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뻐지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돈을 낭비했다
어렸을 적, 엄마는 나에게 말했다.
"화장실에서 힘줄 때 코를 잡아당기면서 힘을 줘. 코가 높아지게."
"엄만 네 다리가 오자로 휠까봐 업어주지도 않았어."
"치마 입고 그렇게 뛰면 안 된다."
"예뻐지려면 불편함은 감수해야 하는 거야."
나는 3살 된 딸에게 이렇게 말한다.
"머리 묶어야 예쁘지, 살짝 따끔한 것만 참으면 돼."
"다리 길어지게 엄마가 쭉쭉이 해줄게."
"원피스 입으니까 공주 같네."
"여자애가 얼굴 다치면 큰일 나."
그동안 나는 스스로 얼마나 코르셋을 조이며 살아왔는지 알지도 못한 채, 그 왜곡된 시각을 고스란히 내 딸에게 전해주고 있다는 사실을 불과 얼마 전에야 깨달았다.
아, 여태 나는 무슨 짓을 하고 있었던가?
나에게,
그리고 이제 겨우 3살 배기인 내 딸에게.
정말 고맙게도, 단 한 편의 영화가 내게 깨달음을 줬다. 넷플릭스 오리지널 영화 <Nappily Ever After>가 바로 그것이다.
사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 우리 사회가 여성에게 압박하는 외모 강박을 그리 심각하게 느낀 적은 없었다. (이미 이런 문화에 젖어있었던 것이다.) 영화는 여성의 외모에 대한 사회의 시선, 암묵적 규범 등의 메시지를 담고 있었다.
당연한 것이 아닌 것을 당연하게 요구하고 불편함을 감수하면서까지 받아들이는 사회. 획일화된 아름다움의 기준을 올바르다고 믿고 따르는 문화.
영화를 보는 내내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나도 그녀와 다를 바가 없구나
서구 사회에서 흑인, 특히 흑인 여성의 '곱슬머리'가 어떤 의미를 갖는지 아는가? 금발의 백인 여성이 미의 기준이 되는 사회에서 흑인 여성의 자연스러운 곱슬머리는 전혀 아름답지 않으며 감춰야 하는 대상이다.
아주 어릴 때부터 자신의 곱실거리는 머리를 펴면서 '내 머리는 펴야만 하는구나, 있는 그대로 놔두면 안되는구나'라는 생각을 스스로 하게 만든다. 그리고 생각은 행동을 제한한다. 영화 속 주인공, 바이올렛처럼 말이다.
바이올렛에게 수영은 금지된 놀이였다. 물에 닿으면 엄마가 공들여 펴준 머리가 망가지기 때문이었다. 다른 아이들처럼 수영장에 풍덩 빠져 물놀이를 하고 싶지만 애써 참으며 바라만 본다. 사회가 강요한 '미모'를 유지하기 위해서 말이다.
흑인 여성의 곱슬머리는 공식석상에서도 금기시된다. 흑인 본연의 아프로 헤어는 '지저분'한 것이고 '레게머리'를 하고 회사에 출근할 수 없다. 프로페셔널해 보이지 않는다는 인식 때문이다. (이 또한 흑인 남성은 제외다.)
미셸 오바마도 남편이 퇴임한 후에야 자신의 곱슬머리를 공개할 수 있었다. 한 작가는 "미셸이 자연스러운 헤어를 유지했다면 오바마가 대통령에 당선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편견이란 때때로 소름 끼치게 무섭다.
'곱슬머리' 차별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는가.
동양인인 우리에게도 '곱슬머리'같은 존재는 널려있다. 쌍꺼풀 수술부터 눈썹 문신, 속눈썹 연장, 네일과 페디큐어, 하얀 피부를 위한 미백 화장품과 피부과 시술, 다이어트, 뽕브라, 왁싱, 하이힐 등등등.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예쁜 외모를 가꾸는 것은 여성의 의무가 되었다. 쌩얼로 회사를 나가면 '어디 아프냐'는 소리를 듣는다. 사람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라고 한다. 아파 '보이지' 않기 위해 우리는 새벽부터 일어나 꼼꼼하게 화장을 하고, 점심 먹은 후 수정 화장도 마다하지 않는다.
영화 속 바이올렛이 자신의 곱슬머리를 감추려고 안간힘을 쓸 때마다 뭐, 저렇게까지 할까, 생각했으면서도, 어제 아이 등원시키면서 피부 잡티를 가리기 위해 컨실러를 바르고 있는 거울 속 나를 만났다. 나는 여전히 시선에서 자유롭지 않다.
사춘기 시절, 외모에 대한 내 관심은 절정에 이르렀다. 학교 가서도 학원가서도 거의 매 시간 거울만 붙들면서 살았던 것 같다.
