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윙크의사 Dec 28. 2022

한쪽 시력을 잃었습니다.

서른셋의 찬란한 가을날에.

어느 평범한 일요일, 강원도 인근의 외승 센터에서 낙마 사고가 있었습니다. 헬맷과 안전장비를 착용한 상태였고, 사고 전후 약 수시간 가량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정확한 상황은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먼저 원주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서울에서 오신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 것부터가 제 기억의 시작입니다.


한쪽 안구 파열과 안면부 분쇄 골절 등..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제게 좀 더 편안하고 친정 같은 성모 병원으로 전원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진통제를 달고 이동하는 구급차에서 제가 근무하던 소화기내과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던 것 같습니다.


저녁때쯤 성모 병원에 도착하니,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께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동료 펠로우 언니는 울음을 터트린 채 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외 안과 교수님들, 성형외과 교수님들께서도 긴급한 부탁을 받고 제 상태를 살펴봐 주러 병원에 나와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께서 어찌 제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함께 부탁해주셨다 하니, 저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큰 은총과 보호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신 교수님들께서는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셨습니다. 마침 진행 중인 수술이 있어 마취통증의학과 과장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방을 하나 더 열어 전신마취를 해주셨고,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안과 교수님 두 분이 함께 제 눈을 봉합해 주셨습니다.


자정쯤이 되어 수술이 끝날 때까지 소화기내과 교수님께서 자리를 지켜주시고 결과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저희 부모님께선 안 좋은 상황에서도 교수님을 통해 정말 큰 위안과 위로를 받으셨다 합니다. 이런 스승님들께 배우고 성장했던 것이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덕분에 제일 속상하고 힘드셨을 저희 부모님도 매우 덤덤하고 현명하게 상황을 이겨내고 계십니다.  천방지축 예민한 큰 딸을 키워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따뜻하고 강한 분들 품에서 자란 것도 제겐 무척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송함을 한 아름 안고 앞으로 더 진심으로 효도하며 살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수술 후 매일 제 상태를 살피고 함께 고민해주는 담당과 의료진들과 협진과 교수님들, 본인 일보다 더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친정 같은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과 동료들 그리고 매일 따뜻한 위로와 기도로 함께 해주시는 신부님, 수녀님들이 계셔서 저는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분들이 기도, 응원, 위로로 함께 해주심에, 저희는 어려운 상황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할 수 없는 나쁜 일들이 있지만, 그 와중에도 늘 감사하고 배울 일들이 있다는 건 진짜입니다. 이번 일로 제가 정말 많은 분들에게 응원받고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걸 느껴,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고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젊은 시기에 맞닥뜨리게 된 귀한 시련이, 앞으로의 삶을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게 해 줄 거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5년간 근무하면서 늘 ‘의사’ 입장에서만 여겼던 병원을, ‘환자’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꽤나 신선한 경험입니다. 앞으로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좋은 의사,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함께 해주신 마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회복하겠습니다.


한쪽 시력을 잃었지만, 그보다 값진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씩씩하게 잘 이겨내어, 이 은혜 두고두고 갚으며 살겠습니다.


2022년 11월, 구급차로 실려와 응급수술을 받은 지 이틀 후, 병원 침대에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