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수 좋은 날

by 단기소년원송치


2023. 11. 6. 월요일. 오늘은 오래간만에 깊은 잠을 잔 것 같다. 나는 숙면과는 거리가 먼 삶을 사는 편이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아본 게 평생에 열 번도 되지 않는 것 같다. 꿈을 꾸지 않는 날도 거의 없는데, 이 이야기를 어떤 직원에게 했을 때 그녀는 나를 굉장히 신기한 사람으로 바라봤다. 그래서 누구나 매일 꿈을 꾸는 건 아니란 사실을 알게 됐다.

물론 오늘 아침 개운하다는 느낌을 받으며 기상했던 건 아니다. 새벽에 한 번 깼지만, 아침까지 거진 5시간 정도를 깨지 않고 쭉 자는 데 성공했다. 최근 일주일 가까이 2시간마다 잠에서 깨서 이러다가 수면클리닉을 가봐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까지도 하던 참인데, 오늘 5시간을 내리 자면서 악순환을 끊어낸 것이다.

비를 뚫고 7시 45분쯤 출근을 했는데 컨디션이 최근 며칠과는 확실히 다름을 느꼈다. 2시간마다 깬 날은 몸이 찌뿌둥하고 에너지가 떨어지는 느낌이었는데, 오늘은 왠지 할 일을 다 무난하게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활력이 있었다.





오늘의 오전 업무는 출장이었다. 뉴스에서 11월에 이런 비가 오는 일은 이례적이라고 했다. 이상고온이 계속된 나날들이었기 때문에 나는 오늘도 대충 그렇겠거니 하고 니트 한 장만 입고 출근했는데, 살짝 쌀쌀했다. 하지만 나는 비 오는 것을 정말 좋아하기 때문에, 빗속으로 출장을 나가야 함에도 기분은 좋았다.

만나기로 약속했던 고객들을 다 만나고 복귀한 뒤, 오늘따라 초밥이 먹고 싶어 회사 근처의 회전초밥집에 갔는데 하필 휴업일이었다. 차선책으로 근처 초밥집을 검색하자, 직원들이 종종 괜찮은 초밥집으로 언급했던 가게가 눈에 띄어 그곳으로 갔다. 가게는 깔끔했고 정갈하여 음식이 맛있을 거라 기대하게 만드는 분위기였다.

예전에는 회덮밥을 좋아해서 자주 먹었었는데, 언제부턴가 괜찮은 회덮밥을 파는 마땅한 가게가 없어 먹지 않은 지가 꽤 되었다. 마침 그 가게에서는 나쁘지 않은 가격에 회덮밥을 팔고 있어서 주문했다. 아주 큰 그릇에 재료들이 풍성하게 담긴 회덮밥을 먹고 나니 기분이 좋아졌다.


밥을 먹고 시간이 좀 남아서 근처 서점에 들어갔다. 이런저런 책들을 구경하다 보니 '한국추리문학상 황금펜상 수상작 모음집'이 눈에 띄었다. 생각해 보니 내가 아는 한국 추리소설 작가가 있던가? 떠오르는 이름이 없었다. 호기심이 생겨 펼쳐본 책은 생각보다 재미있어서 앉은자리에서 추리소설 소설 2편을 읽게 되었다. 사무실에 들어가 봐야 하는 시간이라 아쉬움을 뒤로한 채 서점을 나섰다.




그런 고로 오늘은 완벽한 하루였다.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고, 내가 좋아하는 날씨였고, 오전 출장에서 이런저런 이유로 한 번도 가보지 못했던 어떤 고객의 집에 들어가 보는 성과도 거두었고, 수년 만에 먹어본 회덮밥은 맛있었고, 재미있는 소설 두 편을 읽었다. 하루가 절반쯤 지난 시점에서 중간점검을 해봤을 때 이보다 완벽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때 발생했다. 금요일에 상사에게 올려 검토받았는데 내용이 자세하지 않다는 이유로 반려된 서류가 있었다. 나는 금요일에 그것을 다시 작성해 놓고 퇴근한 뒤, 오늘 점심식사를 마치고 복귀해 제출했다. 여러분이 짐작했겠지만 그것은 내용을 조금 더 보강했으면 좋겠다는 피드백과 함께 2차 반려되었다. 다행히 상사는 기한을 하루 미뤄주었지만 나는 내일까지 이 일을 끌고 가는 것이 싫어 머리를 싸매고 오늘 통과를 받고야 말았다. 그 과정은 너무 고통스럽고 힘들었다. 도대체 어느 정도까지 해야 상사가 만족할 것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100까지 해내면 되는 일이었다면 끝이 어디인지 아니까 그만큼 스트레스를 받진 않았을 것 같다.




이렇게 흘러갔던 오늘 하루에 대해 아내에게 털어놓았을 때, 나는 좋았던 점들은 거의 말하지 않고 마지막에 그 서류 때문에 힘들었던 점에 초점을 맞춰 말하는 내 모습을 발견했다. 생각해 보면 한 가지는 나빴지만, 나머지는 다 좋았던 하루였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한 가지 문제가 앞의 좋았던 모든 것들을 다 망쳐버렸다는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앞으로는 좋았던 일에 좀 더 집중해 보는 게 어떨까? 당신의 하루는 오늘 뭔가로 인해 상처받거나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부터 찬찬히 뜯어보면 아침에 마신 커피 향이 좋았을 수도 있고, 누군가 베풀어준 작은 호의에 웃음지은 순간도 있고, 점심을 먹고 가볍게 회사 근처를 걸었을 때 햇볕과 바람이 기분 좋다고 느꼈을 수도 있다.


내일은 하루를 마감할 때 좋았던 점들을 뒤져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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