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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Nov 06. 2019

영유아 검진의 함정

전문가 말만 믿었다가 아이가 병든다

 누구나 '지금 알고 있는 걸 그때도 알았더라면', 하는 순간이 있다.


 그날은 딸아이의 첫 영유아 검진일이었다. 생후 4개월 된 아이는 3주째 몸무게에 변동이 없었다. 태어나서 모유만 먹던 아이였다. 유축해서 먹지 않고 바로 수유했기에 아이가 한 번에 얼마나 먹는지 그 양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오래 먹는 날도 있었고 짧게 먹는 날도 있었다. 3시간 혹은 4시간마다 수유를 했다. 횟수는 규칙적이었지만 도무지 몸무게가 늘지 않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불안해졌다. 아이의 건강에 이상이 생길까 봐 조바심이 났다.


 아이는 2.91kg으로 건강하게 태어났다. 아이는 4개월 동안 큰 탈 없이 무럭무럭 잘 자라주었다. 그런데 더 이상 살이 붙지 않는 거다. 내 모유 양도 예전 같지 않은 듯했다. 아이가 모유를 잘 먹고 있는지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때마침 1차 영유아 검진 시기였다. 생후 4~6개월 대상으로 하는데, 보통 검진 기간 막바지에 간다고들 했다. 나는 검진 기간 첫 주에 예약을 잡았다. 나의 불안한 마음이 그리 결정했다.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다고 했던가. 1차 영유아 검진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키 6백 분위 / 몸무게 2 백분위 (미달) / 머리둘레 7백 분위

검진상 특이소견 없으나, 몸무게 추적관찰 요합니다


 나는 내심 '아이가 잘 크고 있어요'라는 말을 듣고 싶었던 것 같다. 하지만 검사 결과지는 그렇게 말하고 있지 않았다. 소아과 의사는 내게 말했다. 아주 건조하고 차분한 말투였다. "아이 몸무게가 미달이라 지켜봐야 할 것 같네요. 만약 24개월 후에까지 계속 미달일 경우엔 큰 문제가 되니 대학병원 가서 피검사를 해봐야 할 거예요."라고. 이어서 그녀는 나에게 물었다. "아이 모유 먹나요? 분유 먹나요?" "모유요." 나는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러자 그녀는 한층 단호해진 말투로 내게 명령하듯이 말했다. "오늘부터 당장 분유를 먹이세요"


 병원에 돌아온 날, 나는 눈이 퉁퉁 붓도록 울었다. 아이가 이미 잘못된 것 같아서, 앞으로 건강하게 크지 못할 것 같아서. 내가 모유만 고집한 게 아이에게 해를 끼친 것 같아서. 이 모든 게 다 내 탓같아서.

 한동안 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아이를 바라봤다. '미안해, 아가. 불쌍한 내 새끼.' 하면서.



아이는 정상이다. 부모의 불안이 문제일 뿐.



 지금은 안다. 그때의 나의 불안과 의심이 정상인 아이를 비정상으로 잘 못 인식하게 만들었다는 것을. 그 냉정하고 사려 깊지 못한 소아과 의사의 한 마디를 확대 해석하고 품에 끌어안으며 괜한 속만 끓였다는 것을.


 다행히 내 우려와 달리 아이는 건강하게 쑥쑥 자라주었다. 34개월인 현재 아이는 키도, 몸무게도, 머리 둘레도 모두 평균 이상이다. 더 이상 마른 아이도, 작은 아이도 아니다. 이런 아이를 두고 나는 왜 이리도 걱정을 했던 걸까.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윤우상은 자신의 저서 <엄마 심리 수업>에서 어린아이를 대상으로 하는 검진의 위험성에 대해 상세히 밝혔다.


전문가의 이름으로 사용된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용어'들은 사람을 해치는 무서운 칼이 되기도 한다. 종이쪽지 몇 장에 동그라미 몇 개 치고 단 몇 분, 몇 시간 만에 아이의 현재와 미래를 결정지어버린다. 검사의 가장 큰 문제는 검사 결과에 따라 엄마가 아이를 보는 시선이 바뀐다는 거다. 검사 전에는 아이를 약간 소심하고 내성적이라고만 생각했는데 검사 후에는 사회 기술이 떨어지는 아이, 정서적으로 문제가 있는 아이로 보인다. 부모 마음이 한순간에 불안과 걱정의 마음으로 바뀐다.
- 윤우상, 엄마 심리 수업, 254, 255p


 아이가 ADHD 진단을 받은 계기로 삶의 방향과 태도가 바뀐 저자 김경림은 <ADHD는 없다>라는 책을 통해 부모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멀쩡한 아이를 ADHD 환자로 낙인찍는 것은 아이들의 타고난 가능성을 죽이는 행위라고 일갈한다.


