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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Mar 21. 2019

물방울이 지나갈 틈은 주세요

동네 수영장에서도 '개인 공간'은 중요합니다

어느덧 수영 10개월 차입니다. 15개월 지난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낸 후 여유시간이 생기자 알아본 것이 바로 '수영'이었습니다. 아이를 낳고 이듬해 봄이 돌아오자 드디어 자유시간이 생긴 것입니다. 동네에는 시에서 운영하는 스포츠센터가 있습니다. 그 옆에는 도서관이 자리 잡고 있고요. 집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에 저의 최애 장소인 '도서관'과 '수영장'이 같이 있다니 너무나 신이 났습니다.


일주일에 고작 2번 가지만 그 두 번 덕분에 바깥공기를 쐬고, 하늘을 보고, 나뭇잎의 색깔 변화를 느낄 수 있습니다. 아기를 안아 모유를 먹이고 재우고 하면서 목이랑 왼쪽 팔, 어깨가 안 좋아졌었는데, 수영을 하면서 조금은 유연해진 것 같습니다. 아이를 낳고 기르는 동안에는 제 몸을 돌볼 여유가 없었지만, 이제 비로소 조금씩 회복이 되는 과정에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몸매랑 무관하지만, 저도 물속에서 자유를 느낍니다 (출처: unsplash)



수영을 워낙 좋아해서 여름을 가장 좋아합니다. 그럼에도 수영을 제대로 배워본 적은 없었습니다. 막상 수영을 다녀보니 겨울에도 수영장 물이 따뜻해서 참 좋더군요. 좋아하는 수영을 시간 많이 뺏기지 않고 할 수 있어 꾸준히 다니다 보니 어느덧 10개월이 되었습니다.


연고지 하나 없는 곳인 데다가 직장을 관둔 지 일 년도 채 되지 않아서 왕래하는 이웃은 없습니다. 게다가 관계를 맺는 일에 부담스러워하는 성향입니다. 그런데 수영을 꾸준히 다니다 보니 '관계'를 맺어야 했습니다. 인간사가 그러하듯, 어디나 '커뮤니티'가 형성되기 마련입니다. 처음 등록하고 다닌 초급반에서 친정엄마 연배와 비슷하게 보이는 아주머니 한 분과 인사를 나누고 수영시간에 틈틈이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머리를 말리면서 얼떨결에 휴대폰 번호도 교환했습니다. 주말에 자유수영을 나가게 되면 서로 톡으로 알려주자고 약속하였지만, 한 번도 만나지는 못하였습니다. 싹싹한 성향이 아니라서, 게다가 '어른'과 어떻게 지내야 하는지 잘 알지 못하는 '어알못'이라 살짝 부담스러운 마음도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주머니가 보이지 않게 되었고, 반을 옮긴 것인지 다른 운동을 하시는 것인지는 아직까지도 잘 모릅니다. 이것이 수영장에서의 저의 첫 번째 '관계'였습니다.


그리고 저는 꾸준히 같은 반에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새로운 아주머니들을 많이 만나게 되었습니다. 저 역시 '아줌마' 이기는 하나, 저 같은 30대 아줌마보다는 40대, 50대, 60대 아줌마의 비중이 월등히 높습니다. 가끔 아저씨도 계십니다만, 9:1의 비율로 아주머니들의 압승입니다. 저희 반 수영 강사님도 결혼하신 분인데 자상하고 꼼꼼하게 영법을 알려주시는 분이라 인기가 많은 편입니다. 자연스레 수강생도 늘 많으십니다. 그러던 어느 날, 올 것이 왔습니다.



첫 정모날이 잡혔습니다 (출처: unsplash)



들었죠? 다음 주 금요일 점심


전체 수강생들이 모이는 첫 식사자리였습니다. 선생님까지 포함해서요. 저번 시간에 빠져서 전 몰랐지만, 모든 분들이 다 알고 계셨습니다. 계속 수영은 할 생각이라서 안 간다고 할 수도 없고, 가자니 살짝 불편하고, 예상치 못한 스케줄이라 바로 대답을 하지 못하고 어영부영 얼버무리며 다음 시간에 말씀드리겠다고 하고 황급히 빠져나왔습니다. '그냥 수영만 하면 되지 밥까지 먹나', 싶으면서도 '또 밥 먹는 게 뭐라고, 당황하는 너가 유난스럽다' 하면서 혼자 구시렁구시렁댔습니다.


