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민 살아진다

by 단기소년원송치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2025. 4. 24. 김포시 대곶면 소재 프라이팬 코팅 공장에서 불이 났다. 1명은 경상을 입었고 12명은 대피했으나, 30대 남성 1명과 60대 남성 1명은 전신화상을 입었다.


https://www.yna.co.kr/view/AKR20250424142651065

전신화상을 입은 30대 남성은 바로 내 19년 지기 친구 L이었다. 60대 남성은 사망했지만 L은 의식이 없는 채로 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전신의 90% 이상이 3도 화상을 입어 상황이 매우 좋지 않았다. 회사 휴가를 쓰고 병원으로 달려갔지만 중환자실 면회는 가족 1인만이 가능했고, 나는 L의 아내 K와 L의 부모님을 만나 위로를 건넸다.

L은 몇 번의 큰 수술을 했고, 어느 날은 K로부터 발가락을 움직였다는 소식이 들려와 나를 비롯한 친구들은 어쩌면 L이 깨어날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품었다. 하지만 폐를 비롯한 장기의 손상이 심해 산소포화도가 올라오지 못했고, 결국 5월 4일 L은 세상을 떠났다.


2014년, 아빠가 돌아가셨다. 2013년 여름 간암 말기 판정을 받고 3개월도 못 산다고 했는데, 9개월을 더 사시다 가셨다. 9개월이란 시간이 있었기 때문에 아빠를 보낼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있었다. 대학 선배 중 한 명이 내가 별로 슬퍼 보이지 않는다며, 내 동기에게 말했다.

하지만 L은 2025년 4월 24일 갑자기 나와 친구들의 삶에서 사라져 버렸다. 작별 인사도 하지 못했고 보내줄 마음의 준비도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전날이었던가 이틀 전이었던가, L은 단톡방에 날씨가 너무 좋으니 놀러 가자고 했다. 우리들 중 누군가가 갑자기 사라지게 된다는 것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그 화재는 예고 없이 덮쳤고 L을 가져갔다.


화재가 났던 날로부터 지금까지 많은 감정을 느꼈지만 되새길수록 고통스러운 감정들이고 너무나 소진되어 그것들을 전부 다 글로 쓸 힘은 없다. 내 가슴에는 커다란 구멍이 뚫렸고, 우리 친구 무리의 대장 노릇을 했으며 유쾌한 농담을 좋아했던 L이 이제는 없다는 사실에 적응하는 중이다. 오늘 함께 있는 친구가 내일부터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우리는 부모님이 효도할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는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친구도, 배우자도, 자식도 다 마찬가지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먼저 떠날 확률이 당연히 높겠지만, 말 그대로 확률일 뿐이고 우리 삶에 어떤 일이 닥쳐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드라마 '폭싹 속았수다'에서 애순이와 관식이는 막내아들 동명이를 잃는다. 실의에 빠져 누워있는 애순이에게, 늘 애순이를 못마땅히 여기고 핍박하던 시어머니는 이렇게 말한다.

"살어라. 살아야지 어쩌겠니. 니 입만 쳐다보고 있는 산 자식이 또 둘이다.

살암시민 살아진다. 살민 살아져."


잘 가라, 내 친구야. 난 여기 좀더 있다가 갈게. 살아지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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