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엔 애둘, 애셋 조리원 동기와, 저녁엔 아직 싱글인 전 직장동료와
엄마로 산지 3년 차, 가족 외에 '모임'을 가진 지가 언젠지 까마득하다. 신년회니 뒤풀이니 송년회니 하는 모임은 나와 상관없는 것들이 되어버렸다. 이직하면 처음 1~2년은 적응하는데 온 힘을 다해야 하듯, 처음 엄마 역할을 맡고 잘 해내기 위해 아등바등 애쓰다 보니 벌써 2년 2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하루에 두 개의 약속이 잡혔다. 정말 흔치 않게도 점심과 저녁 모두 다.
집, 수영장, 도서관, 마트, 놀이터, 문화센터, 카페... 가 내 생활권의 전부다. 여기서 벗어날 때는 거의 없다. 집에서도 혼자 있을 때면 서재로 쓰는 방에서 좀처럼 나오질 않는다. 오히려 직장 생활할 때보다 더 오래 앉아있는 탓에 경미한 허리 디스크까지 왔다.
그래서 잠시 잊고 있었나 보다. 사람들을 만나서 수다 떠는 재미를. 사람들은 대게 '그거 알아?'로 시작하는 하나도 유익하지 않고 알아두어도 쓸데없는 가십거리를 굉장히 중요한 정보라도 되는 양 힘을 주어 말하곤 한다.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얄팍한 지식과 다분히 주관적인 경험들을 늘어놓기 바쁘다. 마치 삶의 지혜라도 되는 것처럼. 그래도 그렇게 두세 시간 웃고 떠들다 보면 왠지 모르게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한다.
오랜만에 그런 모임에 나가게 되었다. 낮과 밤, 하루에 두 번이나.
오전 11시. 엄마들이 선호하는 약속 시간이다. 아이 어린이집에 데려다준 후 만나기 딱 좋기 때문이다. 브런치 모임으로 만나기로 한 멤버는 같은 조리원에서 산후조리를 했던 동기들이다. 친해진 조리원 동기들 중에서 나는 위에서 두 번째로 나이가 많다. 나는 서른넷에 아이를 낳았다. 초산이었고 노산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었지만, 조리원에서 나는 대부분 산모들의 '언니'로 불렸다.
오늘은 두 명의 동기를 만나기로 했는데, 나보다 두세 살 어리다. 아마 그중에 한 명은 네 살 차이가 났던가. 조리원 동기들은 서로의 나이를 정확히 모른다. 수다 떨면서 자연스럽게 나오는 대학생활 이야기, 이를 테면 2002년 월드컵 때 새내기였던 나는 시청광장에서 열정적으로 응원했던 경험을 얘기하고 그들은 야자를 빼고 축구경기를 봤다던가 하는, 그런 이야기 속에서 틈틈이 드러나는 나이 차이를 느낄 뿐이다. 첫 만남에서 통성명을 하고 나이를 정확히 밝혔었어도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서로의 이름보다는 '누구의 엄마' 호칭이 더 자연스러운 관계. 아이도 이름이 아닌, 조리원에서 부르던 태명으로 기억하는 관계. 서로의 태명을 기억하고 부를 수 있는 사이라 나는 조리원 동기들과의 관계가 더욱 애틋하게 느껴진다. 우리 행운이를 기억해주는 사람들.
나보다 한 두 살 어린것으로 추정되는 K는 작년에 둘째를 낳았다. 첫째와는 연년생으로. 그리고 조리원 동기 중에 가장 어렸던 H는 우리 중 유일한 둘째 엄마였는데, 그녀도 올해 초 셋째를 낳았다. 우리가 아이를 낳고 2년 2개월의 시간이 흐르는 동안, 그녀들은 아이를 하나씩 더 출산해 각각 두 명, 세명의 엄마가 되었다. 나는 여전히 아이 하나만 키운다. 그래서 그녀들은 '둘째 전도사'를 자처했다.
"언니, 둘은 꼭 필요해"
"아이가 둘이면 행복이 10배쯤 커져"
"둘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야!"
"미루다 가는 영영 못 낳아, 언니 나중에 후회할걸?"
그녀들은 자리에 앉자마자 "언니, 둘째는 어떻게 됐어요?"하고 물었다. 마치 숙제 검사하듯이. 아이를 하나씩, 둘씩 더 나은 그녀들은 뭔가 당당하고 자신감이 넘쳤다. 나는 살짝 위축이 되었다. 왜냐하면, 나는 둘째를 포기한 것도, 낳기로 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어정쩡한 상태. 그렇다. 나는 둘째를 낳고 싶다. 그러다가 둘을 키울 자신이 없기도 하다. 그렇게 나는 갈팡질팡하고 있다. 아이를 누구보다 예뻐하고 아이랑 함께 있는 시간을 좋아한다. 그런데 아이 낳는 걸 결정한다는 것은 번지점프에서 뛰어내릴까 말까를 고민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뛰었는데 너무 무서웠어, 다신 뛰지 말아야지. 막상 뛰니까 너무 재밌잖아, 또 뛰어야지. 이렇게 간단한 게 아니니깐.
