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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ug 14. 2019

유난 떤다는 그 말

'유난'한 삶을 이해하는 사회가 필요한 이유

삼겹살이 먹고 싶었던 어느 날 저녁, 나와 남편은 3살 된 딸과 함께 동네 삼겹살집을 찾았다. 들어서자마자 후끈한 공기가 에워쌌다. 무더운 여름날 시원한 에어컨 바람을 기대했던 나는 살짝 멈칫했다. 에어컨 틀었으니 곧 시원해질 거라는 주인의 말에 우리 가족은 신발을 벗고 좌식 테이블 안으로 들어갔다.


누런 장판 위를 걸을 때마다 삼겹살 기름으로 추정되는 미끈한 어떤 것이 발바닥에 닿았다. 그 야릇한 촉감에 아래를 내려다보니 형광등에 비친 장판은 불규칙적으로 윤이 나고 있었다.


뭔가 찜찜했지만 도로 나갈 용기는 없었다. 남편은 벌써 자리에 앉아서 수저를 세팅하고 있었다. 나와 아이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착석과 동시에 삼겹살 2인분과 술을 시켰다.


물을 한잔 마신 아이가 화장실을 찾았다. 나는 아이의 손을 잡고 주방 옆에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리고 나오는 길에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보고 말았다.


손님에게 낼 솥뚜껑 (그 집은 솥뚜껑 삼겹살집이었다) 옆에 널따란 끈끈이에 잔뜩 붙어있는 수십 마리의 파리떼들. 옆이 아니라 솥뚜껑 위에 올려져 있었던 것 같기도 하다.


허름한 것과 더러운 것은 다르다.

그 집은 허름한 집이 아니라 위생상태가 불량한 음식점이었던 것이다.


그 죽은 파리떼들을 본 이상, 그곳에서 삼겹살을 먹고 싶지 않았다. 밥맛이 뚝 떨어졌다. 어른인 나와 남편은 그렇다 치더라도, 아직 어린아이에게 이 집에서 내주는 반찬과 밥을 먹여도 되는지 의심스러웠다.


그런 생각이 머릿속을 채우고 있는 그때, 내 옆에 있는 방석을 살짝 옮겼는데 그 밑에 죽은 파리 한 마리가 있는 게 아닌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악, 이게 뭐야!" 하고 큰 소리를 냈다. 남편은 왜 그러냐고 물었고, 나는 여기 죽은 파리가 있다고 답했다.


내 대답을 들은 남편은 싸늘한 표정으로 감정을 실어 한마디 쏘아붙였다.

 

파리 하나 가지고 뭐 그렇게 유난을 떨어!





나는 벌레를 무서워한다. 어느 정도냐 하면, 예전에 살던 집에서 바퀴벌레가 나왔을 때 너무 무서워서 식탁 위에 올라가 있었다. 벌레만 보면 몸이 얼어버리는 느낌이 든다. 벌레를 스스로 처리하지 못해 항상 엄마를 부르고 동생을 불렀다. 아무도 없을 땐 그냥 집을 나와버렸다. 벌레는 늘 나를 무력하게 만들었다.


그런 나를 잘 아는 남편은 (왜 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나를 못마땅해했다. 내가 벌레가 무섭다고 할 때마다 나에게 엄마가 되면 아이를 위해 벌레쯤이야 손으로 턱턱 잡을 줄 알아야 한다고 했다. 내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남편 앞에서 벌레를 보고도 티 안내고 못 본 척 한 순간들도 많이 있다.


나는 엄마가 된 지 31개월이 넘었지만 여전히 벌레가 무섭다. 아이가 옆에 있어도 벌레를 잡아주지 못한다. 오늘도 그랬다. 요플레를 먹던 아이가 벽을 향해 손짓을 했다. 돌아보니 소파 위에 새끼손톱만 한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생명체가 붙어 있었다.


최대한 차분한 척 연기하며 휴지를 여러 겹 가져왔다. 그 휴지로 그 벌레를 누르는 동작을 머릿속에 수없이 그렸지만 몸은 따라주지 않았다. 아이가 벌레를 향해 손을 뻗을까 봐 두려우면서도 휴지를 움켜쥔 내 손은 좀처럼 뻗을 줄 몰랐다. 결국 에프킬라를 뿌리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검은 생명체의 시체는 몇 시간이나 지난 뒤 조심스럽게 처리했다.


