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감으로 느끼고 색으로 표현하는 완두콩 놀이
완두콩의 계절이 돌아왔다. 아이 낳기 전, 나에게 6월은 여름휴가 계획을 짜고 페디큐어 예약을 하는 시기였지만, 이제는 완두콩이 먼저 떠오른다. 완두콩은 재작년 아이 이유식을 만들 때 처음 접했다. 완두콩을 한 자루 사서 냄비에 삶고 콩깍지를 까고 절구통에 넣고 쪄서 제철 이유식을 만들어 먹였다.
그 아이가 어느덧 29개월이 되었다. 아이는 어린이집에서 고사리 손으로 직접 깐 완두콩을 한 아름 가져왔다. 엄마, 아빠에게 가져다준다면서 상에 콩껍질을 수북이 쌓을 만큼 많이 깠다고 했다. 양을 보니 많긴 많다. 먹기만 하기엔 양이 많아 완두콩 놀이를 하기로 한다.
우리 완두콩을 가지고 놀까? 하자마자 아이는 봉지에 담긴 완두콩을 뒤집어 거실 한가운데 와르르 쏟는다. 이럴 줄은 몰랐는데.... 전지에 완두콩 그림 정도 그리려고 했었는데...
당황하지 않은 척 (심호흡 짧게 두 번하고) 외쳤다.
우와!
완두콩이 또르르르, 떼굴떼굴 굴러가네!
아이는 굴러가는 완두콩을 한참이나 관찰하더니 멈추자 다시 손으로 흐트러뜨리며 완두콩을 굴리기 시작한다. 완두콩이 사방으로 불규칙하게 흩어지더니 몇십 알 정도는 소파 밑으로 기어들어간다.
나는 그 광경을 보고 입이 살짝 벌어졌지만 황급히 치우는 대신 눈을 질끈 감기로 한다.
'그래, 치울 생각은 조금 있다가 하자. 이왕 놀기로 했으니 노는 아이의 마음으로 임하자.'
이제 막 완두콩 놀이에 흥미를 보인 아이의 흥을 깨뜨리고 싶지 않았다. 아이가 흩뿌린 완두콩을 엄마가 무릎으로 기어가며 정리한다면 아이는 자신이 뭔가 잘못한 것이라 생각할 터였다. 대신 크레파스를 하나 쥐어주고 관심을 돌려보기로 했다.
"채유야, 이거 완두콩 색깔이랑 똑같다. 여기다 우리 완두콩을 그려볼까?"
나는 초록색과 연두색 크레파스를 아이 눈 앞에 보여주면서 허공에 대고 둥글게 둥글게 그리는 시늉을 한다.
아이는 알겠다고 하고 검은색 크레파스를 쥐고는 거침없이 몇 겹의 동그라미를 그려댄다. 그리고 가운데 완두콩을 하나 딱 얹고서는 힘주어 얘기한다.
"엄마, 이거랑, 이거랑 똑같아!"
엄마, 아빠한테 직접 까주겠다며 일부러 껍질에 쌓인 완두콩도 몇 개 챙겨 왔다. 엄마 손 줘봐, 하더니 야무지게 껍질을 비틀어 숨어있던 완두콩을 하나씩 손에 털어준다. 껍질을 비틀 때 몇 개는 뿅. 뿅. 하고 튀어나갔는데 그게 재밌었는지 일부러 다른 껍질을 비틀고 또 비틀며 완두콩을 통. 통. 통 튕긴다. 덕분에 아빠 몫은 사라졌다.
아이는 완두콩의 싱그러운 향기를 맡고 풋풋한 생 완두콩의 맛을 입안 가득히 느껴본다. 정말 떫었을 텐데도 뱉지도 않고 맛을 음미한다. 맛없지? 완두콩 푹 삶아서 이따 저녁에 먹자. 하니 그제야 고개를 끄덕거린다.