아이를 막상 낳고 길러보니 너무너무 예쁘다.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사랑스럽고 감동적이고 경이롭다. 내 평생 가장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를 하나 '더' 낳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예뻐서 낳아야지. 가 되지 않는다. 낳으면 끝이 아니니까. 20년, 30년, 몇십 년이 더 될지 모르는 긴 시간 동안 아이를 책임져야 하니까. 물론 부모가 모든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된다고, 아이는 스스로 큰다고들 하지만, 아이가 하나 일 때랑 둘 일 때랑 경제적인 부분 외에도 아이에게 에너지를 쏟는 시간과 마음의 여유도 많은 차이가 날 것이다. 이런 고민을 털어놓으니, 그녀들은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든 길이 생긴다고 했다.
바로 그 전날 밤, 미루고 미뤄왔던 '82년생 김지영'을 읽은 터다. 왠지 읽고 나면 뒷맛이 씁쓸해질 것 같아서 읽지 않고 있었다. 막상 아이를 키우는 부모들은 육아 예능을 보지 않는다고 하지 않나. 나는 84년생이다. 빠른 84. 친구들은 83년생. 우리 땐 '빠른'이 있었는데. 여기서도 나이가 또 한 번 드러나게 됐다. 소설 속 '김지영'이 왠지 내 이야기, 내 친구 이야기, 아는 언니 이야기 일 것 같아서, 그 이야기가 기분 좋은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서 미뤄왔던 참이었다. 갑자기 웬 용기가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책을 손에 들었고 단숨에 읽어 내려갔다. 다 읽고 나니 역시나 혼란스러워서 한 동안 잠이 오지 않았다.
나는 밑에 남동생이 있다. 부모님에게 남녀 차별을 크게 받지 않고 자라왔다. 할머니, 할아버지를 포함해 상처 받았던 기억도 특별히 없다. 대학생활, 사회생활을 하면서도 크게 못 느끼고 살았었다. 책을 읽어보니, 나도 사회 구성원으로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미묘하게 차별당하면서 가랑비에 옷 젖듯이 편견에 젖어 살아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설은 내 유년시절부터 학창 시절, 직장생활까지 모든 과거를 다 들춰냈다. 목구멍에 먼지가 낀 듯 칼칼하고 따끔따끔한 기분이 들었다.
소설은 김지영이 육아 후유증을 앓는 것으로 시작된다. 나는 임신, 출산, 육아를 거치는 동안 우울증 근처에도 가지 않았다. 공감을 못할 줄 알았다. 그러다 문득, 지금까지 육아가 좋아서 스스로 '선택'했다고 믿어왔는데, 그게 아닐 수 있었겠구나, 라는 생각이 스쳤다. 만약, 내가 소설 속 주인공처럼 회사를 다니고 싶었어도 결과는 같지 않았을까? 일과 육아의 선택의 기로에서 자신 있게 100% 내 선택이라고 말할 수 있는 걸까? 친정, 시댁 둘 다 도움을 못주는 상황은 같았을 텐데? 어차피 육아는 내가 하게 되는 거 아니었을까? 이미 결과가 정해져 있었다고 생각하니 벌레 먹은 것처럼 얼굴이 일그러졌다.
"언니, 셋까진 낳지 말고 둘까지만"
그녀들은 마지막까지 '둘째 전도사'의 역할에 충실하며 다음 만남을 기약했다. 언제 또 만나게 될까. 그땐 내 배가 불러있던지, 아니면 이미 '묶었다'라고 하던지, 어느 쪽이든 결판을 내줘야 그녀들이 안심을 할 것 같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지하철에 올랐다. 임산부 우대 자리가 비어있었지만 아무도 앉지 않았다.
저녁 약속은 이번이 아이 낳고 두 번째다. 제법 쌀쌀하긴 해도 꽃향기를 싣고 온 바람이 향긋하게 느껴진다. 어둑어둑해진 하늘 밑을 걷다 보니 '아, 4월의 퇴근길이 이랬었지' 하고 잠시 생각에 잠긴다. 전 직장 동료를 만나는 길이라 그런가 퇴근길이 떠올랐다.
그녀는 나와 동갑이다. 아직 결혼은 하지 않았다. 30대 초반쯤에 만났는데 어느덧 후반이 되어버렸다. 그녀는 바쁜 와중에 연애도 하고 여행도 가고 대학원도 다니면서 회사를 다른 곳으로 이직했다. 나는 결혼을 하고 임신을 하고 육아휴직을 하고 출산을 하고 퇴사를 했다. 동갑이기도 하고 솔직하고 활발한 성격이 잘 맞아서 유난히 친하게 지냈다. 아이가 모유를 먹을 때쯤 아이랑 같이 한번 만났으니까, 거의 2년 만에 얼굴을 보는 것이다. 직장인인 그녀가 저녁시간밖에 허락되지 않아 내가 시간을 내었다. 그래야 채팅창 밖의 실물을 영접할 수 있으니까.