 심리학자 호노스 웹에 의하면 ADHD로 진단받는 아이의 대부분은 창의성, 직관력, 민감한 감수성, 높은 에너지 수준을 갖고 있다고 한다. 이런 성향을 지닌 아이들일수록 지금의 학교 시스템에 맞지 않아 오해와 고통을 받고 있다.
 부모들은 아이가 학교에서 뒤처지고 사회에서 낙오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약물치료를 받는다. ADHD는 실제 이상으로 부풀려졌다. 어쩌면 애초부터 실체가 없는, 불안이 만들어 낸 상상 속의 괴물 인지도 모른다. 개인의 주의력 결핍과 과잉 행동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의 인간에 대한 이해 결핍, 과잉 불안이 빚어낸 문제일 수 있다.
 ADHD라고 쉽게 낙인찍고 약물치료를 하는 것은 아이들의 타고난 가능성을 죽이는 행위일 수 있다. 우리 사회의 미래를 위해서라도 이 아이들의 재능과 자질이 긍정적으로 발휘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 김경림, ADHD는 없다



학습, 성격, 심리, 신체발달 등 다양한 검사의 한계


 어렸을 적 엄마가 들려준 남동생 키와 관련된 일화가 떠오른다.


 내 남동생은 초등학교 내내 반에서 1번을 도맡다시피 했다. 그만큼 키도 작고 왜소했다. 작은 키를 우려한 부모님은 걱정이 많으셨다. 하루는 남동생을 데리고 한의원을 찾았다. 성장판 검사를 하러 갔다고 했었나. 아무튼, 엄마 말로는 그 한의원 의사가 몇 가지 검사를 한 후 아빠를 쭉 훑어보더니 동생이 잘 커봐야 170 센티 안팎이 될까 말까라고 했다는 거다. (아빠는 키가 작은 편이다.) 그러면서 키 크는 한약을 몇 재 지어먹으라고 권했다고. 엄마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고 했다. 기분이 나빠서였다. 엄마는 그 의사 말을 무시한 채 동생 손을 잡고 병원에서 나왔다고 했다. 집에 온 엄마는 씩씩 거리면서 검진 이야기를 내게 들려줬다. 그리고서는 이렇게 덧붙였다.


 "아니, 우리 애가 뭐? 커봐야 170? 우리 애를 뭘 안다고, 그깟 검사 좀 하고 뭐? 170? 내가 장담한다. 우리 아들 키는 천장을 뚫을 정도로 크게 될 테니까. 두고 보라지!"


 평소 엄마답지 않게 흥분한 말투였다. 엄마의 거친 숨소리가 집안을 메우다시피 했다. 남동생은 옆에서 묵묵히 엄마를 지켜봤다. 그리고 엄마는 그다음 날부터 동생에게 고봉밥을 차려줬다. 그전까지 툭하면 밥을 걸렀던 동생도 엄마의 뜻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밥그릇 위로도 한참 솟아오른 밥을 두 공기씩이나 먹어치웠다. 그다음 날도, 그다음 달도, 그다음 해도, 엄마는 부지런히 밥을 했고, 동생은 그릇까지 핥을 기세로 많은 양의 음식을 먹어치웠다. 밥 먹는 데 있어서 몇 해간 두 모자는 그야말로 환상의 복식조였다.


 엄마의 밥심은 동생이 고등학생이 되자 진가를 발휘했다. 중학생까지는 여전히 1~3번을 왔다 갔다 하던 내 동생은 고1이 되자 중간 그룹으로 껑충 뛰어올랐다. 그 시절 나는 '자고 일어나니 키가 쑥 커있다'는 것을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동생은 하루가 다르게 자랐다. 무슨 식물처럼. 서른 살을 훌쩍 넘긴 남동생의 키는 180센티에 달한다.


 집 천장에 닿을 듯 훌쩍 커버린 동생을 바라보며 엄마는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승리의 미소, 성취의 미소였다. 지금도 엄마는 가끔 얘기하신다. 그때 그 의사 말 믿고 한의원 다니고 키 크는 약 먹이고 그랬으면 어땠겠냐고. 이렇게 스스로 잘 클 내 아들 주눅 들어서 클 키도 못 컸을 거라고.


