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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엄마 엘리 Aug 28. 2019

브런치 언어의 여자, 유튜브 언어의 남자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가진 이들이 부부로 살 때 벌어지는 일

결혼한 지 4년 차에 접어들었다. 한 번의 헤어짐 없이 8년의 연애를 했으니 햇수로 13년째 한 남자와 연애, 결혼, 육아를 함께 하고 있는 셈이다. 아무리 오래 연애를 했어도 결혼생활은 또 다르다고 하던데 그 말을 실감하지 못했다. 물론, 아예 차이를 못 느낀 것은 아니었지만.


결혼하고 한 집에 함께 산지 한 달 남짓 되었을 때였다. 이 남자, 말이 너무 없는 게 아닌가. 연애할 때는 느끼지 못했는데 한 공간에서 하루 종일 함께 한 이 남자는 말수가 너무 없었다. 연애 시절 우리는 틈만 나면 카페에 가서 대화를 했고, 잠자기 전에는 몇 시간이고 전화통을 붙잡았었는데, 도대체 어떻게 이 남자랑 그 오랜 시간 수다를 떨었는지, 이 남자가 그 남자가 맞는지 헷갈릴 정도였다.


돌이켜보면, 연애시절 대화할 때는 주로 내가 말을 하고 그는 들었던 것 같다. 그는 원래도 말이 많은 사람은 아니었던 것이다.


사실, 나는 그의 무던한 성격, 한결같음이 참 좋았다. 감정 곡선이 수시로 흔들리고 사사로운 일에 크게 호들갑을 떠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소나무같이 한 자리를 지키는 듬직한 사람이 잘 맞겠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이 남자를 만나는 8년 동안, 나는 정서적으로나 감정적으로나 많이 안정되었고 편안해졌다.


그런 나와 남편이 서로 다르다는 것을 확실히 느낀 것은 아이를 낳은 후였다. 아이를 키우면서 우리는 연애의 연장선에 있었던 신혼생활에서 다루지 않았던 다양한 주제, 게다가 생소하기까지 한, 에 대해 수시로 대화를 해야 했고, 그 빈도는 아이가 커갈수록 점점 더 늘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그와 내가 서로 다른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가지고 있다는 데 있었다. 누가 누구를 인내하고 받아주고 하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냥 서로 '다른' 것이었기에. 그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누군가는 서운해했고, 누군가는 그냥 한 말인데 누군가는 그것을 오해하는 상황이 종종 벌어졌다.


3년의 시간이 지나자 깨닫게 되었다.


나는 브런치의 언어를 가진 여자이고, 그는 유튜브의 언어를 가진 남자라는 것을.





일러스트레이터 강한_소리 내어 그간의 진심을 전할 수 있다면



글로 배우는 여자, 영상으로 습득하는 남자


무언가 궁금한 게 생겼을 때, 나는 주로 책을 찾아본다. 육아에 대해 알고 싶으면 육아서를 읽고, 영어를 잘하고 싶으면 영어책을 파고드는 식이다. 심지어 운동도 책으로 익히는 것을 좋아한다. 맛집 정보나 요리 레시피 등 일상에서 만나는 궁금증도 검색창에 검색해 글을 '읽어'내려가며 해결한다.


반면, 남편은 영상을 '보는' 것을 선호한다. 남편의 관심사인 홈트레이닝, 요리 같은 것도 유튜브에서 검색해 영상으로 확인한다. 사회, 경제적 이슈도 신문기사보다 뉴스를 보는 편이고, 게임, 어학에 관련한 궁금증도 영상으로 풀곤 한다. 남편은 종종 책을 읽고 싶어 하지만 그것을 실천에 옮기지는 못한다. 그런 남편은 나에게 글을 읽어내려가기가 힘들다고 호소한 적이 있다. 그는 책은 짧은 시간에 원하는 것을 발췌하거나, 한눈에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답답하다고 했다.


육아에 있어서도 그랬다. 아이가 태어나기 전, 나는 각종 육아서적을 읽고, 출산, 임신 카페 글을 탐색하며 나름의 육아 기준을 세우려고 노력했다. 나는 그에게 내 생각을 공유했고 그는 내 의견을 지지해주었다.(고 생각한다.)


아이가 태어났고, 우리는 빠르게 엄마, 아빠의 역할을 수행해야 했다. 잠자리가 예민한 남편을 위해 우리는 각방을 썼는데,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그는 그대로 불편하고 나는 나대로 힘들었다. 나는 혼자서 아기의 밤 수유를 책임진다는 것이 버거웠고, 기관지염으로 기침하며 잠 못 드는 아이를 온전히 돌본다는 것이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힘겹게 느껴졌다.


그때 우리는 자주 싸웠다. 내 입장에선, 아픈 아기와 나를 두고 밤이 되면 다른 방에서 혼자 편하게 자러 가는 그가 얄미웠다. 특히, 싱크대에 설거지를 잔뜩 쌓아두고 들어갈 때면 나의 서운함은 폭발했다. 나는 잠도 못 자고 애를 보는데 아침에 저 설거지까지 나보고 하라는 것인가? 하고 분노했다. 그는 다음 날 자기가 처리할 생각이었다고 했고 실제로 설거지를 하고 출근을 했다. 그의 의도는 꿈에도 몰랐던 나는 잠들었을지도 모르는 그를 배려하지 않은 채, 새벽 수유를 하며 한 페이지를 훌쩍 넘긴 긴 장문의 카톡을 남겼다. 나의 서운한 감정을 구구절절하게 '글'로 호소한 것이다. 그는 답장하지 않았다.