평소 아이에게 벌레와 곤충도 소중한 존재이며 우리와 함께 살아가는 존재라고 얘기하면서도 정작 벌레만 보면 (최대한 티를 안 내려고 노력한다지만) 나는 언행불일치의 끝을 보여주고 만다.


아이에게 미안하지만, 벌레 잡는 것만큼은 정말 못하겠다. 모성애랑 상관이 없는 것을 알면서도, 그게 마치 내가 보통의 엄마와는 다르다는 생각에 한편으론 슬프고 위축되기도 한다.


그런 나이기에, 그날 남편이 무심코 내뱉은 "유난 떤다"는 말은 내 마음에 생채기를 냈다.





편 가르는 말, 유난


유난의 사전적 의미는 다음과 같다.

언행이나 상태가 보통과 아주 다름. 또는 언행이 두드러지게 남과 달라 예측할 수 없는 데가 있음.


유난하다는 말에는 이런 의미가 내포된다.


너는 남과 달리 왜 그러는데?

다들 그렇게 사는데 왜 너는 불만인 건데?


독창적이고 창의적이라는 말과는 구분되는 것이, 유난하다는 말에는 부정적인 뉘앙스가 아주 강하다.


넌 정말 창의적이구나!

넌 정말 유난히구나!


같은 뜻 다른 느낌이 아닐 수 없다.


날이 갈수록 우리 사회는 구분 짓기에 혈안이 된 듯하다. 1020세대, 4050 세대, 386세대, 90년대생, 젠더 갈등, 성 정체성 갈등, 정규직과 비정규직, 분양 주민과 임대주민, 아이 낳은 가족과 그렇지 않은 가족, 반려동물을 키우는 집과 그렇지 않은 집 등등.


나와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 우리 사회는 각자가 보기에 점점 더 유난 떠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것처럼 느껴진다. 별거 아닌데 야단인 사람들이 판을 치는 것 같다.


기성세대와 청년세대는 서로에게 말한다.

회사와 직원은 서로에게 말한다.

여자와 남자는 서로에게 말한다.

더 가진 자와 덜 가진 자는 서로에게 말한다.


이게 뭐라고 그 유난을 떠냐!



'유난'한 삶을 이해하는 사회


유난이라는 말이 상처가 되는 말일 줄은 알지 못했다. 남과 나를 구분 짓는 데 이렇게 유용한 단어인지 알지 못했다.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단어로 사용될 수 있는지 알지 못했다.


무슨 강아지가 무섭다고, 너도 참 유난스럽다.

좀 더러우면 어때, 유난스럽게 굴지 마.

해산물도 못 먹는다니 네 입맛도 참 유별나다.

 

일상 속에서 우리는 너무 쉽게, 아무 생각 없이, 무심코, 이런 말을 내뱉고 있지는 않는지 생각해봐야 할 때이다.


말 한마디, 생각 한 조각들이 모여 사회를 이루는데 쪼개면 쪼갤수록 균열이 생기고 틈이 벌어질수록 사회는 분열된다. 분열된 사회에서는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이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없다.


우리는 각자 자신만의 수많은 '유난'을 가지고 있다.

남과 다르다는 것은 배척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가꿔야 할 대상이다. 다양한 '유난'들이 모였을 때 기대 이상의 시너지를 낼 수 있다.


뇌과학자 정재승 박사에 따르면, 굉장히 멀리 떨어져 있는 것을 서로 연결하는 능력, 이것이 실제로 창의적인 사람의 뇌에서 공통적으로 보이는 현상이라는 사실을 21세기 신경과학자들이 실험을 통해 알아냈다고 한다. 이는 곧, 나와 다른 지점들, 우리 문화와 이질적인 문화를, 서로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것들을 서로 연결해보는 과정 속에서 혁명의 싹이 튼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보다 훨씬 더 다양성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사회, 유난한 삶을 이해하는 사회가 필요한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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