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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Oct 25. 2019

누구의 ‘엄마’ 일 수 있어 감사하다

온전히 엄마로만 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참 고맙다

 오늘 아침, 코 끝에서 전해지는 간질간질한 느낌에 저절로 눈이 떠졌다. 내 얼굴을 코 앞에서 들여다보고 있는 딸아이와 눈이 마주쳤다. 아이는 스카프를 꼭 쥐고 있었다. 그 스카프로 내 코 끝을 비벼댄 모양이다. "엄마, 일어나요. 아침이에요." 나지막이 속삭이면서.

 

 먼저 눈이 떠진 이른 아침, 아이는 주변을 둘러본다. 자기 침대에 있는 기린, 하마, 토끼, 오리, 악어 인형들을 안고 뒹굴뒹굴 거리다 이내 심심해졌을 것이다. 여전히 침대에서 쿨쿨 자고 있는 엄마는 일어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를 어떻게 깨울지 골똘히 생각한다. 그러다 마침 바닥에 떨어진 엄마의 스카프를 발견한다. 스카프를 가지고 엄마처럼 목에도 둘러보고, 양 손에도 칭칭 감아보다가 아이의 머릿속에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아이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을 하고서 자는 엄마의 얼굴 가까이에 선다. 그리고는 스카프 끝으로 엄마의 코 끝을 간질이기 시작한다. 간질간질, 간질간질. 그때마다 엄마의 코가 찡긋, 찡긋거린다. 아이는 엄마의 반응이 재밌어서 계속 시도하는 거다. 마침내 엄마가 눈을 뜬다. 엄마 깨우기에 성공한 아이는 배시시 웃는다. 아이의 해맑은 미소를 바라보는 내 얼굴에도 옅은 미소가 지어진다. 내 코 끝을 간질여 잠을 깨운 아이의 행동이 너무나 사랑스럽다. 그런 아이의 눈동자를 침대에 누운 채 한동안 들여다봤다. 오롯이 나만을 바라보는 그 눈동자를.




 엄마가 된 후 비로소 난, 나를 둘러싼 일상이 얼마나 소중하고 감사한지 깨닫게 됐다. 평범하다고 아우를 수 있는 그 모든 것들이 기쁨이 되고 행복이 되고 감동으로 다가올 수 있다는 것을 마음으로 느낄 수 있게 됐다.


 새 생명이 태어나자 새로운 세상이 눈 앞에 펼쳐졌다. 암울하고 답답하게만 보였던 세계가 한순간 화사하고 눈부신 별천지로 바뀌는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단지, 한 아이의 엄마가 됐을 뿐인데.


 엄마가 됨으로서 , 스스로 그어왔던 한계와 삐딱한 시선, 편협한 나만의 세계에서 벗어나  다른  삶의 지평을 확장시킬  있었다. 엄마가 됨으로서 난, 더 나은 사람으로 살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엄마가 됨으로서 난, 과거의 나를 되돌아보고 더 좋은 사람이 되고 싶고 더 가치 있는 사람으로 발전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엄마가 됨으로서 난, 나만의 서사를 어떻게 써 내려갈 것인지, 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됐다.

 

 그래서 나는, 내가 누군가의 엄마일 수 있어 참 감사하다.

 온전히 엄마로만 살 수 있는 소중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이 참 고맙다.


 아이를 무릎에 앉혀서 책을 읽어줄 때 내 턱에 닿는 아이의 머리카락, 아이의 등을 타고 전해지는 따스한 온기, 아이가 말할 때마다 가슴으로 느껴지는 울림이 나는 그렇게 좋을 수가 없다. 아이의 손을 잡고 함께 눈을 마주치고 까르르 한바탕 웃는, 그 환희에 찬 웃음소리가 귓가에 선명하게 들리는 순간이 행복하다. 아이와 아파트 산책길을 오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4계절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할 수 있어서 감사하다. 봄에는 화단에 핀 철쭉을 한참 바라보고, 여름에는 앵두나무에 매달린 빨간 앵두를 따고, 가을에는 감나무에 열린 감에 손을 뻗치는 아이 곁에,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머물 수 있어 정말 기쁘다. 아이와 이 모든 시간들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내게는 축복이다.


 우리 시대의 대표 지성이라 불리는 이어령은 암에 걸려 자신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딸을 향해 부치지 못한 편지를 책으로 엮었다. 젊은 아빠였던 시절, 그는 온종일 책을 읽고 글을 쓰느라 딸에게 굿 나잇 키스 한번 못해준 못난 아빠였다고 고백한다. 그것이 평생 그의 가슴에 한으로 남아있었다.


 "만일 지금 나에게 그 30초의 시간이 주어진다면, 하나님이 그런 기적을 베풀어주신다면, 그래 민아야, 딱 한 번이라도 좋다.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그때의 옛날로 돌아가자. 나는 그때처럼 글을 쓸 것이고 너는 엄마가 사준 레이스 달린 하얀 잠옷을 입거라. 그리고 아주 힘차게 서재 문을 열고 "아빠 굿나잇!"하고 외치는 거다. 약속한다. 이번에는 머뭇거리며 서 있지 않아도 된다. 나는 글 쓰던 펜을 내려놓고, 읽다 만 책장을 덮고, 두 팔을 활짝 편다. 너는 달려와 내 가슴에 안긴다. 내 키만큼 천장에 다다를 만큼 널 높이 들어 올리고 졸음이 온 너의 눈, 상기된 너의 뺨 위에 굿나잇 키스를 하는 거다. 굿나잇 민아야, 잘 자라 민아야."
- 이어령 <딸에게 보내는 굿나잇 키스> 23p


 절절한 그의 편지를 읽으며 나도 모르게 눈시울이 붉어진다. 설거지를 할 때마다 쪼르르 달려와서 안아달라고 조르는 아이의 애처로운 눈빛이 떠올라서. 유모차를 밀고 성큼성큼 가는 내 뒷모습을 바라보며 '같이 가요.' 하고 달려온 아이의 불안한 마음이 느껴져서.


 그에게는 낡은 비디오테이프를 되감듯이 옛날로 돌아가야 마주할 수 있는 과거가 33개월의 아이를 키우는 내게는 ‘지금 이 순간’이다. 바로 어제였고, 오늘이며, 내일 다가올 현실이다. 평범해 보이는 일상이 먼 훗날 따뜻하고 행복한 추억으로 남을 수 있는 소중한 시간들이다.


 누군가 그랬다. 육아, 참 짧다,라고. 아이를 온전히 품에 안을 수 있는 시간은 너무나 빨리 지나간다고.


 나는 이 시간들을 손에 쥔 모래처럼 흘려보내고 싶지 않다. 꽉 움켜쥐고 매 순간 엄마의 인생에 충실히 살며 엄마가 되지 않았다면 느끼지 못할 경험들을 온몸으로 생생하게 느끼고 싶다. 최선을 다해 엄마로서의 삶을 즐기고 싶다. 나중에 후회하지 않도록.


 만약 오늘 저녁, 설거지하는 나에게 아이가 다가온다면, 나는 단숨에 분홍색 고무장갑을 벗어 아이를 안아줄 것이다. 거품이 묻은 그릇을 잠시 외면하리라. 그리고 아이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아이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을 것이다. 나의 사랑을 갈구하는 그 눈동자를, 내가 또렷하게 비치는 그 눈동자를 하염없이 바라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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