지금은 안다. 그의 무응답은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을. 한 집에 있었으면서도 말로 간단하게가 아닌, 글로 장황하게 풀어썼던 내 방식은 그와 제대로 대화할 수 없는, 그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일러스트레이터 강한_죄책감이란 차선책에 대한 변명일 뿐이다



서사가 중요한 여자, 압축을 원하는 남자


나는 기-승-전-결의 순서로 이야기하는 편이다. 나의 말하기 방식은 서사, 즉 어떤 사실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글의 양식에 가깝다. 나에게는 '발단'이 중요하다. 이 이야기를 꺼내는 배경과 이유, 그 시작의 발단, 전개되기 전의 상황을 꼭 자세히 설명하고 싶어 한다. 듣기에 따라서는 (어쩌면 자주) TMI가 되지만 말이다. 여하튼, 자연스럽게 나의 말은 엿가락처럼 끊어질 듯 끊어지지 않고 늘어나게 된다.


반면, 남편은 결론이 먼저 나오는 걸 선호한다. 간략하게 말해서, 한 마디로 00야.라고 결론부터 말한다. 그 뒤에 세부 설명이 붙어주면 좋으련만 그 뒤에 나올 말을 기다리는 나를 위한 친절한 설명은 뒤따라오지 않을 때가 많다. 기다리다 지친 나는 항상 그에게 묻는다. 그래서 어떻게 됐어? 왜 그런 건데?라고.


유튜브는 2분, 길어도 10분 내 짧은 시간 동안 하나의 주제를 보기 편하게 편집하고 요약, 압축한 결과물이다. 청자(듣는 사람)의 시간을 단축시켜주는 청자를 배려한 친절한 플랫폼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 브런치는 화자(말하는 사람)에게 집중한 플랫폼에 가깝다. 화자는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다양한 근거를 들어 자세히 설명하기도 하고, 복잡 미묘한 어떤 현상을 세밀하게 묘사하기도 한다. 설득력을 더하면 더할수록 글의 분량은 길어지게 되니, 읽는 이는 시간을 적지 않게 투자해야 글의 핵심을 이해하고 맥락을 파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유튜브의 언어를 가진 남편은 나에게 말한다.


"당신 말은 서론이 너무 길어"


듣기 전엔 몰랐는데, 듣고 보니 그랬다. 나는 말하고자 하는 핵심 주제에 앞서, 설명을 덧붙이는 것을 좋아했다.


이는 우리가 대화할 때 기대하는 바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뜻했다. 서사가 중요한 나는 그에게 자세한 설명, 디테일한 묘사, 사건의 경위 등을 기대하고 있었고, 압축이 중요한 그는 나에게 명확한 결론, 말하는 바의 핵심을 기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일러스트레이터 강한_The best of me



언어의 온도에 민감한 여자, 언어의 온도에 둔감한 남자 



(앞에 장황하게 설명한) 이러한 이유로 나는 언어의 온도에 민감하다. 대화를 하며 상대방이 선택한 단어의 뉘앙스, 억양, 눈빛, 말에 숨겨진 의미, 이 말을 꺼낸 배경 등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언어가 가진 온도를 감지하려고 부단히도 애를 쓴다.


하지만 사실인지 아닌지, 결론은 무엇인지에 집중하는 남편은 당연히 언어의 온도에 둔감할 수밖에 없다. '이러저러했지만, 결국 이렇게 된 거잖아' 하고 결론을 지으면 그뿐이다. 언어의 온도 차이를 느끼지 않는 것은 아니나 거기에 그렇게 큰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얼마나 깔끔하고 심플하고 쿨한 방식인가. 그래서 때때로 나는 그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닮고 싶을 때가 있다.


만약, 그와 내가 동일한 커뮤니케이션 방식을 가진 사람이었다면 우리의 대화는 더 매끄러웠을까? 지금보다 이해의 폭이 더 커졌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가 나의 방식으로 대화하는 사람이었다면 '피곤'함을 느꼈을 것이라 고백한다. 서로 디테일을 따지고, 언어의 온도에 집착하고, 장황하게 서사를 늘어놓았을 테니까.


서로의 커뮤니케이션 방식의 차이를 인정하자 비로소 상대방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최대한 객관적인 입장에서 쓰고 싶었으나, 그의 입장을 자세히 들을 수 없는(아마도 영원히) 나로서는 나의 주관적인 입장에서만 서술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을 밝혀두고 싶다. 이 점이 아쉽기도 하고 다행스럽기도 하다. 브런치에 맞지 않는 그가 브런치에 들어올 일은 없을 테니, 어쩌면 이 글은 그가 읽게 되진 못할 것이기 때문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장황하게) 이렇게 글을 남기는 것은, 서로 다른 언어를 가진 우리가 부부로서 살아갈 새털처럼 많은 보통의 날을 위해서이다. 살아가면서 의도치 않게 우리는 또 서로에게 서운한 감정을 느끼고 상처를 줄지도 모른다. 그때마다 이것을 기억하려고 한다.


나는 브런치의 언어로 말하는 여자, 그는 유튜브의 언어로 말하는 남자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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