 그렇다. 엄마는 자신의 아들을 믿었던 것이다. 아들의 가능성, 아들의 잠재력을 믿었다. 누가 뭐라 하든, 한 치의 의심도 없이. 조금의 불안도 없이. 엄마는 동생이 듣는 앞에서 "쟤는 외탁을 했어. 그러니 곧 키가 클 거야."라고 말했다. (외가 쪽 식구들은 키가 큰 편이다.) 엄마는 불안과 걱정 대신 자신의 아이를 믿는 선택을 했다. 제 아무리 의사가 한 말이라도, 평균 이하의 키가 될 것이라는 과학적인 수치도 과감히 외면했다. 마음에 안 드는 검사 결과지를 박박 찢어버리고 기억에서도 싹 잊었다. 엄마가 불안해하지 않고 키우니 동생은 알아서 잘 커주었다.



내 아이를 믿어야 한다. 전문가 말을 믿지 말고.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나는 유치원 들어갈 무렵 한글을 읽고 쓸 줄 알았다고 한다. 한글 공부하자, 하면 나는 엄마 옆에 붙어서 열심히 공부했다고. 하지만 남동생은 달랐다고 한다. 한글에 도무지 관심이 없더란다. 몇 번 시도했지만 책상 앞에 앉지를 않자 엄마는 좀 늦게 한글을 떼도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냥 유치원에 보냈다고 한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났을까. 동생의 유치원 담임선생님이 엄마에게 면담을 요청했다고 한다. 요는 이랬다.


유치원 선생님 : 어머님, 반에서 00만 한글을 모르네요. 그래서 친구들을 귀찮게 하는데 집에서 한글 공부를 따로 가르치시는 게 좋지 않을까요?

엄마 : 저도 노력해봤는데 아이는 원하질 않네요. 억지로 시킬 수는 없지 않겠어요? 불편하면 그때 지가 알아서 배우겠지요.

유치원 선생님 :.... (엄마 피셜, 이런 엄마는 처음 보네, 하는 표정이었다고)


 아니나 다를까. 동생은 얼마 후, 자신만 한글을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고 스스로 엄마에게 한글을 알려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그리고 동생은 단 3일 만에 속성으로 한글을 뗐다. 엄마는 말한다. 뭐든지 본인의 의지가 필요한 법이다, 억지로 해서 될 게 아니다,라고.


 내가 엄마의 입장이었다면, 나도 엄마처럼 기다려줄 수 있었을까? 생각해본다. 그렇게 쉽지는 않은 일일 것 같다. 내 아이만 뒤처지는 것은 아닌지, 아이가 원생활에 불편함을 느끼고 있지는 않은지, 별별 생각이 다 들 것 같다. 나라면, 그 날로 아이에게 한글 공부를 하자고 했을 것 같다. 싫다는 아이를 어떻게든 설득했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않았다. 지혜롭지 못한 선생님의 말보다는 자신의 아들의 성향을 인정하고 존중했다. 빨간색인 아이에게 너는 왜 초록색이 아니냐고, 다른 아이들은 다 초록색이지 않냐고 다그치지 않았다. 그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새삼 깨닫게 된다.


 세상에 태어난 아이들은 한 명의 예외 없이 모두 다 '정상'이다. 장애를 갖고 태어난 아이도 남과 비교하지 않고 그 존재 자체로 보면 '정상'이다. 자기만의 세계가 있고 자기만의 기쁨, 자기만의 행복이 있기 때문이다. 아이들 나름의 세상과 우주가 있다. (중략)
 아이들이 저마다 내뿜는 자기 색깔을 '평균'에 구겨 넣으려 한다. 누가 불안한가, 엄마인가? 아이인가? 엄마는 아이를 보고 이렇게 하면 된다. '우주다!' '독특한 우주다!' '아주 특별한 우주다!' 그럴 수 있는 엄마여야 한다.
- 윤우상, 엄마 심리 수업, 262, 263p


 '권위적인, 전문적인, 과학적인' 다양한 검진에 휘둘리느라 정작 '위대하고 특별한 우주'인 우리 아이의 진가를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은 아닌지, 책을 읽고 반성했다. 무궁무진한 아이의 세계를 그대로 인정하고 존중하고 믿는 엄마가 되겠다고 다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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