"웬일이야, 그대로야, 안 늙었어!"
호들갑을 떨면서 인사를 나누니 2년이란 시간이 금세 지워진다. A랑은 훠궈 집에서 만났다. 요즘 마라탕이 핫하다고 한다. '인싸'음식이라나 뭐라나. 훠궈는 처음 먹어본다. 예전부터 먹어보고 싶었지만 26개월 아이랑 함께 외식하기는 아직 쉽지 않다. 예전엔 핫플레이스를 꿰고 있었었는데. 저녁 시간에 강남 한복판에 나오니 주변 직장인들이 퇴근 후 모여 식사를 하고 한잔씩 잔을 기울이고 있다. 그 속에서 나도 일원이 된 느낌이 들었다.
퇴사 후 회사생활을 한 번도 그리워해 본 적은 없다. 하지만 사람들은 한 번씩 그리웠다. A를 만나니 잊고 지냈던 그 시절의 추억들이 하나둘씩 떠올랐다. 연차가 쌓인 그녀는 전보다 더 프로페셔널한 느낌이 났다. 그녀는 곧 다른 곳으로 이직할 거라고 했다. 대기업이었다. 꼬박 이틀에 걸쳐 면접도 4번이나 보고 처음 서류 넣을 때부터 칼을 갈면서 준비했는데 결과가 좋아서 다행이라고 했다. 여전히 그녀는 열정적이었다. 어떻게 그런 열정이 아직도 남아있는 걸까.
"딸이 3살 됐다고? 나는 언제 결혼해서 애를 낳니"
자신감에 차 있던 그녀가 한숨을 푹 쉬며 토로했다. 결혼을 하고 싶어 하던 그녀다. 뜻하지 않게 결혼이 자꾸 늦춰지니 자기는 스스로 생활비를 충당해야 하고 능력이 있어야 결혼도 수월할 것 같아 악착같이 일을 하는 거라고 했다. 열정이 아니라고. 소개팅을 하면 이제 나이도 있어서 회사 간판이랑 직급이 중요하다면서.
"남들은 혼자니까 자유로워서 얼마나 좋겠냐고 해. 틈만 나면 해외여행 다니고 그러는 거 같으니까. 여행도 가고 싶어서 가는 게 아니야. 어디론가 떠나지 않으면 그 시간에 방에 처박혀있을걸 아니까 그냥 나가는 거야. 막상 나가서도 외로워. 왜 여기서 돈은 돈대로 쓰며 이러고 있나 싶기도 하고."
그녀는 내용과 달리 굉장히 밝은 톤으로 말했다. 흘려들었다면 신나는 이야기였을 거라 착각했을 정도로.
나는 낮에 만난 조리원 동기들 이야기를 전했다. 둘째에 대한 고민을. 이도 저도 정하지 못한 내 심정을. 그녀는 정답은 없으니 너무 신경 쓰지 말라고 했다. 누가 대신 키워주는 것도 아니니까. 자신을 보라며, 하나라도 있는 게 어디냐며. 그녀 다운 쿨한 대답이었다.
수제 맥주집으로 자리를 옮겼다. 보도 자료 릴리즈, 팔로업, 기자 미팅, 제안서, 피티 등 업무 용어를 말하니 신기하게도 그때의 내가 되어 이야기를 하게 됐다. 사무실 내 자리가 선명하게 떠올랐다. 왼쪽에 큰 유리창이 있는 창가 자리, 파티션엔 울창한 숲이 우거진 그림을 한 장 붙여놨었었지, 녹색을 봐야 좀 진정된다면서, 무한도전 달력에 월별 업무를 기록해놨었고, 커피 마신 후 잘 안 씻게 돼서 밑바닥이 갈색으로 변해버린 머그컵 옆에는 일회용 컵이 쌓여있었어, 맞다 난 무선 마우스 다 떨어져서 유선으로 썼었지 불편하게. 그런 세세한 것들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마치 전날까지 출근했던 사람처럼.
"다음에는 내가 집으로 놀러 갈게, 왈가닥 아가씨도 볼 겸"
꽤 늦은 시간이었지만 다행히 대중교통이 끊기기 전이었다. 지하철 플랫폼에서 서로 반대방향으로 가는 지하철을 타고 헤어졌다. 집 주변을 잘 벗어나지 않는 나에게 오늘은 밖에서 보낸 시간이 더 길었던, 흔치 않은 날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낮과 밤의 시간이 모두 강렬하고 특별했다. 잠시 과거로 시간여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 딸을 낳았던 그때로, 더 거슬러 올라가 결혼도 하기 전의 나를 만나고 온 것 같은 그런 기분. 낮과 밤의 나는 각기 다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자정 무렵 집에 도착했다. 새근새근 잠들어 있는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고 입을 맞췄다. 그래, 여기가 지금의 내가 있을 곳이구나, 제대로 찾아왔다는 생각에 안도의 한숨이 나왔다. 씻고 나니 자정이 넘었다. 다시 일상을 맞이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