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리운전 1일차

by 두어

우리 직원 K가 하는 걸 본 적이 있다. 쉬워 보였다. 출발지, 도착지, 예상수익. 세 개만 확인하고 클릭 한 번이면 끝이다.


(그랬다. 어디까지나 보기에만.)


2026년 1월 2일. 새해 첫 근무일이자, 나의 첫 대리운전 도전. 저녁은 샐러드로 해결했다. 원래 금요일 밤이면 한 잔 하는 게 습관이었는데, 오늘은 아니다. 대리운전을 하려면 당연히 술을 마시면 안 되니까. 올 해 대리운전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첫째, 알코올 습관 끊기. 둘째, 그 시간(콜 잡힐 때까지)에 자기개발. 19시. 카카오대리 앱을 켰다.


카카오대리 UI. 화면에 뜨는 콜마다 출발지, 도착지, 실제수익을 순식간에 판단해야 하고, 조건이 맞으면 즉각 반응해야 한다. 꼭 원하는 곳으로 가려면 경쟁을 해야 하는데, 그 반응속도를 내는 게 생각보다 어려울 것 같다. 알람도 매우 불친절하다. 알림음에 쇠뇌 당할 지경. 마치 도박 게임에 베팅하는 듯한 화면과 사운드다.


K가 퇴근하면서 말했다. "금요일은 21시 넘어야 콜이 잡힐 거예요." K의 조언을 믿고 기다렸다. 21시가 지났다. 22시가 되었다. 화면엔 위례, 남양주 방면 콜이 쏟아지는데, 정작 내가 가려는 동탄 쪽은 거의 보이지 않는다. (개포동 같은 3km 이상 거리 콜은 받으면 안 된다는 것도 K한테 배웠다. 배운 건 많은데 써먹을 콜이 없다.) 21시 43분. 콜은 여전히 잡히지 않는다. 덕분에 평소에 미뤄뒀던 일들을 했다. 브런치 글을 정리했다. 오랜시간 방문하지 않았던 옛 블로그도 방문해서 내 글을 읽었다. 글은 밀도 높은 추억이다. 밀려있던 생각의 조각들을 끄적였다. 자유가 주는 공백이 나쁘지 않았다. 도박 사이트에 접속해 있으면서(도파민은 터지지 않는데), 평화로운 기분이었다.


22시 33분. 결국 짐을 쌌다. 강남역 근처로 가보기로 했다. 길이 한산하다. 금요일 밤 강남의 풍경이 아니었다. 술집들도 거의 문을 닫았다. 직장인들 자체가 보이지 않는 날이었다. 아침 출근길 버스가 한산할 때 진작 눈치챘어야 했다. 다들 휴가구나. 오늘은 날을 잘못 골랐다. 결국 버스를 탔다(아…솔직히 택시가 타고 싶었다). 집에 도착했다. 카카오에서 신입 기사에게 배정하는 프로 단독배정권 두 장도 허비하며 버텼는데.


이 모든 걸 K가 하는 걸 봤을 때는 쉬워 보였다. 타인의 노동이 가볍게 보이는 건, 내가 아직 작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오늘은 운이 없었던거다. 하지만 이렇게 기다리는 시간 동안 정말 많은 것들을 했다. 평소에 사소하다 생각하거나, 귀찮다고 미뤄뒀던 것들을 다시 들춰냈다. 그 안에서 크고 작은 보물들을 많이 발견했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지난 시간의 기록과 기억을 붙잡고 살게 될 때가 있다. 오늘은 그 선물을 받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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