한 '스타크래프트'에 미쳐 있었다. 스타크래프트는 인간·외계인·괴물 세 종족 중 한 가지를 선택해 전쟁을 벌여 상대방 또는 상대팀의 항복을 얻어내는 게임인데, 도대체 이들은 왜 싸우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부여해 주는 '스토리'가 있었다. 그 스토리는 괴물족을 다스리는 여왕이 인간과 외계인 연합군을 궤멸시키면서 막을 내리는데, 나는 그로부터 50년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를 상상해서 쓰기 시작했다.
그 소설을 쓰기 시작했을 때, 누군가에게 보여준다거나 연재한다는 생각은 당연하게도 전혀 없었다. 그것은 아무도 모르는 나만의 은밀한 취미였고 숨겨진 우주였다. 시간이 흘러 고등학교 2학년(이 때는 중1 때보다 더욱 스타크래프트에 미쳐 있었다)이 된 나는 이렇게 오랜 시간 쓴 소설을 혼자만 알기에는 아깝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당시 스타크래프트 관련 다음카페 중 가장 큰 곳은 회원수가 100만 명이었던 '스타크래프트 맵진'이었다. 맵진 카페에는 소설을 쓸 수 있었는데, 인기가 많은 소설만 따로 모아둔 게시판도 있었다. 당연히 인기 소설은 일반 소설보다 조회수가 높았고 독자들의 댓글도 많았다. 나는 인기 소설 작가들을 보면서 부러움과 동경심을 품었다. 그리고 '스타크래프트-그 후 50년'이라는 제목으로 4년간 공책에 써왔던 소설을 연재하기 시작했다. 내 카페 닉네임은 '숙박비무료'였다. 왜 그걸로 했는지는 모른다. 전설의 시작이었다.
'스타크래프트 그 후 50년'은 맵진 독자들로부터 그야말로 선풍적인 인기를 얻어 인기 소설로 등극했다. 사실 정말로 '선풍적인 인기'였는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선풍적인 인기였으니까 인기 소설로 선정되지 않았을까? 역사는 기록하는 사람 마음인 법이다.
나를 지지하고 좋아해주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은 마약과도 같아서 나는 소설 연재를 중단할 수 없게 되었고, 결국에는 '그 후 50년'을 완결한 뒤 '그 후 100년'까지 집필하여 우주를 배경으로 한 기나긴 대서사시를 완성하게 된다. '스타크래프트 그 후 100년' 또한 당연히 인기 소설에 선정되었다. 그렇다. 나는 데뷔작부터 히트를 친 작가였던 것이다.
두 작품의 성공으로 탄력을 받은 나는 야심차게 '한 학교의 소심아에서 전국 스타 1짱까지'라는 차기작을 맵진에 연재했지만, 스토리가 산으로 가버리는 바람에 처참히 실패하고 말았다. 학교에서 괴롭힘을 당하는 소심한 주인공이 전국에서 스타크래프트를 제일 잘하는 사람이 된다는 소설을 쓰려고 했는데, 왜인지 나중에 가서는 지구가 멸망하는(......) 세기말 생존물이 되었으니 스토리가 동네 뒷산 정도가 아니라 한라산을 등반해 백록담으로 다이빙해 버린 셈.
이젠 맵진을 검색해 봐도 나오지 않는 것을 보니, 아쉽게도 내가 맵진에 썼던 소설들은 이제 영원히 볼 수 없을 듯하다. 따로 백업해 둔 것도 없다. 혹시 2000년대 초중반에 회원수가 100만에 육박했던 스타크래프트 카페 '맵진'의 행방을 알거나 그 소설들을 다시 볼 수 있는 방법을 아는 이가 있다면 내게 알려주시길.
다음으로 내가 쓴 소설은 심령물이었다. 그걸 올린 곳은 간 크게도 지인들이 다 보는 미니홈피 일기장이었고, 등장인물들 이름도 다 지인들이었다. 나이가 좀 들고 나서 돌이켜보자면 도저히 할 수 없는 짓이지만, 한국 나이로 21살일 때는 할 수 있는 일이었나 보다. 이 소설은 다행히도(?) 한글 파일로 백업해 둬서 자료가 남아있다. 이 글을 쓰기 위해 다시 읽어보았는데, 맞춤법이나 형식은 조악하기 이를 데 없으나 내용만큼은 흡인력이 상당하다. 개연성과 핍진성에 딱히 흠잡을 구석이 없고 복선을 자연스럽게 회수했으며, 반전도 마음에 든다.