별 수 있나요. '핵인싸'는 고사하고, '아싸'이면서도 공식적 ‘아싸’가 되기는 싫은 마음이 저를 식사 자리로 이끌었습니다. 생각보다 유쾌하고 재밌는 자리였습니다. 마음을 조금 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또 한 계절이 바뀌었고, 여전히 저는 같은 수영반에서 수영을 하고 있습니다. 매월 초가 그렇듯이 새로 오신 분들도 많습니다. 그중에는 주 5일 수영을 다니시는 '수영 마니아' 분들도 계십니다. 대게 50, 60대 분들이십니다. 월, 수, 금도 다니면서 화, 목에도 시간이 비어서 또 나오신다고 하셨습니다. 수영 끝나고 요가도 하시는 분들도 많습니다. 거의 매일 운동을 나오시는 분들입니다.


순서대로 수영을 하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습니다 (출처 : unsplash)



매 시간 순서대로 수영을 합니다. 잘하는 순서대로 일 때도 있고, 수영장에 도착한 순서대로 일 때도 있습니다. 단 하나의 규칙은 앞사람과 부딪치지 않게 적정한 거리를 두면서 수영을 한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수영 차례를 기다릴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자꾸 저의 '영역'에 침범하시는 분이 계셨습니다. 저도 다음 사람이 출발하기를 기다리며 줄을 서고 있었는데 등과 팔에 자꾸 묵직하고 뜨뜻한 어떤 것이 닿았습니다. 체격이 좀 있는 아주머니의 살이었습니다. 거의 겹치다시피 했습니다. 출퇴근 시간 만원 지하철에서나 겪을 수 있는 일이죠. 그런데 이렇게 널찍한 수영장에서 아주 사적인 영역이 침범당하다니요. 한 바퀴 돌 때마다 원치 않은 스킨십을 하니 신경이 곤두섰습니다. 예민해졌고 불쾌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물론, 일부러 그러시는 것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그분께서는 그것이 아무렇지 않으셨겠지요.


살이 닿지 않게 조금 뒤로 서주시겠어요?


이 말이 목구멍까지 차올랐지만 차마 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 대신, 제 어깨는 한겨울 외투를 여미듯이 한없이 움츠려 들었습니다. 제 자리에 서면 어깨가 겹치니 줄을 이탈해서 서기도 했습니다. 그러면 아주머니는 친절하게도 제 어깨에 손을 감싸서 원래 자리로 이동시켜주었습니다. 아마도 앞에서 말씀하고 계신 수영강사님의 설명이 들리지 않아서였을 것 같습니다. 졸지에 시야를 가린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60대 후반으로 보이는 그 아주머니는 수영장에 매일 출근도장을 찍는 ‘터줏대감'이셨습니다. 그리고 며칠 전, 그분이 머리를 말리다가 어떤 아주머니와 언성을 높이며 싸운 것도 목격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더욱 소심해졌습니다. 개인 공간을 지켜달라고 말을 꺼냈다가 행여나 말이 와전돼서 삽시간에 이상한 소문이 퍼질 수 있으니 불편한 티는 내지 않으려 노력했습니다. 괜히 엮이고 싶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이런 사소한 일로 수영하는 즐거움을 빼앗기고 싶지 않았습니다.



저마다 사적인 공간이 필요합니다 (출처 : unsplash)



저는.. 개인 공간이 중요해요


수영을 할 때 조차도요. 물이 지나갈 틈 정도는 있었으면 합니다. 개인 공간을 중시하는 성향이라 직장인 시절에는 출퇴근 시간을 피해서 대중교통을 이용했습니다. 출퇴근 시간 앞뒤로 10분씩만 피해도 타인과 가방을 사이에 두고 백허그를 하는 참사는 막을 수 있으니까요. '어서 와 한국은 처음이지?'에 출연한 핀란드인 페트리 칼리 올라는 한국에 와서 어려웠던 점 중 하나를 '개인 공간' 인식의 차이로 꼽았습니다. 핀란드에서는 줄을 설 때도 1미터씩 간격을 두고 설 정도로 개인 공간을 아주 넓게 쓴다고 합니다. 그런 습관이 몸에 배어서 한국 마트를 이용할 때 1미터 간격을 두고 계산 줄을 섰더니 그 앞으로 사람들이 줄을 서더랍니다. 저 같아도 그랬을 것 같아서 웃음이 났습니다. 페트리 칼리 올라가 그 분과 함께 수영을 했다면 어땠을까요? 제대로 '컬처쇼크' 받아서 '수영장 에피소드'가 추가됐겠지요. 저에게는 '개인 공간'에 대한 중요성을 깨닫는 사건이었습니다. 그 개인 공간에 대한 인식은 사람마다 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도 깨달았습니다.


다음 시간부터는 눈치껏 수영 순서를 옮겨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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