얼굴 전체에 난 여드름을 감추려고 파우더를 바르고 고르게 나지 않은 앞니를 감추기 위해 입을 가리고 웃었다. 광대는 너무 튀어나온 것 같고, 눈은 너무 가늘고, 코는 너무 낮은 것 같고, 키도 너무 작고, 피부도 너무 누렇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내 외모에 대해 마음에 드는 부분이 하나도 없었다.
외모는 그 자체로 내 콤플렉스가 되었다. 그리고 성인이 되어 나는 쌍꺼풀 수술을 하고 치아교정을 하고 피부과를 다녔다. 언제나 10센티에 달하는 하이힐을 신느라 발 뒤꿈치는 성 할 날이 없었고 발은 맨날 퉁퉁 부었다. 짧은 치마를 입고 딱 붙는 원피스를 입느라 늘 살이 찌지 않는지 체크해야 했다.
러네이 엥겔른의 책 제목처럼 나는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오미 울프가 주장한 바와 같이 그 어떤 것이 여성에게, 나에게 '아름다움을 강요'하고 있었다. 그녀의 말대로 나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진짜 문제는 여성이 화장을 하고 안 하고의 문제가 아니다. 몸무게가 늘고 줄고, 수술을 하고 안 하고, 옷을 차려입고 대충 입고, 얼굴과 몸매를 예술품으로 만들든 아니든 이런 것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진짜 문제는 우리에게 선택권이 없다는 것이다.
- 나오미 울프, 무엇이 아름다움을 강요하는가, 430p
나는 예뻐지기 위해 너무 많은 시간과 돈과 에너지를 낭비했다. 그러면서도 여전히 나는 내가 충분히 '예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나는 내 외모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아이를 낳고는 더 심해졌다.
엄마가 된 후 예뻐지는 것과 거리가 더 멀어지다 보니 오히려 신체 모니터링에서 훨씬 자유로워지긴 했다. 몸은 편해졌다. 마음도 가벼워졌다. 여전히 엄마에게도 '아름답기'를 강요하는 사회적 기준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우리는 다르게 행동해야 한다. 자신을 느끼고 주체적으로 자신을 정의해야 한다. 우리의 돈과 시간을 다르게 써야 한다. 우리의 몸은 더 건강해져야 한다. 우울증과 분노가 흔한 것이 되어서도, 심각한 것이 되어서도 안된다. 이제 여성은 시선을 받는 대상이 되는 것을 거부하고 멀리 내다보아야 한다. 저 넓은 세상은 봐야 할 것이 아주 많다. 해야 할 일이 아주 많다.
- 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343p
러네이 엥겔른의 말처럼, 이제 거울에서 시선을 떼고 세상과 마주하고자 한다. 더는 사회가 강요하는 '아름다움'에 집착하지 않으려고 한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건강하게 살아가기 위해 내 시간과 에너지를 쓰려고 한다.
아이를 '여자 아이'라는 프레임에 가두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로 다짐했다. 이전에는 놀이터에서 뛰어놀아야 하는데 움직임이 불편한 긴치마를 입히고, 아이가 싫어했지만 단정하고 예쁘게 보여야 한다는 이유로 헝클어진 머리를 묶었었다. 아이에게 '편한 것' 보다 아이가 입었을 때 '예쁠 것'을 더 먼저 생각했었다.
이 영상은 부모과 과학이나 공학에 관심을 갖는 소녀를 어떤 방식으로 좌절시키는지를 은유적으로 보여주었다. 광고에서는 소녀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놀지 못하게 하는 모습이 나왔다. 우리는 여자아이에게 예쁜 옷을 입히면서 옷이 더러워지지 않게 조심해서 놀라고 주의를 주곤 한다. 그러나 예쁜 옷을 입은 여자아이는 식물을 탐구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어쩌면 놀이기구의 위아래로 기어 다니면서 중요한 운동 기술을 연마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여자아이는 프릴이 달린 드레스 안에 갇혀서 예뻐 보이는 데에만 집중하도록 강요당한다. 여자아이에게 옷을 입히는 방식은 평생 지속되는 신체 모니터링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 러네이 엥겔른, 거울 앞에서 너무 많은 시간을 보냈다, 97p -
하지만 이제는 노력할 것이다. 의식적으로 말하고 행동할 것이다. 의식하지 않으면 엄마인 내가 나서서 편견과 고정관념과 차별을 가르치는 꼴이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 딸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예뻐지기 위해 불편함을 감수할 필요도, 남의 시선에 맞춰 억지로 노력할 필요도 없다. 여자 아이라서, 딸이라서 이렇게, 저렇게 해야 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너는 네 있는 그대로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랑스럽고 소중하다. 그리고 한 마디 덧붙이고 싶다.
딸아, 예쁨은 너의 의무가 아니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