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5년 전 세계에서 인공지능(AI) 스타트업에 투자된 자금은 약 2,000억 달러에 이른다. 단일 산업으로는 이례적인 규모다. 시장 곳곳에서 “AI의 해”라는 표현이 반복된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실제로 AI 유니콘 기업은 498개로 늘었고, AI 산업을 통해 새롭게 등장한 억만장자도 50명 이상으로 집계된다. 오픈AI와 앤트로픽 역시 시장에서 수천억 달러대 기업 가치가 거론되는 대표 사례로 꼽힌다.
그러나 같은 해 글로벌 벤처캐피털(VC) 시장에서는 투자 거래 건수 감소와 투자 위축 흐름이 이어졌고, 빅테크를 중심으로 한 대규모 인력 감축도 계속됐다. AI 투자가 급증한 것과 달리, 스타트업 생태계 전반의 체감 온도는 오히려 낮아진 한 해였다.
한국 시장에서는 이 대비가 더욱 뚜렷했다. 2025년 국내 벤처투자 규모는 약 9.8조 원으로 전년 대비 13%가량 늘었다. 그러나 이를 들여다보면 증가분의 상당 부분이 후기·대형 투자에 집중돼 있었다. 시드 단계부터 시리즈 A에 이르는 초기 투자 거래는 크게 줄었고, 일부 VC는 상반기 동안 신규 투자를 거의 집행하지 못했다(않았다).
투자 총액은 늘었지만, 창업 생태계의 저변은 오히려 얇아진 구조였다.
1. AI에 대한 기대는 여전하지만, 기준은 높아졌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서비스 이름이나 도메인에 ‘.ai’를 붙이면 투자가 따라오던 시기가 있었다. 2025년에는 그 분위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최고재무책임자(CFO)들은 더 이상 “AI를 쓰고 있다”는 설명에 만족하지 않는다. 파일럿 프로젝트 이후 실제로 비용을 줄였는지, 생산성을 높였는지를 묻기 시작했다. 엔터프라이즈 기업의 AI 활용 비율은 이미 대부분의 조사에서 80%를 넘어섰지만, AI 도입으로 영업이익이 의미 있게 개선됐다고 답한 기업은 소수에 그친다. 다시 말해, AI는 많은 기업에 도입됐지만 아직 성과를 내는 단계에 도달한 곳은 제한적이다.
시장은 더 이상 ‘기술 보유 여부’가 아니라 ‘재무 성과로 이어졌는가’를 기준으로 기업을 평가하기 시작했다.
2. ‘겉모습만 AI인 스타트업’은 한계에 부딪혔다
이 변화는 스타트업 시장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났다. 외부 AI 모델(API)을 불러와 사용자 인터페이스만 덧붙인 이른바 ‘씬 래퍼(thin wrapper)’ 형태의 스타트업들이 빠르게 경쟁력을 잃기 시작한 것이다. 전통적인 소프트웨어(SaaS)는 사용자가 늘수록 추가 비용이 거의 들지 않는 구조를 갖는다. 반면 AI 스타트업은 서비스가 성장할수록 연산 비용과 인프라 비용이 함께 증가한다. 특히 GPU 비용은 매출 증가 속도를 앞지르는 경우가 적지 않다. 2025년 투자 시장은 이 차이를 냉정하게 반영했다.
성장 스토리보다 수익 구조와 비용 통제 능력이 더 중요한 평가 기준이 됐다.
3. 한국 벤처 생태계의 ‘내부 양극화’
한국에서도 이 같은 선별은 더욱 날카롭게 작동했다. 2025년 결성된 벤처펀드 가운데 상당 부분은 민간 자금 중심이었고, 정책자금의 비중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문제는 자금의 성격이다. 대형 민간 자금은 검증된 기업, 이미 규모를 갖춘 기업으로 향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 결과 초기 기업으로 흘러가는 자금의 통로는 빠르게 좁아졌다. 이는 단기적인 투자 위축을 넘어, 중장기적으로는 스타트업 파이프라인 자체를 약화시킬 수 있다. 실제로 한국 스타트업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글로벌 평균보다 더 길다는 분석도 나온다. 특정 산업이 아니라 한국 스타트업 전반의 구조적 문제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4. 그럼에도, 기업 내부에서 AI는 ‘작동하고 있다’
이와 동시에 놓쳐서는 안 될 사실도 있다. AI가 실제 업무 현장에서 점점 더 깊숙이 사용되고 있다는 점이다. 대기업과 중견기업을 중심으로 업무용 AI 도구 사용량은 빠르게 늘었다. 반복적인 문서 작업, 데이터 정리, 보고서 초안 작성 등에서 직원 개인이 체감하는 시간 절감 효과는 분명하게 나타난다. AI가 업무 속도나 결과물의 품질을 개선했다고 답한 비율도 높다. 또한 AI 기능이 핵심적으로 통합된 소프트웨어 제품은 그렇지 않은 제품보다 빠르게 성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이는 AI가 단순한 실험 단계를 넘어 업무 도구로 자리 잡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신호다.
5. 2026년을 향한 질문
올 해 기업들은 수많은 AI 실험을 반복하는 대신, 소수의 검증된 기술과 공급자에 예산을 집중하는 전략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다. 한국 역시 하반기 글로벌 펀드 조성을 통해 해외 자본과의 연결을 강화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기대는 딥테크와 기술 기반 기업이 다음 성장 동력이 될 수 있느냐에 모인다. 무엇에 베팅할 것인가. 유행하는 기술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사업 구조에, 실험이 아니라 실제 운영 단계에, 속도 경쟁이 아니라 장기적인 생존 가능성에.
이제는 데모가 아니라 손익계산서의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