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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Mar 14. 2019

아이가 잠든 후, 시원한 맥주 한 캔

그 뿌리칠 수 없는 유혹에 대하여

퇴근 후 마시는 시원한 맥주, 얼마나 홀가분한 기분인지 느껴본 사람만이 알 겁니다. 회사 다닐 때도 저는 맥주 애호가였습니다. 특히, 야근한 날이면 집에 들어갈 때 편의점에서 맥주 한 캔을 빼놓지 않았죠. 고된 하루의 일과를 마무리하는 일종의 의식 같은 거였습니다.


참 이상하게도, 아이를 낳고 모유수유를 하는 동안에는 맥주의 존재를 잊고 지냈습니다. 맥주의 향기가 가끔 아련한 봄내음처럼 코끝을 살랑거리긴 했어도 갓 엄마가 된 그 당시의 충만했던 모성이 맥주에 대한 그리움을 밀어냈지요. 인생이 그러하듯, 모유수유 역시 의지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자연스레 모유를 끊게 되면서 한밤중 맥주의 유혹이 스멀스멀 올라왔습니다.  


출처 : unsplash


육퇴 후 엄마에게 맥주를 허하라



엄마라는 직업은 퇴근이라는 게 딱히 없는 상비군 같은 존재이지만, '공식적인 퇴근'이라고 할 수 있는 시간은 '아이가 잠이 든 후'일 것입니다. 아이가 부르기 전까지 임시적인 퇴근에 불과하지만요. 그래서 아이가 잠든 직후는 그 어떤 시간보다 달콤하고 짜릿합니다. 어쩌다 아이가 평소보다 일찍 잠든 날엔 음소거 춤이라도 한 판 추고 싶을 지경입니다. 아이와 함께하는 하루하루의 시간이 행복하고 육아가 아무리 즐거워도, 매일 밤 아이가 깊은 밤잠의 세계로 빠져들기를 기원하고 또 기원합니다. 그만큼 아이를 재우기란 녹록지 않습니다. 그런 엄마에게 아이를 재운 후의 맥주 한 캔이야말로 엄마의 '소소하지만 확실한 행복' 이 되어줍니다.



출처 : unsplash


때론, 엄마에게 '맥주'란 '자유'입니다



육아가 힘들다고 하는 것은 '통제 불가능'한 것이 많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니까 회사 일을 할 때는 내가 하루일의 분량과 우선순위를 나눌 수 있습니다. 공부를 할 때는 내가 스스로 공부할 부분과 시간을 계획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육아할 때는 그 계획이란 것이 의미가 없어집니다. 모든 것이 아이의 손에 달려있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일어나고, 자고, 먹고, 놀고 하는 대부분의 일상이 아이에게 달려있습니다. 엄마는 그저 거둘 뿐입니다. 엄마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는 게 바로 육아입니다. 그래서 그 과정에서 엄마는 때로는 힘에 부치기도 하고 무력감을 느끼기도 합니다. 육아하는 시간에 엄마의 욕구는 묵살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엄마도 온전히 자신만을 위한 시간이 반드시 필요합니다. 바로 그 시간이 아이를 재운 후 주어집니다. 엄마의 하루를 마무리하는 그때, 맥주는 엄마의 유일한 친구가 되어줍니다. 맥주가 소중할 수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출처 : unsplash


취하지 않는 맥주 한 캔이 제격입니다



엄마가 되기 이전의 저는 술은 취해야 맛인 줄 알았습니다. 술은 취하려고 먹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엄마는 비상대기조 같은 것이어서, 마음껏 취할 수는 없었습니다. 아이가 새벽에 갑자기 열이 나거나, 토를 하거나, 배앓이를 하거나 할 때 신속하게 보살펴줘야 하는 엄마가 만취해서 인사불성이라면 아이는 기댈 곳이 없어지기 때문입니다. 기분조절을 하지 못해 많이 마신 탓에 다음날까지 컨디션이 돌아오지 못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럴 땐 아이를 제대로 돌볼 수 없었습니다. 제 컨디션이 아니니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해낼 일에도 짜증만 났습니다. 그렇게 육아를 망친 후에는 취하지 않을 만큼만 마시게 되었습니다. 술을 마시는 목적이 분명하자, 다른 주종은 거들떠도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오로지 '맥주 한 캔'이 유일한 휴식처가 되어주었습니다.



출처 : unsplash


오늘 밤에도 어김없이 맥주로 하루를 마무리합니다



엄마가 된 후에 당연하게 생각했던 일상에 대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따사로운 햇살, 오전의 커피 한 잔, 책 읽는 시간 등등. ‘저녁 시간’도 그 중의 하나입니다. 말끔히 샤워하고 소파에 축 늘어져있고 싶은, 아무것도 하기 싫은 그런 시간말입니다.


오늘 밤에도 아이는 쉽게 잠들지 못합니다. 아이에게 밤은 두려운 것일까요. 눈만 감으면 잠이 스르륵 올 것만 같은데, 아이는 좀처럼 눈꺼풀을 내리지 못합니다. 암흙 같은 공간에서도 요리조리 움직이며 인형들과 대화를 나누고 노래를 흥얼거리고 춤을 춥니다. 곧 잠이 들 것 같았는데 갑자기 벌떡 일어나 뜀박질을 시작하고, 낮에 읽었던 책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맥이 탁 풀리는 순간입니다. 내색하지 않으려고 해도 한숨이 새어 나옵니다. "이제 잘 시간이다"라고 수십 번 외치지만, 아이에게는 들리지 않는 모양입니다. 하는 수 없이 아이가 지쳐 잠들 때까지 기다립니다. 아이는 다행히 깊은 잠의 세계로 빠져듭니다. 기약이 없는 시간을 견딘 후, 의식의 흐름대로 냉장고 문을 열고 맥주 한 캔을 땁니다. 얼음장같이 시원한 맥주 한 모금으로 마음속의 응어리가 씻겨나가는 느낌입니다. 오늘도 육퇴 후에 맥주로 속을 달랩니다. 맥주 없이 육아 퇴근을 논할 수 있을까요.


맥주 한 캔이 주는 자유를 오늘밤에도 잠시나마 누려볼까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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