아이랑 완두콩을 만지작 거리면서 놀고 있자니, 구슬에 물감을 묻히고 이리저리 굴리면서 그림을 그렸던 활동이 생각났다. 물감 몇 개와 스케치북을 잘라와 한번 해보기로 한다. 완두콩에 물감을 묻혀서 스케치북에 놓긴 놨는데 무게가 가벼운 완두콩은 구르지가 않았다. 풀을 붙인 듯 그 자리에 딱 붙어있을 뿐이었다.
어? 완두콩이 안 굴러가네... 나지막이 혼잣말을 했는데 아이가 들었나 보다. 엄마, 왜? 안돼? 묻는다. 완두콩이 가벼워서 물감이 묻으니까 안 굴러가네. 솔직하게 설명했다. 대신 손가락에 물감을 찍어 완두콩처럼 콕콕 찍어보자고 하고 시범을 보였더니 아이는 금세 얼굴이 환해지며 두 손에 흠뻑 물감을 묻힌다.
파란색, 초록색, 주황색, 노란색 네 가지 물감을 골고루 섞은 것 같은데 다 섞이니 희한하게 초록색이 되었다. 손과 발에 물감을 잔뜩 묻히고 손도장, 발도장을 신나게 찍는다.
꼭 여름 나뭇잎 같다!
여름에는 나뭇잎들이 이렇게 선명한 초록색이 된다고 했더니 더 신나서 온 몸으로 표현한다. 물감놀이는 돌 이후부터 꾸준히 해왔지만 매번 할 때마다 아이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보다 이렇게 자기 몸으로 물감을 묻히고 표현하는 것을 훨씬 더 즐긴다.
평소 같으면 이제 그만하겠다고 씻는다고 표현을 할 텐데, 흥이 올라왔는지 물감을 더 달라고 요청한다. 전지를 새로 하나 더 깔아줘야 하나.. 고민하는 새에 아이는 스스로 물감을 가져가서 짜고 손과 발에 묻힌다. 이미 온통 초록빛이다. 놀이에 집중하는 아이는 꼭 잔디밭에 앉아있는 것 같다.
아이의 두 손은 어느새 초록색 장갑을 낀 듯하다. 채유, 초록색 장갑을 꼈네? 하니 어디? 하며 자기 손을 확인한다. 그러더니 신나서 소리친다.
엄마! 완두콩 장갑이야!
어머, 정말 그러네. 채유 말이 맞네. 하며 맞장구를 친다. 아이는 자신의 두 손을 한참을 바라본다.
27개월 이후 아이는 떼가 많이 늘었다. 말 표현력도 늘고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들도 많아지고 감정도 더 예민해지고 섬세해졌다. 그래서 감정적으로 힘든 순간들이 전과 비교할 수 없게 자주 찾아왔다. 어린이집에 안 가겠다, 낮잠 안 자겠다, 과자를 지금 먹겠다 등등등. 아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아지면서 조금씩 지쳐가기도 했다.
그럴 때마다 아이를 대하는 나의 대화 방식, 사고방식에는 문제가 없는지 돌아봤다. 아이가 커가는 만큼 엄마인 나도 성장해야 했다. 다시 육아서를 찾아 읽고 어린이집 선생님과 자주 상담하고 아이의 마음을 공감하기 위해 노력했다. 아니, 현재에도 노력하는 과정이고 이 노력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것이다. 내가 조금이라도 다르게 행동하고 말하면 아이는 곧바로 달라졌다.
놀이 시간만큼은 아이는 떼를 부리거나 울거나 하지 않는다. 놀이 시간 동안만은 아이는 뭐든지 스스로 표현하고 마음껏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있기 때문이리라. 물을 쏟아도, 콩을 굴려도, 물감을 밟아도 혼나지 않으니까. 혼나기는커녕 더 하라고, 더 해보라고 격려도 받고 응원도 받으니까.
어쩌면 아이에게 그런 시간과 기회들이 더 많이 필요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앞으로 놀이 시간과 횟수를 더 늘리고 아이에게 더 몰입하고 표현할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줘야겠다고 다짐했다. 놀이 시간 동안만큼은 나 역시 아이에게 한껏 너그러워질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기도 하니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