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구한 운명
오전 내시경이 마무리 되어, 동료들과 농담을 하며 점심 먹을 준비를 하고 있을 때였다. 가족 단톡방에 올라온 아빠 카톡에 아차 한다.
‘간초음파상 희끄무레한 흔적이 좀 보이는데, 다른 수치상 이상이 없어 혈관종 정도로 보이는데, 확실히 하기 위해 추석 끝나고 CT 찍자고’
아빠 병원 진료 오시는 날이었구나. 같은 병원, 같은 과 진료인데, 불과 5m도 떨어져 있지 않은 거리에 아빠가 왔다 간 줄도 몰랐다.
그런데 이게 무슨 말이야. 하고 열심히 외래 명단 속에 파묻힌 아빠 이름을 찾아 클릭했다. 간초음파 결과를 보는 순간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다. ‘Newly noted nodule, R/O HCC, in S8' (R/O은 Rule Out의 줄임말로 의심되어 체크해야 하는 소견이라는 뜻의 의학 은어다: HCC는 hepatocellular carcinoma로 간세포암종을 뜻한다.)
그토록 걱정했던 가족력이다. 친할아버지는 간암, 친할머니는 담도암으로 돌아가셨다. 아빠는 B형 간염 보균자다. 그런데도 매일 술을 드시는 애주가다. 술은 아빠의 가장 친한 친구요, 위로재였다. 가족들의 눈치를 보면서도, 아빠는 술을 기분 좋게 취할 정도로 늘 드셨다. 아빠의 유일한 낙이었다.
나는 내과 의사다. 응급실에 실려오는 ‘매일 음주하는 chronic alcoholics (만성음주자)’ 환자들을 볼 때, 제 명을 깎아먹는 한심한 인간이라고 생각했다. 환자 히스토리에서 ’daily 소주 1병 음주‘라는 솔직한 정보를 통해 환자를 내멋대로 재단하고 속단 했다. 나 같은 의사가 있기에 어쩌면 환자들은 거짓말을 해왔었을지도 모르겠다.
생각해보면, Daily 소주 1병 음주하는 ‘chronic alcoholics' 환자는 우리 아빠 같은 사람이었다. 우리 아빠를 떠올려보면, 누구보다 가족에게 헌신적이고,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멋진 사람이었다. 적어도 누군가에게 한심한 인간이라 손가락질 받을 상은 아니었다.
그런데 올 것이 왔다. 만성 음주 과거력이 모든 이유가 되고, 질병을 키운 탓이 본인에게 돌아가는 ’그래도 싼 환자‘가 되는 일. 막연하게만 걱정했던 공포가 눈 앞의 현실로 닥치니 나는 상당히 냉정해졌다. 아빠에게 전화를 걸어 당장 CT를 당겨 찍자고 말했다. 아빠는 교수님이 11월에 찍자고 했다며 수치가 괜찮고 모양이 나쁘지 않았다는 등의 말로 얼버무린다.
나는 더 냉정한 목소리로 아빠 말을 자른다. ’이거 첫째 소견이 간암으로 나왔어, 크기 작을 때 확인해야 치료도 가능한데 왜 멍청하게 뒤로 미뤄?‘ 환자들에게 나쁜 소식 전하는 법을 그렇게 교육받고 고민했던 내과 의사가 제 아비에게 내뱉는 말이 결국 이렇다.
충격이었을게다. 아빠 본인에게도. 그걸 알면서도 저렇게 칼로 쑤시듯 말을 던져버린 내가 잔인한가 싶다. 하지만 현실을 직시하고 환상에서 벗어나길 바라는 마음에 고개를 휘둘러 약한 생각을 내쫓는다. 아빠는 조용하다. 나는 교수님께 말씀드릴테니 CT 날짜를 당기겠다 하고 아빠는 그러자고 한다.
기구하다. 한쪽 눈이 먼 딸이 일하는 병원에서, 딸이 일하는 과의 진료를 받고, 암일지도 모르는 몸 속 덩어리를 안고 돌아간 아빠의 운명은. 주마등처럼 흘러가는 함께 한 기억들이 떠올라 주춤한다. 기구한 운명이다. 아빠도, 나도. 그러나 어쩔 수 없다. 마음 단디 먹는 수밖에는, 어찌 할 도리가 없는 것이 인생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