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셋의 찬란한 가을날에.
어느 평범한 일요일, 강원도 인근의 외승 센터에서 낙마 사고가 있었습니다. 헬맷과 안전장비를 착용한 상태였고, 사고 전후 약 수시간 가량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정확한 상황은 지금도 알지 못합니다. 먼저 원주 세브란스 병원 응급실로 실려갔고, 서울에서 오신 아버지 목소리가 들린 것부터가 제 기억의 시작입니다.
한쪽 안구 파열과 안면부 분쇄 골절 등.. 상황이 좋지 못하다고 판단한 아버지는, 제게 좀 더 편안하고 친정 같은 성모 병원으로 전원 하는 게 좋겠다고 하셨습니다. 이에 진통제를 달고 이동하는 구급차에서 제가 근무하던 소화기내과 교수님께 전화를 걸어 상황을 알렸던 것 같습니다.
저녁때쯤 성모 병원에 도착하니,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께서 저를 기다리고 있었고 동료 펠로우 언니는 울음을 터트린 채 저를 맞이하였습니다. 그 외 안과 교수님들, 성형외과 교수님들께서도 긴급한 부탁을 받고 제 상태를 살펴봐 주러 병원에 나와 주셨습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신부님께서 어찌 제 사고 소식을 들으시고 함께 부탁해주셨다 하니, 저는 정말 헤아릴 수 없는 큰 은총과 보호를 받았음에 틀림이 없습니다.
역시나 상황이 좋지 않다고 판단하신 교수님들께서는 응급수술이 필요하다고 결정하셨습니다. 마침 진행 중인 수술이 있어 마취통증의학과 과장님께서 직접 나오셔서 방을 하나 더 열어 전신마취를 해주셨고, 2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안과 교수님 두 분이 함께 제 눈을 봉합해 주셨습니다.
자정쯤이 되어 수술이 끝날 때까지 소화기내과 교수님께서 자리를 지켜주시고 결과를 전달해 주셨습니다. 저는 기억할 수 없지만 저희 부모님께선 안 좋은 상황에서도 교수님을 통해 정말 큰 위안과 위로를 받으셨다 합니다. 이런 스승님들께 배우고 성장했던 것이 제게는 더할 나위 없는 큰 행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정말 복이 많은 사람입니다.
덕분에 제일 속상하고 힘드셨을 저희 부모님도 매우 덤덤하고 현명하게 상황을 이겨내고 계십니다. 천방지축 예민한 큰 딸을 키워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었을 텐데, 이렇게 따뜻하고 강한 분들 품에서 자란 것도 제겐 무척 감사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죄송함을 한 아름 안고 앞으로 더 진심으로 효도하며 살도록 노력하려 합니다.
수술 후 매일 제 상태를 살피고 함께 고민해주는 담당과 의료진들과 협진과 교수님들, 본인 일보다 더 걱정해주고 챙겨주는 친정 같은 소화기내과 교수님들과 동료들 그리고 매일 따뜻한 위로와 기도로 함께 해주시는 신부님, 수녀님들이 계셔서 저는 정말 천군만마를 얻은 듯 든든하고 행복합니다. 지금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많은 분들이 기도, 응원, 위로로 함께 해주심에, 저희는 어려운 상황을 잘 견뎌내고 있습니다.
세상에 피할 수 없는 나쁜 일들이 있지만, 그 와중에도 늘 감사하고 배울 일들이 있다는 건 진짜입니다. 이번 일로 제가 정말 많은 분들에게 응원받고 사랑받고 있구나라는 걸 느껴, 그 어느 때보다 씩씩하고 값진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젊은 시기에 맞닥뜨리게 된 귀한 시련이, 앞으로의 삶을 더 소중하고 감사하게 여기게 해 줄 거 같아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5년간 근무하면서 늘 ‘의사’ 입장에서만 여겼던 병원을, ‘환자’ 입장에서 받아들이는 것도 꽤나 신선한 경험입니다. 앞으로 이런 경험들을 바탕으로 조금 더 좋은 의사, 나은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걱정해주시고 응원해주신 분들 모두 진심으로 감사드리며, 앞으로 갈 길이 멀지만, 함께 해주신 마음이 헛되지 않게 최선을 다해 회복하겠습니다.
한쪽 시력을 잃었지만, 그보다 값진 많은 것들을 얻었습니다. 씩씩하게 잘 이겨내어, 이 은혜 두고두고 갚으며 살겠습니다.
2022년 11월, 구급차로 실려와 응급수술을 받은 지 이틀 후, 병원 침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