그 소설의 내용은 이렇다. 집에서 먼 대학교에 합격한 남주(남주인공)는 아들이 죽은 지 얼마 안 된 집에서 하숙생활을 하게 되는데, 고2인 하숙집 딸에게 수학을 가르쳐주면서 서로 친해진다. 대학교 여행 동아리에 가입한 남주는 활발한 성격의 여주가 자신에게만 냉담한 얼굴을 보여 당황하고, 여주는 갑자기 태세를 전환해 마치 남주에게 관심이 있는 듯 다가온다. 하지만 남주가 고백하려는 찰나, 여주는 "너를 이용해서 미안해."라며 이해할 수 없는 사과를 하고 떠난다. 남주는 침대와 벽 사이에 떨어진 휴대폰을 줍기 위해 침대 매트리스를 들어 올렸다가 여주와 하숙집 아들이 함께 찍은 사진을 발견한다. 사진을 들이밀며 하숙집 딸을 추궁한 남주는 진실을 듣게 된다. 하숙집 아들은 여주와 연인사이였으며, 귀신이 된 그는 여주에게 미련을 버리지 못해 여주를 보기 위해 남주에게 들러붙어 돌아다니다가 여주에게 모습을 드러내는데, 이는 귀신들에게 금기시된 행동이었다. 이를 본 여주는 죽은 연인을 보고 싶다는 생각에 남주에게 다가갔다가 죄책감이 들어 떠나고, 금기를 어긴 귀신도 사라져 버린다는 이야기이다. 다행히 남주는 평소 남몰래 남주를 좋아하던 여행동아리 총무와 사귀면서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
이 소설은 대학교 2학년이었던 내가 느낀 대학생활의 모습과 욕망들이 녹아있고, 아직 덜 다듬어져 투박하고 날것 그대로인 문체가 오히려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이 소설을 읽은 한 학번 후배는 내게 작가를 해도 되겠다고 했는데, 그 칭찬은 내 기억과 가슴에 아직까지 오래도록 남아있다.
그 사이 몇 편의 소설을 쓰긴 했지만 어디에도 공개하지 않았고, 스스로도 보관할 만한 감흥이나 가치를 느끼지 못해 남아있는 것은 없다. 20대 후반, 나는 개신교 신앙에 심취하여 동네 교회 내 청년부 활동에 몰두하면서 동갑인 C군을 알게 된다. 당시 C군은 신학생이었지만 전통적인 형태의 사역이나 목회를 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나와 C군은 같은 신을 믿는다는 사실 외에는 공통점이 전혀 없었다. 나는 조심스럽고 신중하며 타인의 시선을 많이 의식하는 반면 C군은 그 누구에게도, 어떤 틀에도 얽매이길 거부하는 자유로운 영혼이었다. 그는 패션에 관심이 많았고 그림 그리는 것을 좋아했다. 우린 서로 교회 밖에서 만났다면 절대 친해지지 못했을 거라고 말하며 웃곤 했다.
C군과 나는 어떻게 하면 우리 교회 청년들을 영적으로(개신교식 표현을 빌리자면) 부흥시킬 것인가 늘 머리를 맞대고 고민했고, 진심으로 열과 성을 다해 신과 교회와 청년들을 사랑하려 노력했다. 우린 항상 신, 교리, 교회, 개혁, 각성, 혁명, 부흥, 영혼, 생명, 사람에 대해 대화했고 가끔 예술이나 철학에 대한 이야기도 나눴다. 그와 나는 끝없이 대화했고 먹고 마시며 걸었다. 자주는 아니었지만 가끔 맥주를 마시면서 신 이야기를 하기도 했다(어허, 불경하도다!). 나는 C군뿐만 아니라 교회 청년 여럿과 어울렸다. 우리는 예배가 끝나고도 누구 하나 집에 갈 생각이 없이 모여 저녁을 먹고 새벽 2시, 3시까지 청년부실에서 놀았다. 나는 그 시절을 정말 특별하게 여기고, 누구나 경험할 수 있는 게 아니었다고 생각한다. 나중에 내가 그 교회를 나오게 되기 전까지 2년 반 동안, C군을 포함해 그 교회에서 알게 된 사람들과 보낸 시간들이 내 인생에서 가장 기묘하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C군과 이런저런 온갖 주제들로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예전에 소설을 썼었다는 이야기도 했던 것 같다. 그걸 들은 C군은 내게 글을 다시 써보라고 했다. 상투적으로 하는 소리가 아니라 진담이었다. 담임목사님 딸인 Y양도(우린 그렇게 셋이서 자주 어울리곤 했다) 내게 글을 써 보라고 했다. 그들의 말에 마음이 움직인 나는 인스타그램 계정을 만들고 짧은 글들을 올리기 시작했다.
글스타그램을 표방하며 꾸준히 글을 쓰던 어느 날, 어느 출판사에서 책을 내볼 생각이 없냐며 DM을 보내왔다. 당시 나는 내가 책을 낼 수 있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 그저 내 영혼이 즐거워하는 일을 꾸준히 했을 뿐이다. 출판사 대표와 대화를 나눠보니 요약하자면 돈만 있으면 유명하지 않아도 자비출판이란 걸 할 수 있는 모양이었다. 전혀 생각지 않았던 일이 현실이 될 수 있다고 하니까 솔깃해진 나는 내 이름으로 된 책 하나 세상에 남기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부터 원고 완성을 목표로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책을 쓰면서 살아있음을 느끼는 순간들이 많았다. 내가 가만히 있어도 소설 속 인물들은 알아서 살아 움직였고 이야기를 만들어 갔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뒤 총 11편의 소설로 된 책이 완성되어 출간되었다. 제목은 내가 책을 쓰면서 느낀 대로 <살아있어 볼까요>였다. 가진 돈이 많지 않아 100부밖에 인쇄하지 못했지만 내게 그건 별로 중요한 사실이 아니었다. 막말로 500부 뽑았다고 500부가 팔렸겠는가? 아무도 모르는 무명작가인데.
그렇게 내 이름이 박힌 책과 80만 원의 적자가 세상에 남았다. 당신은 이 글을 읽다가 혹시 뭔가 이상한 점을 발견하지는 않았는가? 그렇다. 나는 공무원 수험생 신분일 때부터 책을 쓴 것이다. 미친놈이라는 생각이 드는가? 맞다. 미친 짓이었다. 만약 내 자식이 중요한 시험을 준비하면서 책을 쓰겠다고 한다면 나는 뺨을 후려치지 않을 자신이 없다.
책을 낸 지 5년이 지났다. 그간 글을 안 쓴 것은 아니다. 2019년 공무원 문예대전(현 공직문학상) 단편소설 부문에 응모했지만 보기 좋게 탈락했다. 소설은 주인공 남편이 바람을 피우자 주인공도 맞바람을 피운다는 내용인데, 이걸 썼을 때는 마음에 들었지만 이제 와서 보면 별로 쓰고 싶지 않은 글을 억지로 썼다는 느낌이다. 등장인물들은 개성이 없고 전개는 진부하다. 이런 소설이 입상한다면 그건 그것대로 문제가 있는 대회이리라.
6년 차 보호관찰관이 되는 과정에서 보호관찰의 철학이나 방식에 대해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없지만,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게 됐다. 자아실현이나 행복 찾기 따위는 퇴근하고 나서 해야 한다는 것. 누가 뭐래도 사무실에서 하는 모든 행위들은 '일'이고 지침이나 매뉴얼을 벗어날 수 없다. 대상자와의 관계에서 아무리 큰 보람을 느껴도 결국 업무라는 틀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내가 발견하고 싶은 의미는 틀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퇴근하고 게임, 운동, 독서, 음악감상, 드라마와 영화 시청 등 여러 가지를 해봐도 결국 나에게 있어 사는 이유 발견에 가장 근접한 것은 글쓰기뿐이다.
중학교1학년 때부터 노트에 소설을 썼던 걸 보면 나는 애초에 글을 쓰는 사람으로 태어난 걸지도 모른다. 이제 브런치란 곳에서 새로운 시작을 해보려 한다. 혼자서 끄적이던 소설을 인터넷에 연재했을 때 벌어진 일, 인스타그램에 글을 쓰다 벌어진 일처럼-브런치에 글을 쓰다가도 뭔가 멋진 일이 생길 수 있지 않겠는가.
'스타크래프트 그 후 50년'을 썼던 소년은 이제 '책 출간 그 후 5년'을 써볼 생각이다. 내 롤모델은 무라카미 하루키이다. 하루키의 소설집을 보면 정말 아무거나 막 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그게 너무 부럽다. 나는 하루키와 다르게 이상하게도 글감이 떠오르면 그걸 글로 쓰면 안 되는 이유를 찾곤 한다. 그래서 내가 진정으로 되고 싶은 것은 아무거나 닥치는 대로 쓰는 사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